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화산의 검은 강하다. (1)
- 산아야. 지금의 화산은 예전의 빛을 잃었지만, 과거의 화산은 그 어느 곳보다 찬란히 빛나는 문파였다. 네 아버지께서는 화산의 속가임을 평생 자랑스러워하셨지.
꼴꼴꼴꼴꼴.
그 화산의 무복을 입은 청명이 병나발을 불고 있다.
"크으으으으! 술맛 좋구나!"
- 화산은 명문이다. 명문이란 이름은 중심과 역사가 없으면 주어지지 않는다. 화산이 명문이라는 이름을 얻기까지 수도 없는 선인들의 피와 땀이 필요했다.
"거기 고기 좀! 주십쇼! 사형!"
"내가 먹고 죽을 것도 없다! 어디 제 걸 다 처먹고 남의 것을 탐하느냐! 손모가지 잘리기 싫으면 그 손 치워라!"
"거 야박하게!"
- 비록 지금은 화산이 고난을 겪고 있지만, 언젠가는 부활하여 다시 그 이름을 천하에 떨칠 것이다. 그러니 너는 지금의 화산만을 보고 그들을 멀리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화산을 지키거라. 그러면 언젠가 우리 화영문도 화산과 함께 비상할 날이 올 것이다.
"캬! 화산에서 내려오니까 살 것 같다!"
"그래도 사숙이 있는데 말조심 좀 해라, 이놈아!"
"괜찮아. 괜찮아. 지금 사숙도 속으로는 나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야."
"……아니. 나는 너랑 같이 있어서 죽을 것 같다."
"하하하핫! 농담은!"
"……나도 농담이었으면 좋겠다."
술과 고기를 탐하며 서로에게 악담을 퍼부어 대는 화산의 제자들을 보며 위립산이 흐뭇하게 웃었다.
'아버지께 이 꼴을 보여 드리고 싶구나.'
그리고 따져야지.
뭐? 명문? 부활?
에라이!
'화산은 망했습니다. 아버지.'
그것도 쫄딱이요.
예? 쫄딱!
위립산이 가만히 명치를 한 손으로 꾹꾹 눌렀다. 조금 전부터 위가 대못으로 찔리는 듯이 아프다. 이들이 하는 꼴을 보고 있으니 점차 더 아파 온다.
"크흐흠!"
참다못한 위립산이 거친 헛기침을 토해 내자 화산의 제자들이 일제히 위립산을 바라본다.
"아."
청명이 아차 하고는 위립산을 보며 술병을 내민다.
"한잔하실래요?"
"환자시잖아!"
"내상을 입으셨다지 않느냐!"
"생각을 좀 하고 살아라, 생각을!"
"아니, 이 양반들이!"
다시 분위기가 시끌벅적해진다. 그와 동시에 위립산의 위가 다시 쑤셔 오기 시작했다.
'명문은 얼어 죽을.'
그래도 십여 년 전, 어린 위소행의 손을 붙들고 화산을 방문했을 때는 몰락했을지언정 명문의 향취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십 년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지금 그의 눈에 보이는 화산의 제자들에게선 명문의 향취는커녕, 썩은 내만 난다.
좌절하는 위립산 대신 상황을 지켜보던 염평이 입을 열었다.
"이보시오."
"예."
"……지금이 어떤 상황인 줄은 알고 계시오?"
그 말에 백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죄송합니다. 워낙 자유분방한 녀석들인지라."
위립산이 한숨을 내쉬었다.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어쨌든 덕분에 하루의 시간을 번 것도 사실이니까요. 하지만 백천 도장. 이제는 우리도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결정이라 하시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정든 터전을 떠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린 이상 다른 방법이 없어 보입니다. 화영문은 남영을 포기하고 물러날 터이니, 여러분도 그만 화산으로 돌아가십시오."
"……문주님."
백천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저희가 미덥지 못한 것은 알겠습니다만……."
"그게 아닙니다. 상대가 무당이 아니었다면 저도 끝까지 버텨 보았을 겁니다. 하지만 저 무당을 상대로 버틴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들이 부절검을 보냈다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 이 남영을 차지하겠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음."
"설사 이번에는 어떻게 막아 낸다고 해도, 또 같은 일이 이어질 겁니다."
청명이 잔에 술을 따르더니 단숨에 들이켰다.
"크으."
그리고 위립산을 향해 말했다.
"안 그래도 그걸 좀 물어보려고 했는데요."
"예?"
"여기에 뭐 대단한 게 있나요? 쟤들 방식이 너무 과격한데."
청명이 기억하는 무당은 이런 식으로 일을 하는 곳이 아니다.
천하에서 가장 체면을 차리는 문파 중 하나가 무당이다.
'뒈질 때도 도호를 외던 놈들인데.'
물론 청명이 강호에서 활동하던 때에 비해서 시간이 많이 흐르긴 했지만, 문파의 기본적인 속성이라는 건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다.
그런 무당이 이리 과격한 수를 써서까지 남영을 자신들의 영향력에 넣으려 한다?
'뭐가 있긴 있는데.'
청명의 말에 위립산이 고개를 갸웃했다.
"대단한 거라고 하셨소?"
"예."
"딱히 그런 건 없소이다. 대단한 것이 있었다면 사람들이 남영을 내버려 뒀겠소이까?"
"음. 그도 그렇네요."
원하던 대답을 들은 건 아니지만, 청명은 실망하지 않았다. 위립산이 알 만한 정보였다면 웬만한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도 남을 것이다.
위립산이 모르는 정보라야 의미가 있다.
'뭐 정 안 되면 무당 놈들이 불게 만들면 되지.'
"그보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화산으로 돌아가시오. 뒷일은 내가 알아서 하겠소이다."
"네? 그건 안 되죠."
"……안 된다고?"
"네. 장문인께서 화영문에 일어난 문제를 잘 해결하라고 하셨거든요. 화영문이 남영에서 쫓겨나게 내버려 두면 장문인께서 한 석 달은 달 보시며 한숨 쉬실 걸요?"
"와, 그건 좀 끔찍하다."
"동감입니다, 사형."
윤종과 조걸이 상상도 하기 싫다는 듯 몸을 떨었다.
"이보시게들. 이건 장난이 아니외다."
"저희도 장난 아니에요."
참다못한 위립산이 막 역정을 내려는 찰나 청명이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목소리로 그의 입을 막았다.
"화영문이 베풀었던 일을 화산은 잊지 않았습니다."
위립산의 눈동자가 한차례 흔들렸다.
지금까지와 달리 진지해 보이는 청명에게서 더없이 진중한 기운이 흘러나온다. 위립산은 일순간 청명의 기세에 압도되고 말았다.
"이제는 화산이 화영문에게 보답을 할 차례입니다. 화산은 결코 속가를 저버리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그 사실을 똑똑히 알게 될 겁니다."
위립산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청명.'
화산신룡이라 불리는 이.
위립산은 어쩌면 자신이 이 청명이라는 자를 너무 쉽게 판단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나 그 전에."
"예?"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문주님."
위립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십시오. 내 가능한 것이면 무엇이든 들어드리리다."
"그럼."
청명이 손에 들고 있던 술병을 흔든다.
"혹시 화영문에 남는 술 있으면 한 병만."
"……."
"아니, 이왕이면 한 세 병쯤."
"……."
"없어요?"
"……."
아니, 역시 제대로 본 것 같다.
* * *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다. 진현 도장."
진현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하루만 더 지나면 이 지긋지긋한 일도 끝이군요. 성미에도 안 맞는 관주 역할을 한다고 저도 고생깨나 했습니다."
진현이 빙그레 웃었다.
"본산에서도 관주님의 노고는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이 일이 끝나면 본산에서 반드시 성의를 보일 것입니다."
"아이고.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제가 어디 그런 걸 바라겠습니까? 본산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진현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저 말이 진심이든 진심이 아니든 상관없다. 어차피 종도관주는 그리 중요한 이가 아니다. 그가 거절한다고 해도 무당은 그에게 상을 내릴 것이고, 그걸로 종도관주의 역할은 끝난다.
"아마 지금쯤 화산 놈들이 벌벌 떨고 있겠지요."
"글쎄요.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놈들이라."
"허세 아니겠습니까? 어디 감히 화산 따위가 무당과 대적하겠습니까? 내 장담하건대 내일 화영문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남아 있지 않을 겁니다. 진현 도장께서도 그걸 알고 하루의 말미를 주신 게 아닙니까?"
진현은 가타부타 말없이 빙그레 웃기만 했다.
슬쩍 그의 눈치를 본 종도관주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먼 길을 오느라 여독이 풀리지 않으셨을 텐데, 제가 괜히 시간을 뺏었나 봅니다."
"아닙니다."
"오늘은 편히 쉬십시오. 내일 아침에 다시 뵙겠습니다."
"좋은 밤 보내십시오."
종도관주가 밖으로 나가자 진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형."
그의 사제 진무(眞撫)가 넌지시 말을 건넨다.
"사형은 화산이 올 것을 예상하셨습니까?"
"나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장문인께서는 그럴 가능성을 보고 계셨던 모양이다. 장문인의 혜안은 감히 따라가기 어렵구나."
"앉아서 천리를 보시는 분 아닙니까."
"그렇지."
진현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형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종도관주님의 말대로 오늘 밤 화영문이 도주할 수도 있잖습니까?"
"화영문주는 그럴 수 있겠지."
진현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화산의 제자들은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어째서입니까?"
"허명을 얻었으니까."
"아……."
진현이 낮게 웃는다.
"본래 사람은 제게 주어질 만한 명성에는 그리 집착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이 얻어야 할 것 이상의 명성을 얻으면 그 명성에 집착하게 되지. 아마 그놈은 화산신룡이라는 허명을 버릴 수 없을 것이다. 먼저 도발을 해 놓고 달아난다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테니까."
"하지만 기다리고 있다가 패해도 허명을 잃는 건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진현의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
"내게 패하는 것이 그놈에게 수치라도 된다는 말이더냐?"
"그, 그런 말이 아닙니다. 사형."
진현이 웃으며 진무의 등을 두드린다.
"농담이니라. 그래도 남지 않겠느냐? 패하는 게 도망치는 것보다는 덜 수치스러운 일이니까."
"수치를 아는 놈들이라면 좋겠습니다. 보아하니 수치가 무엇인지 모르는 천둥벌거숭이들 같던데."
"허허허. 그도 그렇다."
진현이 미소를 지으며 뇌리에 청명의 얼굴을 떠올렸다.
'건방진 놈.'
이해는 간다.
어린 나이에 그만한 명성을 얻었으니 눈에 보이는 것이 없을 것이다. 한때 진현도 강호의 명성에 어깨가 으쓱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어깨에 힘을 빼 주는 것이 참된 어른의 역할이 아니겠는가?
"수치를 모른다면 알게 해 줘야지."
"물론입니다."
"다만."
진현이 표정을 굳히며 말한다.
"너무 그쪽에 과히 신경을 쓰는 것도 옳지 않은 일이다. 우리가 이곳에 온 진정한 목적을 잊지는 않았겠지?"
"물론입니다, 사형. 한시도 잊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제들조차 모르는 일.
이 일을 알고 진행하는 것은 오로지 진현과 진무뿐이다. 두 사람이 알고 있는 이유도 혹시 모를 만약에 사태를 대비한 것일 뿐, 본래대로라면 진무조차 몰랐어야 할 일이다.
"화영문이나 화산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중요한 것은 남영에서 시선을 몰아내는 것이다. 이번 일만 잘 풀린다면 우리는 소림을 넘어 천하제일문파로 발돋움할 수 있을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진현이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늘 높이 떠 있는 달이 그의 눈에 들어온다.
'검총(劍塚)이라.'
검의 무덤.
굳이 종도관이라는 가짜 문파를 만들어 가며 이곳에 온 이유가 거기에 있다.
"우선은 저 화산 놈들을 남영에서 몰아낸다. 그 뒤로는 천천히 계획을 진행할 것이다."
"예! 사형!"
진현의 입가에 낮은 미소가 맺혔다.
'곧 천하가 우리 무당의 발아래 놓일 것이다.'
음모가 깊어 가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