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언젠가는 천하에 매화가 피어나리라. (4)
"청명?"
"예, 장문인."
"……이보게. 위소행이라고 하였는가?"
"예, 장문인."
"다짜고짜 본론만 말할 게 아니라, 일단은 사정을 설명해 보는 게 어떻겠는가?"
"아. 죄송합니다. 제가 경황이 없어서. 사실은……."
위소행이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화영문은 화산의 속가문파다.
대개로 큰 문파의 제자는 두 부류로 나뉘기 마련이다. 하나는 화산에 입문하여 평생을 화산에서 살아가는 진산제자다. 진산제자가 된 이들은 도명(道名)을 받고 화산에서 제자를 키우고 검을 닦으며 도를 추구하게 된다.
하지만 화산에서 배우긴 했으나, 화산이 아닌 세상으로 나가 살아가는 이들은 속가제자가 된다.
그리고 그런 속가제자가 세운 문파는 속가문파라 하여, 화산과는 별개의 문파이지만 화산의 영향력 아래 운영되기 마련이었다.
속가문파는 매해 적당한 금액을 본산으로 보내고, 본산은 그 대가로 속가문파들이 겪는 여러 가지 어려움들을 해결해 준다. 본산은 안정적으로 돈을 벌 수 있어 좋고, 속가문파는 본산의 이름을 내세워 수련생들을 끌어모을 수 있으니 좋다.
화산이 한창 전성기였던 시절에는 이런 속가문파들이 몇백을 넘었다고 전해지지만, 지금 천하에는 화산의 속가문파를 자처하는 곳이 열을 넘지 않는 실정이다.
그 남은 열마저도 제대로 본산과 교류를 하지 못하고 있다.
그 와중에 가장 꾸준하게 화산에 금전을 보내온 곳이 바로 화영문이다.
"그리 잘되는 무관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화영문은 나름 저희가 있는 곳에서는 인정을 받는 곳이었습니다."
"그렇지. 화영문주의 인품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문제는 건너편에 종도관(從道館)이라는 새로운 무관이 열리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종도관은 무당의 속가문파로 생기자마자 공격적으로 수련생들을 끌어모았습니다."
"음."
"하지만 저희 화영문이 워낙 해 놓은 것이 많아서인지, 저희 지역, 그러니까 남양(南陽)에서는 딱히 그들에게 호응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우리를 직접 노리기 시작하더군요."
"으음."
"지속적으로 이어진 그들의 도발에 참지 못한 아버님께서 종도관주와의 비무에 패하시고 큰 부상을 입으셨습니다."
"저, 저런!"
현영이 분기탱천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화영문주가 어떤 사람인데 부상을 입힌다는 말이더냐! 그놈을 잡아 당장 씹어 먹어 버……."
현상이 현영의 소매를 잡아당긴다.
자리에 강제로 앉게 된 현영이 그래도 노기가 풀리지 않는다는 얼굴로 이를 갈았다.
"거기에서 끝났다면 제가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겠지만, 종도관은 저희를 남양에서 아주 몰아낼 작정인지 무당 본산에 지원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곧 무당에서 진산제자들이 내려온다는 말을 들은 아버님께서 저를 이곳으로 보내셨습니다. 장문인을 만나 뵙고 도움을 청하라고요."
말을 끝낸 위소행이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렸다.
"장문인! 도와주십시오. 화산에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화영문은 이대로 현판을 내려야 합니다. 저들은 무도하기 짝이 없는 이들입니다."
"으으음."
모든 사정을 들은 현종이 깊은 침음을 흘렸다.
"그 종도관이라는 곳이 무당의 속가라고 했느냐?"
"예, 장문인."
"허어. 도를 구한다는 곳에서 어찌 그런……."
현종의 탄식에 현영이 코웃음을 쳤다.
"무슨 순진한 소리를 하고 계십니까. 무당이 어떤 곳입니까? 천하에서 가장 돈이 많은 도관입니다. 그 돈이 설마 다 향화객들의 주머니에서 나왔겠습니까? 제 속가를 늘리는 데는 천하에서 가장 독한 놈들이 무당 놈들입니다."
"으으음."
현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속가라…….'
확실히 이건 좌시할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의 속가가 무당에게 당한다는 건 둘째 문제다.
'이제 화산도 외부를 바라볼 시기가 되긴 했지.'
본산의 힘이 얼마나 강성한지를 볼 수 있는 지표가 바로 속가문파의 수다. 강성한 문파는 속가를 늘려 나가는 법이고, 쇠퇴하는 문파는 있던 속가도 사라진다.
화산이 과거의 명성을 되찾고 싶다면, 이제 화산 내부만 다스려서는 안 된다. 곧 이대제자 중에서도 하산하는 이들이 나올 터. 그들이 무관을 만든다면 당연히 지원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건 단순히 속가의 일이 아니다. 더 나아가서는 세상이 화산을 보는 시선을 결정짓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현종이 생각에 빠지자 여기저기서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도와야 하는 것 아닌가?"
"돕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속가의 일은 일대제자 이상은 나서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 아닙니까?"
"그래, 그렇지."
어린아이 싸움이 어른 싸움으로 번진다고, 과거부터 속가의 문제로 시작된 일이 본산끼리의 전쟁으로 번진 일이 종종 있었다. 그 후로 강호는 쓸데없는 출혈을 막기 위해, 속가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이들은 이대제자를 넘지 못하게 암묵적인 합의를 했다.
그 속에는 이미 완성되어 가는 이들 대신 어린 이들을 세상으로 내보내 경험을 쌓게 만들겠다는 의도도 들어 있다.
"보내야 한다면 이대제자들을 보내는 것이 맞습니다. 백자 배들을 보내심이 어떠신지요."
"으음."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저……."
대화를 듣고 있던 위소행이 쭈뼛거리며 입을 연다.
"삼대제자는 안 됩니까?"
"……."
"아버님께서 신신당부를 하셨습니다. 그 화산신룡 청명 도장을 꼭 모셔 와야 한다고……. 혹시 청명 도장께서는 지금……."
현종의 얼굴이 떨떠름해진다.
"그……. 음, 청명이를 데려가겠다고?"
"가능하다면 그러고 싶습니다."
"음. 그래. 음. 좋은 일이지. 어……. 그래."
입은 좋은 일을 논하고 있지만, 얼굴은 좋은 일을 논하는 얼굴이 아니다.
"그래. 일단은 알겠다. 우리끼리 논의할 일이 있으니, 잠시 나가 있게나."
"예, 장문인."
운공(雲空)이 위소행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자 현종이 심각하게 굳어진 얼굴로 물었다.
"어찌해야겠느냐?"
"고민할 일이 아닙니다!"
현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화영문입니다! 화산이 먹고 죽을 것도 없던 시절에 바리바리 곡식과 돈을 싸 보내던 화영문입니다. 아무리 속가라고는 하나 은혜는 은혜! 우리가 짐승 새끼도 아니고 은혜를 잊어서야 되겠습니까? 지금 당장 애들을 풀어서 그놈들을 물어야 합니다."
"……개 푸는 것도 아니고. 물긴 뭘 물어."
"개보다 더한 놈이 있잖습니까."
그게 문제지. 그게.
바로 그게 문제라고!
현상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장문사형. 이건 그리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상대가 무당이지 않습니까?"
"음."
"무당은 버거운 상대입니다. 아무리 속가의 일은 속가의 일이고, 본산에서는 젊은 놈들만 보내는 것으로 도리를 다한다고 하지만, 일이 어떻게 번질지는 모르는 겁니다."
"그 말도 맞다."
거꾸로 생각하면 속가의 일에서 벌어진 충돌이 크게 번지는 일이 잦았기에 그런 불문율이 생긴 것이다.
"화영문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달리 도울 방도가 있을 겁니다. 제자들을 보내 무당과 충돌하는 것은 피하고 싶습니다."
조금은 매정한 말이지만, 현상이 화영문이 싫어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천하의 어떤 문파도 무당과 충돌하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무당이 어디인가?
화산과 더불어 강호의 북두라 불리는 곳 아닌가?
현종의 시선이 운암에게로 향했다.
"어찌 생각하느냐?"
"장문인."
운암이 살짝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생각해야 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지금이 과연 화산이 외부 활동을 재개하기에 적기인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어떻든, 화산이 제자를 보내 무당과 대립한다면 천하는 화산이 다시 대외 활동을 시작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지."
"그리고 두 번째는 과연 우리 아이들이 무당의 제자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점입니다."
"그거야 뭐."
현상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운암의 말을 받았다. 그리고 말을 보탠다.
"세 번째도 있겠지."
"세 번째라 하시면?"
"그놈을 풀어놔도 되는가."
"……."
모두의 얼굴에 공감과 불안함이 동시에 어렸다.
"장문인. 사실 아까 그 아이의 말이 맞습니다. 보내야 한다면 청명이 놈을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그렇지."
"그런데 그놈을 강호에 풀어놔도 되겠습니까? 더군다나 무당을 상대하는데?"
"끄응."
현종이 답지 않게 머리를 벅벅 긁었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그의 머리가 흐트러진다.
이 년은 짧은 시간이 아니다.
이제는 이곳에 있는 이들 모두가 청명의 본성이 어떠한지 아주 잘 알고 있다. 그 청명을 강호로 내려 보낸다는 건 정말 굉장한 부담이었다.
"운검아."
"예. 장문인."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운검이 가볍게 웃는다.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보내시지요."
"……보내자고?"
"보내지 않을 이유가 없잖습니까. 언젠가는 청명이 놈도 강호로 나가야 합니다. 차일피일 미루는 건 답이 될 수 없습니다. 시간을 끌어 그 녀석이 도인이 될 수 있다면야 저도 반대하겠습니다만, 어차피 그건 바라지 못할 꿈 아닙니까?"
"……."
"그럼 보내야지요. 매도 일찍 맞는 게 낫습니다."
현종은 그만 웃어 버렸다.
"그렇구나."
우문현답이다.
잠시 눈을 감고 고민하던 그는 이내 눈을 뜨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윤종을 불러오너라."
밖에 나가 있던 위소행과 함께 들어온 윤종이 현종에게 예를 표하고 자리에 앉았다.
"부르셨습니까?"
"지금 청명이 무엇을 하고 있더냐?"
"얼마 전에 들어간 폐관에서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얼마를 기약하였던가?"
"아마 시기가 다 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으음. 그렇구나."
현종의 시선이 윤종과 위소행을 번갈아 훑었다.
"윤종아."
"예, 장문인."
"아무래도 청명이 녀석이 필요할 것 같으니 폐관 수련은 그쯤하고 나오라 이르거라."
"예."
"가는 길에 화영문에서 오신 손님께 화산을 안내해 드리거라. 아마도 청명이도 함께 먼 길을 가야 할 것 같으니, 적당히 소개도 할 겸."
윤종이 움찔 한다.
"……먼 길이라 하셨습니까?"
"그렇단다."
"그러니까 청명이가 먼 길을?"
"그렇다."
윤종의 눈에 순간 살짝 불손한 빛이 감돌았다.
그 눈빛을 말로 해석하자면
'제정신인가?'
쯤 되겠지만 아무리 장문인이라 해도 눈빛이 불손하다고 화를 낼 수는 없는 법이다.
"……알겠습니다."
말투만으로 해석을 달리 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윤종이었다.
"그럼 가시지요."
"아……. 아, 예!"
위소행이 윤종을 따라 나선다. 예를 표하고 방에서 나가는 윤종을 보며 현종은 낮은 침음을 흘렸다.
'이거 잘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그러나 이미 기호지세다.
위소행은 자신의 옆을 걷는 윤종을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나이는 나와 비슷한 것 같은데.'
아니면 두어 살 어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이가 같다고 실력마저 같을 수는 없는 법. 윤종에게서 느껴지는 기세는 마치 호수와도 같았다.
고요하게 잠겨 있는 호수.
새삼 화산이 도관이라는 것을 깨닫게 만들어 준다. 이래서 본산이고 이래서 진산제자다. 그보다 나이 어린 이가 이룬 경지에 절로 감탄을 하게 되는 위소행이었다.
"저……."
"말씀하십시오."
"청명 도장은 어떤 분이십니까?"
"……."
윤종의 눈가가 살짝 떨린다.
그런 윤종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위소행은 신나서 떠들어 댔다.
"화산신룡 청명도장의 이름은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낙룡지회……. 아니, 화종지회 이후로는 알려진 행적이 없어서 다들 청명 도장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 합니다. 혹자는 칼날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검수라고 하고, 혹자는 호방하기 짝이 없는 대협이라고도 하던데……."
"……대협이요?"
"예!"
"세상 사람들이 그리 말합니까?"
"예. 그렇습니다. 실제 청명 도장은 어떤 분이십니까?"
"……소협."
"예?"
"제가 입으로 말씀드리는 것보다는 실제 겪어 보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아……."
순간 앞서 나가는 윤종이
'대협은 얼어 뒈질 대협. 그놈이 대협이면 내가 공자다.'
라는 말을 중얼거린 것 같았지만…….
'잘못 들었겠지.'
설마 저 수양 깊어 보이는 도사가 그런 말을 했겠는가?
산문을 벗어나 한참 산을 탄 끝에 두 사람은 커다란 절벽에 도착했다. 그 절벽 곳곳에는 커다란 동혈이 뚫려 있었다.
"여기가?"
"매화동입니다. 인적을 벗어나 수련을 할 때나, 깨달음을 구할 때 드는 곳이지요."
"그럼 청명 도장께서는 새로운 깨달음을 위해서?"
"……뭐 그런 셈이기는 한데."
뭐라 말하려던 윤종은 결국 고개만 내저었다.
겪어 봐야 알지. 겪어 봐야.
"잠시 기다리십시오. 청명이 녀석을 불러오겠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윤종이 위소행을 두고 앞쪽으로 간다. 그러더니 뚫린 동혈이 아니라, 구석쯤에 커다란 바위로 막혀 있는 동혈 앞에 섰다.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윽고.
"……청명아."
모깃소리다.
"……청명아."
저 안에서 저걸 들을 수 있으면 그게 사람인가? 귀신이지.
대체 뭘 하는 건가 싶을 때, 윤종이 다시 한번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청명아?"
그리고는 재빨리 몸을 돌려 위소행에게로 뛰어왔다.
"아무래도 청명이 깊은 수련에 빠져 소리를 듣지 못하는 모양이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지요."
"네?"
뭔 개소리야.
그걸 어떻게 들어 이 사람아?
"아, 아니. 도장."
그때 윤종이 검지를 자신의 입에 가져다 댄다.
"이게 서로 좋은 겁니다. 그냥 모르는 척 내려가십시다. 내가 나 좋자고 이러는 게 아니라 소협을 위해……."
그 순간이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폭음이 터지더니 동혈을 막고 있던 바위가 폭발하며 사방으로 비산한다.
"……끄응."
위소행은 기겁을 했지만, 윤종은 올 것이 왔다는 듯 얼굴을 감쌌다.
먼지로 주변이 자욱하게 흐려진다.
위소행은 멍한 얼굴로 눈앞의 부연 풍경을 주시했다.
그리고 이내 먼지 구름 안에서 한 사람의 형체가 보이기 시작한다.
저벅.
저벅.
그 위압감 있는 발소리를 들으며, 위소행은 직감했다.
'저 사람이 화산신룡!'
단신으로 종남의 이대제자 열 명을 격파하고 종남의 진금룡을 쓰러뜨린, 천하에서 손꼽히는 후기지수. 이제는 어쩌면 화산의 이름보다 더 유명해진 사람.
검은 형체가 점점 더 사람의 형태를 갖춰 간다. 먼지 구름을 뒤로 하고 마치 신화 속에 나오는 영웅처럼 걸어 나온 청명이 낮고 무거운 눈으로 위소행을 바라본다.
압도당하는 느낌.
이게 바로 화산신…….
그 순간이었다.
"아오! 빌어먹을! 벽곡단만 처먹다가 물려 뒈질 뻔했네! 내가 이래서 폐관은 안 하려고 했는데! 못 해 먹겠네 진짜! 내가 다시 폐관을 하면 성을 간다! 성을 갈아!"
"……."
아.
저 사람이 아닌가 보다.
에이,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