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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25화 (125/1,567)

125화. 화산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알려 주지! (5)

실력 행사를 해 보라.

그 말이 진현의 심기를 완전히 뒤틀어 놓았다.

그럴 수밖에.

지금 화영문의 정문을 지키고 있는 무당의 제자들은 아홉. 진현까지 포함하면 모두 열 명이다.

하지만 지금 화산제자들의 수는 다섯에 불과했다.

대표 하나씩을 뽑아서 비무를 하자고 했으면 이해했을 것이다. 저들 역시 속가를 지키러 온 것. 아무리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라고 해도 여기까지 온 이상 적어도 노력했다는 인상은 주고 돌아가야 하니까.

하지만 지금 저놈은 비무가 아니라 전투를 하자고 말하는 중이다. 무당의 모든 제자들이 한 번에 노리고 들어와도 얼마든지 상대를 해 주겠다고 말이다.

"이……."

머릿수만 두 배 차이가 난다.

그런데도 덤비라고 말하는 것은 무당을 완전히 무시하는 처사나 다름없다.

진현이 살면서 언제 이토록 무시를 받아 보았겠는가?

"무량수불."

도호를 외지 않으면 속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분노를 감당하기 힘들 정도다. 연신 도호를 외워 애써 마음을 가라앉힌 진현은, 그럼에도 채 다 지워지지 않은 노기를 띤 채 백천을 노려보았다.

"이게 화산의 뜻이라고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배분이 높은 백천이 말을 해 보라는 의미다. 하지만 그는 그런 진현의 기대가 무색하게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이미 나온 말을 주워 담으면 천하가 화산을 비웃겠지요."

"……."

"그리고."

백천이 피식 웃는다.

"제가 이제와 돌리자고 해도 도장께서는 허하지 않을 것 같아 보입니다만."

"제대로 보셨습니다."

진현이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에 대한 모욕은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저 청명이라는 놈은 그가 아닌 무당을 모욕했다.

"세 시진이라고 하셨지요."

진현이 무시무시한 눈으로 청명을 노려본다.

"하루. 정확하게 하루 드리겠습니다. 내일 이 시간에 우리는 그 쪽의 말대로 화영문을 칠 것입니다. 귀측이 먼저 제안한 이상, 강호의 법도에 따라 어떤 불상사가 일어나도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걸 알아 두십시오."

"뭐 내일까지 시간 끌어. 정 꼬우면 지금 한판 뜨든가."

청명이 손가락을 까딱거린다.

"와 봐."

"……."

꽉 움켜쥔 진현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린다. 호흡이 가빠지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윤종이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내젓는다.

'저러다가 싸우기도 전에 혈압 올라 죽겠네.'

화산의 제자들은 다 알고 있다. 모르는 사람은 청명의 무공만 두고 대단하다 하지만, 청명의 무공 따위는 사람을 열받게 만드는 재주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하다.

청명과 함께한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이러다가 열받아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열댓 번은 넘게 해 본 윤종이었다. 지금 이 순간만은 문파의 벽을 넘어 진현에게 안타까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냥 말을 섞지 마.'

말하면 할수록 빡친다고.

하지만 진현은 청명에게 달려드는 대신 절도 있는 동작으로 포권을 했다.

그 모습을 보며 화산의 제자들이 감탄을 내뱉는다.

'과연 무당이다.'

'세상에 저기서 참네. 저기서 참아.'

'수양이 제대로 되어 있네.'

박수라도 쳐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일. 내일 이 시간."

으드득!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를 갈아붙이는 소리가 섬뜩하게 들려왔다.

"내일 이 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 그때는 내 손속에서 자비를 바라지 마시오. 화산이 왜 화산인지, 무당이 왜 무당인지! 똑똑히 알게 될 테니까."

"네에. 네에. 알겠습니다."

"……."

청명이 김이 빠졌다는 듯 몸을 돌린다.

"거 자신 없어 도망간다는 말을 길게도 하네. 들어가서 잠이나 잘까."

윤종이 입을 벌렸다.

'저 악마 같은 놈.'

석 달 폐관을 하더니 어떻게 해야 사람 속을 제대로 잘 긁을 수 있는지 연구라도 하고 나왔나?

하지만 진현은 더 이상 그들이 기대하는 반응을 보여 주지 않았다. 사람이 화가 너무 나면 되레 침착해 진다고, 싸늘한 눈으로 청명을 한번 일별하고는 몸을 돌렸을 뿐이다.

"내일 뵙겠소."

그는 마지막 말과 함께 단호한 걸음으로 화영문을 나섰다.

"사형!"

상황을 지켜보던 무당의 제자들이 진현의 옆으로 우르르 몰려든다.

"왜 저 방자한 놈을 그냥 내버려 두시는 겁니까! 내일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 당장 버릇을 고쳐 놓아야지요!"

"맞습니다! 살다살다 저리 무례한 놈은 처음 보았습니다. 어디 한 군데를 부러뜨려 놔야 정신을 차릴 놈입니다. 아니,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릴 놈입니다!"

사제들의 성토에 진현이 걸음을 멈췄다.

"……지금?"

"예, 그렇습니다!"

진현이 깊게 숨을 내쉰다.

"내가 왜 내일 보자고 했는지 아느냐?"

"저희는 잘……."

"지금 일을 벌이면 내가 피를 볼 것 같아서다."

사제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들이 강호행을 나온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미 수차례 강호행을 했고, 그때마다 크고 작은 사건들을 겪었다. 그중에 상대를 상하게 한 일이 없었을 리가 있는가?

진현의 검은 이미 여러 번 피를 보았다.

그런 그가 피를 보는 걸 두려워할 리 없다. 지금 진현의 말은 이대로 싸움이 벌어지면 청명을 죽여 버릴 것 같다는 뜻이다.

진현이 살짝 고개를 돌려 화영문 쪽을 바라보았다.

"저들도 곧 실감하게 될 거다. 자신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하루면 다가올 일에 대한 공포를 즐기기에 충분한 시간이겠지."

"그렇습니다, 사형."

"돌아간다."

진현이 지체 없는 걸음으로 종도관으로 향했다. 그 뒤를 그의 사제들이 뒤따르고, 한참 뒤에야 얼이 빠진 종도관주가 허겁지겁 발을 떼었다.

"가, 같이 갑시다!"

"갔네."

"음. 갔습니다."

"가 버렸네요."

남겨진 화산의 제자들은 살짝 허탈한 얼굴로 휑해진 정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들과는 달리 위립산은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대, 대…… 대체 무슨 짓을……."

분명 도와달라고 불렀다.

하지만 설마 그 '도와달라'에 무당을 때려잡아 달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겠는가?

그래도 과거에는 명문이자 구파일방이었던 화산이니만큼, 무당과도 어느 정도 친교를 나누었다. 그 친교를 바탕으로 일이 틀어지지 않게 잘 중재해 달라는 의미였을 뿐인데…….

그런 그의 속도 모르고 청명이 빙그레 웃으며 말한다.

"이제 발 뻗고 주무셔도 됩니다."

발?

발을 뻗어?

"끄르륵."

털썩.

끝내 위립산이 거품을 물고 뒤로 넘어갔다.

"허억! 아버님!"

"문주님!"

위소행과 염평이 기겁을 하여 위립산에게 달려들었다.

청명이 그 광경을 가만히 보다가 혀를 찼다.

"여기서 뻗으라는 말은 아니었는데. 성격이 좀 급하시네."

화산의 제자들이 다들 한숨을 내쉬었다.

"허어어억!"

침상에서 벌떡 일어난 위립산이 부릅뜬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그렇게 멈춰 있던 위립산이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훔쳤다.

'꿈이었구나.'

그럼 그렇지.

현실에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질 리 없지.

안도의 한숨을 내쉰 위립산은 손을 뻗어 주전자를 잡고는 그째로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냉수를 시원하게 마시고 나자 마음이 좀 진정되는 느낌이다.

벌컥.

그때 문이 열리며 염평이 안으로 들어왔다.

"정신이 드셨습니까."

"……내가 얼마나 누워 있었지?"

"두 시진쯤 되었습니다."

"그렇게나……."

몸이 가면 갈수록 더 쇠하는 느낌이다. 하기야 안정을 취해야 회복이 될 텐데, 안정을 취할 수 없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일어나야지. 언제 무당이 찾아올지도 모르는데."

"무당이야 내일 온다고 했잖습니까?"

"……내일?"

"예."

"내가 누워 있는 사이에 그들이 찾아오기라도 했는가?"

염평이 미간을 좁히며 위립산을 바라본다.

"혹시 꿈이라도 꾸셨습니까?"

"그래. 참으로 이상한 꿈을 꿨지. 화산에서 사람이 왔는데, 웬 개망나니 같은 놈이 무당의 제자들에게 시비를 걸더니 화영문의 운명을 걸고 한판 뜨자고 하지 않느냐."

"……."

"내 황당해서는……. 꿈인데도 기절하는 줄 알았다니까. 화산에서 그런 미친놈이 나오는 게 말이나 되는가? 심지어 그놈이 화산신룡이라더군. 화산신룡. 허허허허. 내가 몸이 많이 안 좋기는……."

조금도 웃지 않는 염평의 얼굴을 본 위립산이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잠시 침묵이 오가고.

"……아니지?"

"맞습니다."

"아닌 것 같은데?"

"정확합니다."

위립산의 손이 달달 떨린다.

"그, 그게 현실이라고?"

"문주님, 침착하십시오. 이미 물은 엎질러졌습니다. 이리된 이상 야반도주라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야, 야반도주?"

"버티다가 죽는 것보다는 낫잖습니까? 부절검의 얼굴을 보니, 다시 왔을 때 눈에 띄는 이들은 싸그리 죽여 버릴 것 같은 기세던데."

"……그래도 도인이 아니냐?"

"문주님. 현실을 보십시오. 지금까지 구파일방이 죽인 사람을 모두 모으면 황하를 채우고도 남습니다. 그중에 정녕 악인만 있을 것 같습니까?"

위립산은 아무 말을 하지 못하고 입을 닫았다.

"목숨이라도 부지하려면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이제 하루……. 아니, 이제 하루도 남지 않았습니다."

위립산이 굳은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화산의 제자들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별채로 안내했습니다. 아마 지금쯤 요기를 하고 있을 겁니다."

"그렇구나……."

위립산이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 꿈 같던 이야기가 모두 사실이라면 이제는 정말 결정을 내려야 한다.

'나 혼자라면 아무 상관이 없다.'

하지만 그에게는 처자식이 있고, 지켜야 할 제자들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대로라면 저들 역시 화를 입겠지.'

경험이 일천하여 좋지 않은 방법을 택해 버렸다고는 하나, 화영문을 돕기 위해 온 이들이다. 저들이 무당의 검에 쓰러지는 꼴은 차마 볼 수 없다.

"평아."

"예, 문주님."

"아무래도 화영문의 현판을 내려야 할 것 같다."

"……."

"남영이 아니더라도 화영문의 이름만 지킬 수 있다면 그걸로 된 것 아니겠느냐."

"문주님……."

염평이 애끓는 얼굴을 했지만 위립산은 이제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 같았다.

'다 욕심이었지.'

살던 땅을 떠나기 싫은 마음. 무당의 속가에게 밀려나고 싶지 않은 마음. 그리고 화영문을 지켜 나가고 싶은 마음까지.

결국은 다 욕심이다.

내려놓고 나니 마음이 편해진다.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건 언제나 마음같이 되지는 않는다.

"그게…… 마음대로 잘 안 될 겁니다, 아버님."

"응?"

방 안으로 위소행이 걸어 들어온다.

"그게 무슨 말이냐? 마음대로 안 된다니?"

"저희가 이제 포기하려 해도 화산의 문하들은 이곳을 떠나지 않을 겁니다."

"왜?"

"……좀 이상하시겠지만, 저들은 무당에게 진다는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위립산의 얼굴이 멍해졌다.

'정말 천둥벌거숭이들이란 말인가?'

그럴 수는 없다.

다른 이들이면 몰라도 화정검 백천은 강호에서도 이름이 높은 이다. 게다가 백자 배의 대사형으로 언젠가 화산의 장문인이 될 사람이 아닌가.

그런 이가 사태를 냉정하게 파악하지 못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내가 화정검을 만나 봐야겠구나."

위소행의 얼굴이 미묘해진다.

"잘됐네요."

"뭐?"

"안 그래도 지금쯤 아버님이 깨어나셨을 거라고 모셔 오라고 합니다."

"……화정검이 말이더냐?"

"아니요."

위소행이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화산신룡이요."

그 빌어먹을 화산신룡.

"……신룡은 무슨. 토룡도 아깝다."

이번만은 아버지의 말에 완전히 공감하는 위소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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