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120화 (120/1,567)

120화. 언젠가는 천하에 매화가 피어나리라. (5)

키는 생각보다 컸다.

화산신룡의 나이가 무척 어리다고 알고 있는데, 키는 오히려 위소행보다 더 큰 느낌이다.

하지만 멀대처럼 느껴지는 않는다. 전체적으로 보면 탄탄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리고…….

'잘생겼네?'

꽤 준수하다.

균형 잡힌 몸과 외모가 조화를 이루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저 얼굴에 떠올라 있는 짜증나 뒈지겠다는 표정만 아니라면 말이다.

"콜록! 콜록! 에헤! 먼지가 왜 이렇게! 아오!"

그거 네가 했잖아.

왜 네가 하고 네가 짜증이야.

빛바랜 무복을 입은 청명이 손을 흔들어 먼지를 털어 낸다. 그러더니 뚱한 얼굴로 윤종을 바라보았다.

"오늘이야?"

"아니."

"응? 오늘 아냐?"

"한 삼 일은 남았을 거다."

"그런데 왜?"

"장문인께서 찾으신다."

"크으. 장문인께서 나를 가여이 여기셔서 폐관을 풀라고 하셨구나! 사형. 사형은 폐관 하지 마. 벽곡단만 석 달 내내 퍼먹었더니 배 속에서 싹이 올라오는 느낌이야."

"……그게 아니라 일이 생긴 것 같다."

"응? 무슨 일?"

청명이 고개를 갸웃하고는 위소행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이분은 누구신데?"

"화영문에서 오신 위소행 소협이시다."

"화영문?"

"알아?"

"……내가 알 리가 있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청명이 흥미롭다는 눈으로 위소행을 바라본다.

'화영문이라.'

예전 화산의 속가 중에 분명 화영문이 있었다.

'화산 속가는 다 망한 줄 알았더니, 아직까지 살아남은 곳이 있었구나.'

속가의 흥망은 본산에 달린 법.

화산이 몰락한 이상 화산의 속가들 역시 현판을 걸고 관원들을 모집하기가 쉽지 않았을 터인데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게 굉장히 신기한 일이다.

"화영문은 화산의 속가문파다."

"아, 그래? 그런데 속가 분이 여기는 왜?"

"그건 일단 장문인께 가서 듣자꾸나."

"그러지 뭐."

두 사람이 대화를 하는 와중에도 위소행은 동그랗게 뜬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을 그러다 윤종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멍하니 묻는다.

"저…… 설마 그럼 이분이?"

"청명입니다."

"아, 네. 하하하. 제가 그럴 줄 알았……. 네?"

이 새……. 아니 이분이요?

여기 계신 이분?

위소행의 눈가가 경련을 일으켰다.

윤종을 보았을 때 그는 분명 화산의 깊은 향취를 느꼈다. 그야말로 이것이 도사이며, 이것이 화산의 제자가 가진 깊이라고 전신으로 말하는 듯한 사람이 아닌가?

그에 반해 지금 이 사람은…….

'그냥 뒷골목에서 침 좀 뱉는 건달패 같은데.'

윤종만 없으면 뒷목을 잡혀 동굴로 끌려갈 것 같은 느낌이다. 전낭을 탈탈 털어 줘야 멀쩡히 나올 수 있겠지.

어린 시절 슬픈 기억을 자극당한 위소행이 미묘한 시선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소문이 뭔가 잘못됐나?'

아무리 봐도 이 사람이 그 종남의 제자들을 연파하고 진금룡을 쓰러뜨렸을 것 같지가 않다.

"일단 가서 좀 씻어라. 그 몰골로 장문인을 뵐 수는 없으니까."

"내 꼴이 어때서."

"제발 좀."

"알았어, 알았어. 그럼 금방 씻고 올게."

청명이 앞쪽으로 빠르게 걸어가자 위소행이 윤종을 향해 묻는다.

"……저분이 진짜 화산신룡이십니까?"

"화산신룡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청명을 말하는 거라면 저놈이 맞습니다."

"……진짜요?"

"소협."

"예?"

"……벌써 놀라지 마십시오. 아직 한참 남았습니다."

덜컥 두려운 마음이 밀려드는 통에 뭐가 더 남았는지 차마 물어볼 수 없는 위소행이었다.

* * *

"그러니까."

의관을 정제하고 장문인의 앞에 앉은 청명이 눈을 찌푸렸다.

"무당의 속가 놈들이 우리 속가를 공격한 것도 모자라서, 본산의 말코들을 불렀다?"

"……너도 도사다 이놈아."

말코가 왜 나오냐! 말코가!

하지만 청명의 귀에는 윤종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도움을 요청했다는 거군요."

청명이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에 순식간에 진중한 빛이 어린다.

"장문인!"

"음!"

"아무 걱정 마십시오. 이 제자가 가서 깨끗하게 정리하고 돌아오겠습니다."

모두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저놈이 세 달 동안 빛도 못보고 수련하더니 설마 철이 들었나. 어떻게 저리 믿음직스러운 말을?

하지만 모두가 속아도 윤종만은 속지 않았다.

"……뭘 어떻게 깨끗하게 정리할 건데?"

"뭘 어쩌긴 어째! 지금 당장 그 남양인지 어딘지로 달려가서 그 종…… 종, 뭐? 종남관?"

"종도관!"

"어, 그렇지! 그 종도관 놈들의 대가리를 깨 버리고, 무당 놈들 대가리도 깨 버리면 되는 거 아냐! 그리고는 남양에 다시는 발을 들이지 못하게 무관에 불을 질러 버리면 깨끗해지는 거지!"

"거기 도관이야 이 미친놈아!"

"도관은 안 타나? 도관은 안 타? 불 앞에서는 세상 모든 건물이 평등한 거야! 심지어 화산도 평등했지."

"거기서 화산이 왜 나와!"

"왜? 우리도 다 탔잖아? 몰라?"

현종이 더없이 흐뭇한 얼굴로 웃는다. 그리고는 옆에 앉아 있는 운검을 바라보았다.

'진짜 저놈을 보내도 되겠느냐?'

'생각을 좀 다시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나이를 먹어 가는데도 하루하루 나아지는 게 없는가?

이렇게 초지일관하게 맛이 가기도 쉽지 않은데.

윤종이 청명이 허리춤을 잡아 당겼다.

"진정 좀 해라. 제발."

"진정?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청명이 눈을 희번덕거린다.

"화영문이 그나마 상납금 꼬박꼬박 내던 곳이라며?"

상납금이라고 하지 말라고……. 흑도방파 같잖아. 지원금이라고 하든가…….

"원래 대가리는 자기 영역에서 상납금 내는 애들을 지켜 줘야 하는 법이라니까! 아니면 누가 돈 내고 따르겠어!"

"그렇지! 돈이 걸렸는데!"

현영이 속이 시원하다는 듯이 박수를 친다.

그러다 모두의 시선이 쏠리니 헛기침을 하며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청명은 다시 한번 강경하게 밀어붙였다.

"시비는 저놈들이 건 거잖습니까! 그럼 받아 줘야죠! 맡겨만 주십시오! 제가 가서 대가리를 깨 버리겠습니다!"

현종이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청명아."

"예. 장문인!"

"……대가리를 깨면 안 된다."

"그럼 허리?"

"불구로 만들거나 큰 부상을 입히면 안 된다는 뜻이다."

"……."

한숨을 푹 내쉰 현종이 '정말 이 새끼를 보내도 괜찮은 건가'라는 눈빛으로 청명을 바라본다.

하지만 방식이야 어떻게 됐든 이대제자까지 지원이 가능한 이상 청명을 배제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리고 사실 성격만 빼면 제일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청명이기도 하고.

"여하튼 사정이 그리되었으니 네가 가 주어야겠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깔끔하게 처리하고 돌아오겠습니다. 지금 출발할깝쇼?"

"몇몇 아이들이 같이 갈 것이다. 그러니 출발은 내일이나 모레쯤 하자꾸나."

"그렇게나 오래 걸립니까?"

"상황을 조금 더 알아봐야 하기도 하고, 내 걸리는 것이 몇 가지 있구나. 그러니 그리 알도록 해라."

"예."

오늘 출발하든 내일 출발하든 도착해서 무당 놈들만 팰 수 있으면 아무래도 상관없는 청명이었다.

"그래. 그럼 너도 폐관을 하느라 몸이 상했을 터이니 푹 쉬면서 몸을 회복하거라."

"알겠습니다. 장문인."

"그래. 가 보거라. 같이 갈 이들은 곧 정해서 알려 주마."

"예, 그럼."

청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던 참에, 현종이 다시금 넌지시 그를 불러 세웠다.

"청명아."

"네?"

청명이 고개를 돌리자 현종이 가만히 그 모습을 보다 입을 열었다.

"폐관의 성과는 있었느냐?"

청명이 씨익 웃는다.

"무당 놈들이 몸으로 알게 될 겁니다."

"그래. 알겠다."

청명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윤종이는 위소협의 처소를 마련해 주고, 시장하실 터이니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돕거라."

"예. 장문인. 불편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윤종과 위소행까지 밖으로 나가자 현종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현상."

"예, 장문사형."

"내가 노파심에 하는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별문제가 없었던 남양 땅에 무당의 속가문파가 들어오고, 화양문에 시비를 걸어온 것이 우연인 것 같으냐?"

현상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따지고 보자면 우연히 벌어질 수 있는 일이긴 하다. 하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공교롭다.

"청명을 보내기로 한 것이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구나. 어쩌면 그들이 노리는 것이……."

"그렇지 않습니다. 장문인."

운암이 고개를 저었다.

"속가를 쳐 청명을 불러낸다는 것은 너무 과한 생각입니다. 저들은 무당이 아닙니까? 굳이 화산에 시비를 걸 필요가 없는 이들입니다. 얻을 이득이 없잖습니까? 그 작은 남양 땅에 뭐 그리 대단한 이권이 걸려 있겠습니까?"

"음."

현종이 침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 침음 속에는 쉽사리 운암의 말에 동의할 수 없단 속내가 담겨 있다.

"지난 화종지회 이후로 청명의 명성이 과하게 높아졌다. 이제는 천하제일 후기지수를 논함에 있어 가장 앞에 꼽힌다는구나."

"그렇지요."

"화산신룡이라는 별호는 너무도 요란하고 과하지. 무당은 작은 이권에는 연연하지 않을지 모르나, 같은 도가 문파에서 더 큰 명성을 가져가는 걸 용납할 곳이 아니다. 어쩌면……."

그때였다.

"그럼 어떻습니까?"

"으응?"

운검이 빙그레 웃으며 말한다.

"장문인. 화산의 아이들이 청명에게 붙인 별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런 게 있더냐?"

"화산광견(華山狂犬)입니다."

어……. 그거 너무 좀…….

가만히 듣고만 있던 운암이 침음을 흘린다.

"광견은 너무 심하니, 맹견 정도로 하십시다."

그거도 개잖아.

아니, 왜 개에서 벗어나지를 못해?

미친개나 사나운 개나.

그때 운검이 미소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지난 이 년 간 우리 아이들은 정말 피나는 노력을 해 왔습니다. 이제는 무당이든 소림이든 절대 우리 아이들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그렇지."

"음. 맞는 말이다."

지난 이 년 간 이대제자와 삼대제자들이 얼마나 굴렀는지 모르는 사람은 이곳에 없다. 솔직히 청명보다 배분이 높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은 다 한 번쯤 해 봤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저 녀석은 음……."

대체 청명의 이 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운검이 겸연쩍게 머리를 긁었다.

"여하튼 그렇습니다. 어설프게 화산신룡에게 도전하려는 이들은 청명이 왜 그리 불리는지를 알게 될 겁니다."

"신룡?"

"아니요. 광견."

"……."

거, 음……. 이러면 안 되는데 엄청 공감이 간다.

"백천이와 윤종이를 딸려 보내시지요. 그 아이 둘이라면 저 녀석이 너무 막나간다 싶을 때 적당히 말릴 수 있을 겁니다."

"……정말?"

"개중에서는 그나마 가능성이 높겠지요."

"그럼 이설이도 보내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래도 사저라고 패지는 않던데."

그거 너무 당연한 일 아닌가?

"장문인."

소란스러워진 장내를 정리하며 현영이 입을 열었다.

"아이들을 보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아이들을 보낸다는 것은 이제 우리 화산도 다시 천하에 발을 들인다는 뜻입니다. 해야 할 일이 많을 것입니다.

"음!"

현종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라."

"예, 장문인."

"본산이 화산의 얼굴이라면 속가는 화산의 손발과도 같다. 화영문은 지금껏 본산에 큰 기여를 한 곳이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화영문을 지원하고, 천하에 화산이 속가를 버리지 않았음을 알리도록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장문인!"

일제히 고개를 숙이는 제자들을 보며, 현종의 얼굴에는 단호한 의지가 드리워졌다.

'이 년이면 짧지 않은 시간이다.'

이제 달라진 화산의 모습을 세상에 공표할 시간이 왔다.

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