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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27화 (127/1,567)

127화. 화산의 검은 강하다. (2)

밤새 뜬눈으로 날을 지새운 위립산이 충혈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었다.

'이건 미친 짓이야.'

어제는 결국 저 청명 일당의 분위기에 휩쓸려 버린 위립산이었다. 그 정도의 연륜이 있는 이가 아들뻘 되는 이들의 분위기에 휩쓸린다는 건 웬만해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저놈들은 보통 놈들이 아니었다.

결국 청명은 화영문 창고에 있던 술독을 모조리 비워 버린 뒤에야 잠들었다. 사형들이 말리지 않았다면 뭘 해도 더 할 기세였다는 게 더 무섭다.

'정말 괜찮은가?'

어제 화산의 제자들은 분명 과한 짓을 했다.

그들이 무당 제자들의 독기를 바짝 세워 두지 않았는가? 위립산이라도 그런 모욕을 받고 그냥 넘어가지는 못할 것이다.

오늘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면 화산의 제자들은 절대 무사할 리가 없다.

하나…….

위립산이 슬그머니 창을 열었다.

일찍부터 나와 볕을 쬐고 있는 화산의 제자들이 보였다.

"흐아아암."

늘어지게 하품을 한 조걸이 윤종을 보며 말한다.

"언제 온답니까?"

"오늘 온다고 하지 않았느냐."

"해는 이미 떴는데."

"어제 그 시간에 온다고 했으니 시간이 꽤 남았다. 할 짓 없으면 들어가 잠이라도 자 두거라."

"매일 새벽에 일어나 버릇했더니, 잠도 안 옵니다."

"……그것 참 슬픈 이야기구나."

마음은 어떨지 모르지만 몸은 충실하게 청명의 방식에 길들여진 조걸이었다. 서글픈 사실은 윤종 역시 똑같은 것을 느끼고 있다는 점이다.

"청명이는?"

"퍼 자고 있습니다. 술을 그렇게 마셨는데 일어나면 그게 더 이상하지요."

"……가서 깨워라. 곧 무당 놈들이 올 것이다."

"깨운다고 일어나겠습니까?"

"물이라도 퍼부어."

"……해 보겠습니다."

위립산이 가만히 창을 닫았다.

'아버지. 저는 이제 모르겠습니다.'

돌아가신 선친이 하늘에서 떨떠름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는 느낌이다.

그때 문이 열리며 염평과 위소행이 안으로 들어온다.

"아버지."

"……무슨 일이더냐?"

"저희는 어떻게 합니까?"

"음?"

"곧 무당의 제자들이 쳐들어올 것입니다. 저희도 같이 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위립산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는 아직 해야 할 바를 정하지 못했다. 사실 무당을 도발한 것은 화산이지, 화영문이 아니다. 최악의 상황에는 남영을 떠날 각오까지 한 이상, 그들이 전투에 참가하지 않고 발을 뺀다면 화영문은 큰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있다.

제 발로 남영을 떠나겠다 말한다면 무당도 화영문을 더 이상은 핍박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저들과 함께 맞서 싸운다면 피해를 각오해야 한다. 어쩌면 많은 문도가 피를 볼지도 모른다. 특히나 위립산과 위소행은 무사할 마음을 버려야 할 것이다.

'어찌할 것인가?'

깊은 고뇌가 위립산을 괴롭혔다.

결국 결정을 내리지 못한 위립산이 위소행을 보며 물었다.

"너는 우리가 어찌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큰 기대를 하고 던진 질문은 아니었다. 그저 혼란스러운 마음에 가볍게 물은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위소행의 대답은 그의 생각 이상으로 진중했다.

"당연히 싸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저들은 객이고 우리는 주인입니다. 주인이 객에게 싸움을 맡겨 두고 구경하는 일은 없습니다."

"……."

"그리고……."

위립산은 재촉하지 않고 위소행의 말을 기다렸다.

"제가 아버님을 존경하고 화영문을 아꼈던 이유는 아버님과 화영문에 긍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님은 망한 화산을 지원하는 것을 아깝게 여기지 않았고, 대가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화산의 속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속가라 해도 제자는 제자입니다. 그런데 저희가 어찌 사형제들이 싸우는 것을 구경만 할 수 있겠습니까?"

위립산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위소행의 눈을 마주 보기가 힘든 탓이다.

"저는 장문인을 뵈었습니다. 장문인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제자들을 보내 화영문을 도우라 했습니다. 저들의 방식이 올바르지 않았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저들의 마음마저 틀린 건 아닙니다. 저는 오늘 죽는다 해도 저들과 함께 싸우겠습니다."

'부끄럽구나.'

평소 그가 하던 말이다.

하지만 그는 위기가 닥쳐오자 시선을 돌린 반면, 위소행은 그가 가르쳐 왔던 것을 저 홀로 지켜 내고 있다.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염평."

"예, 문주님."

"제자들에게 전해라. 싸울 이들은 남고, 싸우지 않을 이들은 지금 집으로 돌아가라고."

"……문주님."

"화영문을 떠난 이들에게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이 지나고도 화영문이 살아남는다면 아무런 조건 없이 다시 받아 줄 것이다."

"그럼 아무도 남지 않을 겁니다."

"아니다."

위립산이 빙그레 웃었다.

"내가 남고, 소행이 남는다."

"……."

"그걸로 됐다. 우리는 화산의 이름을 짊어지고 싸울 것이다."

염평이 고개를 내저었다.

"두 분께서는 그러십시오."

"가겠느냐?"

"저는 화산이 아닌 화영문의 이름을 짊어지고 싸우겠습니다."

"……."

"날씨가 좋습니다, 문주님."

한참을 침묵하던 위립산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창 너머 먼 하늘을 바라보는 위립산의 눈에 단호한 결의가 어렸다.

"좋은 날씨야."

"끄으으응. 속이 안 좋은데."

"……작작 처마시지!"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놈!"

청명이 머리를 움켜잡았다.

"아, 소리 지르지 마. 머리 울리잖아."

"……이 와중에 술이 넘어가냐? 이제 곧 싸워야 하는데?"

"술 깨면 되지."

청명이 손가락을 폈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반투명한 아지랑이가 솔솔 피어올랐다.

주독(酒毒)을 빼내고 있는 것이다.

백천이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제까지와는 다른, 진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모두 들어라."

"예!"

"지금까지는 너희가 무엇을 해도 입을 떼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오늘의 싸움은 단순히 우리의 싸움이 아니다. 우리는 화산의 이름을 등에 짊어지고 싸운다는 것을 잊지 마라."

"명심하겠습니다."

조걸과 윤종, 그리고 유이설의 얼굴에 단호함이 깃들었다. 심지어 청명조차도 웃음기를 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장문인께서는 이 일이 화산이 대외적인 활동을 개시했음을 천하에 알리는 신호탄이 될 거라 하셨다."

백천의 시선이 청명에게 고정된다.

"청명아."

"알았어요. 알았어. 살살……."

"아니!"

"응?"

청명이 살짝 눈을 크게 뜨고 백천을 바라보았다.

"할 거면 확실하게 해라."

"오?"

백천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는 걸 보니 신기한 느낌이다.

"어차피 척을 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확실한 게 낫다."

"장문인이 하지 말라고 했다며."

"그 장문인이 등선하시기 전에 무당 대가리를 깨 버린다고 한 건 너 아니더냐?"

"오올?"

청명이 미묘하게 입가를 비틀었다.

'마음에 들어.'

과거의 백천은 공명정대함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 년에 걸쳐 천천히 물들인 결과, 이제는 장문인의 말을 무시……. 아니, 조금 더 좋게 해석하는 법도 익혀 냈다.

"크으. 문파 꼴 잘 돌아간다!"

"……."

청명이 입꼬리를 씩 말아 올린다.

"그런데 그 말의 의미는 알고 있어?"

"무슨 의미?"

"화산이 대외적인 활동을 시작한다는 말의 의미 말이야."

"……말 그대로 아니냐?"

청명이 피식 웃었다.

"대외적으로 움직인다는 건 외부에도 관심을 가지겠다는 뜻이지. 그런데 화산이 할 외부활동이 뭐가 있겠어?"

"……글쎄."

"화영문을 보고도 몰라?"

"속가를 말하는 거냐?"

청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속가문파를 늘려 나갈 거야. 그럼 지금과 똑같은 일이 입장이 바뀌어 벌어지겠지."

"음."

"수련만 하던 팔자 좋은 시절이 끝났다는 이야기야."

"팔자가 좋아?"

"그 수련이 팔자 좋은 거라고?"

"선 넘네?"

극심한 반발에 청명이 움찔했다.

그때였다.

위립산을 선두로 위소행과 염평, 그리고 열 명 정도 되는 화영문의 제자들이 비장한 얼굴로 다가왔다.

청명의 바로 앞에 당도한 위립산이 백천을 향해 포권을 한다.

"백천 도장. 내 정신이 없어 당연히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했소. 화영문의 어려움을 보고 한달음에 달려와 주신 귀하와 일행, 그리고 나아가 화산에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하는 바요."

위립산이 깊이 고개를 숙이자 백천이 바로 손을 뻗어 그의 몸을 세웠다.

"이러지 마십시오, 문주님.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오늘 결과가 어찌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화영문을 이끌고 도장들과 함께 싸우겠소."

위립산의 얼굴에는 망설임이 사라져 있었다. 그 좋은 표정을 보니 백천의 마음도 절로 편해진다.

'과연.'

화영문주가 대협의 자질이 있다고 하더니 사실인 모양이다. 입장 바꿔 생각해 보면 백천도 지금 이곳에 있는 이들의 꼴을 보았다면 이리 함께 싸우겠다고 선뜻 나서지는 못했을 테니까.

"감사합니다, 문주님."

"크으!"

청명이 박수를 쳤다.

"역시 의리가 있으신 분."

"……."

저 의리가 '돈'으로 들리는 건 백천만의 착각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런데 음……."

청명이 머리를 긁었다.

"수가 좀?"

"떠날 이들은 떠나라 했습니다."

"그런데도 이만큼이나 남은 거네요."

청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문파예요. 좋은 사람들이고."

뭔가 조금 아련하게 들리는 그 말투에 모두가 청명을 돌아보았다.

"아니, 뭐."

뭔가 말을 하려던 청명이 그저 웃어 버리고 만다.

'예전의 화산도 그랬는데.'

그저 청명의 생각일지 모르지만.

물론 지금의 화산도 그리될 것이다.

"그런데 딱히 나서실 일이 없을 것 같은데요?"

"……예?"

"음.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되나. 그냥 보시면 아실 거예요."

청명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그의 시선이 정문 쪽으로 고정된다.

"오는 모양인데."

"그걸 벌써 느끼는 거냐?"

"저 앞에서 오고 있어. 나름 느긋한데?"

"……괴물 같은 놈."

백천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아직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는데 청명에게는 손에 잡힐 듯 보이는 모양이다.

하기야 그가 이리 귀신같은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이던가?

"자, 온다!"

백천을 비롯한 윤종과 조걸, 그리고 유이설이 한 걸음 앞으로 나가 허리에 찬 검에 손을 올렸다. 이미 할 이야기는 다 했으니 무당 역시 문답무용으로 쳐들어올 것이다.

"긴장할 것 없다."

백천이 나직하게 말했다.

"너희가 한 수련을 잊지 마라. 우리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우리는 대화산파의 제자다."

"예! 사숙!"

"예, 사형."

제자들의 눈이 낮게 가라앉는다. 지금껏 보여 주었던 장난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차갑고 또 차가운 검수의 모습만이 남았다.

백천 역시 적의 기운을 감지했다.

"온다!"

모두의 시선이 화영문을 둘러싸고 있는 담으로 향했다. 그들의 눈에 검은 도포를 입은 무당의 제자들이 담을 높이 뛰어넘는 광경이 보인다.

수는 셋!

'일단 하나씩 맡…….'

그 순간이었다.

"으라차!"

뒤쪽에서 뭔가 광풍이 인다 싶더니 담을 넘어오던 무당의 제자들을 향해 희뿌연 뭔가가 날아간다.

쾅! 쾅! 쾅!

무당의 제자들이 뛰어 들어오던 속도보다 두 배는 더 빠른 속도로 밖으로 튕겨 나간다.

금방이라도 달려 나갈 듯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던 네 사람의 몸에서 기운이 쭉 빠져나간다.

"어?"

청명이 그 광경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일단 들어오게는 뒀어야 했나?"

"……."

너 혼자 다 해 처먹어라, 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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