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언젠가는 천하에 매화가 피어나리라. (3)
"끄으으으응."
턱!
마지막 언덕을 오른 위소행이 거친 숨을 토했다.
'뭔 산이 이렇게 험한지.'
예전에도 느꼈던 일이지만, 이 산은 사람의 접근을 쉬이 허하지 않는다. 가파른 건 둘째 치고,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발끝이나 겨우 붙일 만한 절벽을 수도 없이 올라야 한다는 점이 문제였다.
하지만 위소행은 생각보다는 수월하게 산을 오를 수 있었다.
과거와는 달리 산을 오르는 절벽마다 말뚝이 박혀 있고, 그 말뚝이 굵은 밧줄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줄을 잡고 오르면 맨 절벽을 오르는 것보다는 몇 배는 쉽게 산을 탈 수 있었다.
"허억! 그런데도 이렇게 힘들다니."
위소행이 이마에 흐른 땀을 소매로 훔쳐 냈다.
무당에는 해검지(解劍地)가 있어서 무당에 드는 이는 검을 풀고 말에서 내려야 한다. 하지만 화산에는 해검지 같은 건 필요하지 않다.
말이 여길 오를 수가 없으니까.
그래서 화산에 오르는 이들은 모두가 평등하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고관대작도 가마에서 내려야 하고, 말을 타고 온 이도 산 밑에 말을 묶어 두고 두 발로 화산을 올라야 한다. 그만큼 화산은 험하다.
"누가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잘 생각했네. 이러면 화산을 오르는 이들도 좀 더 편히 오고 갈 수 있겠지."
화산의 역사가 결코 짧지 않을진대 이제야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도 신기하지만 이제라도 했다는 것에 고개를 끄덕이는 위소행이었다.
땀을 ㅤㄸㅏㄲ고 호흡을 가다듬은 그의 눈에 마침내 거대한 화산의 산문이 들어왔다.
"……아니, 왜 익숙한 게 하나도 없지."
저 산문도 원래 저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과거 화산을 방문했을 때 본, 다 쓰러져 가는 산문이 워낙 인상 깊게 남아 있다 보니 지금 눈에 보이는 웅장한 산문이 더없이 어색하게 느껴진다.
용사비등(龍蛇飛騰)한 필체로 '대화산파'라 써진 현판이 한눈에 들어왔다. 현판을 보는 순간 뭔가 압도되는 기분이다.
'확실히 예전과는 다르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문파 하나가 변하는 데는 충분하고도 남는 시간이지 않은가?
가슴속에 차오르는 기대감을 안고 위소행은 화산의 산문을 향해 다가갔다.
커다란 산문이 무색하도록, 딱히 앞을 지키는 위사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문도 역시 굳게 닫혀 있었다.
위소행이 짧게 심호흡을 하고는 산문을 두드린다.
"계십니까!"
쿵! 쿵! 쿵!
문파를 찾아와서
'계십니까?'
를 외치는 게 과연 맞는가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다른 적당한 말을 찾기가 어려웠다.
"객이 화산을 방문하기를 청합니다. 계십니까?"
최대한 공손하게 소리친 위소행이 문을 두드리던 손을 멈추고 잠시 기다렸다. 들은 사람이 있다면 지금쯤…….
끼이이익.
아니나 다를까 문이 열리며 안에서 한 사람이 고개를 내밀었다.
위소행은 기쁘게 입을 열려 했다. 하지만 그 전에, 청천벽력 같은 말이 날아들었다.
"오늘은 방문을 받지 않는 날이오."
"……예?"
"오늘 화산은 방문객을 받지 않으니, 내일 다시 오시오."
"아. 저, 저는 그런 말을 듣지 못해서."
어쩐지 산을 오르는 이들이 없더라.
그 아저씨 진짜!
"그럼."
"자, 잠시만요!"
위소행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죄송하지만, 어떻게 방법이 없겠습니까? 저는 꼭 화산의 장문인을 뵈어야 합니다."
"오늘은 외인을 받지 않는 날이오. 급한 용무가 아니라면 내일……."
"외, 외인이 아닙니다."
"음?"
문을 열고 나온 사내, 백상이 위소행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었다.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외인이 아니라니.
"저는 화영문(華影門)에서 왔습니다. 화산의 속가입니다."
"화영문이라고 하셨습니까?"
백상의 말투가 달라졌다.
"예. 화영문의 일로 장문인을 꼭 만나 봬야 합니다. 시급을 다투는 일입니다. 귀문의 상황을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산을 오른 제게 잘못이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화영문의 사정을 보아 장문인께 말씀이라도 전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백상이 공손해진 어투로 말했다.
"죄송하지만, 제가 견문이 짧아 화영문이라는 곳을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그……."
"하나 제가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는 법. 지금 바로 들어가 화영문에 대해 여쭤 보고 장문인께 말씀을 전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백상이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간다. 그래도 최악은 피했다는 생각에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굉장한 기세였다.'
보아하니 나이도 위소행에 비해 그리 많지 않아 보이는데, 칼날 같은 절도가 배어 있었다. 방금 본 이의 손에 검이 들리면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해질 정도다.
'이게 화산인가?'
위소행이 초조한 마음으로 백상을 기다렸다.
'혹시라도 문전박대를 당하면 어떡하지?'
화산의 위상이 달라졌다는 게 실감이 나자 불안함도 덩달아 커진다. 이제 사해만방에 그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화산이라면 화영문 같은 곳은 상대해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속가라고는 하지만 제대로 교류를 하지 않은 지가 벌써 몇십 년…….
그때였다.
벌컥!
문이 조금 전과 다르게 격하게 열리더니 안에서 백상이 굳은 얼굴로 뛰쳐나온다.
"화영문이라고 하셨지요?"
"예? 아……. 아, 예! 화영문입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장문인께서 지금 바로 뵙겠다고 하십니다."
"예?"
"어서!"
"아, 예!"
갑자기 달라진 태도에, 위소행은 얼떨떨한 얼굴로 백상을 따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 * *
'너무 긴장되는데.'
위소행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맞은편에는 화산의 장문인인 현종이 인자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작은 문파의 제자에 불과한 위소행에게는 화산의 장문인인 현종을 이렇게 마주 본다는 것 자체가 부담이었다.
하지만 부담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그 현종의 좌우로 한눈에 보아도 근엄해 보이는 도인들이 정좌하고 있다.
'굳이 이렇게까지?'
사실 마지막 한 가닥 기대를 품고 화산까지 한달음에 달려오기는 했지만, 장문인을 대면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크게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장문인뿐 아니라 화산의 장로들과 일대제자들마저 보게 되니 쿵쾅대는 심장을 달래기가 쉽지 않다.
"그래."
현종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화영문에서 왔다고 했는가?"
"예, 예! 장문인! 화영문의 위소행이라고 합니다."
"음. 그렇구나. 내가 화산의 장문인인 현종이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현종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 긴장할 것 없네."
"……제가 조금 소심한 면이 있어서."
현종이 손을 뻗어 위소행의 앞에 놓인 차를 가리켰다.
"그럼 차를 조금 들어 보게. 마음을 안정시켜 줄 걸세."
"감사합니다."
위소행이 손을 뻗어 찻잔을 들었다. 차를 마시기는 마시는데 도대체 무슨 맛과 향이 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만큼 긴장했다는 뜻이리라.
"화영문. 화영문이라. 화산의 속가 중에 화영문이 있다는 건 내 알고 있네만, 아마 마지막으로 화산에 들른 것이 십삼 년 전쯤이던가?"
"기억하십니까?"
"물론이네. 그때의 작은 소년이 자네인 모양이로군."
"그렇습니다."
그때의 위소행은 지금과는 달리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속가의 신분으로 본산을 오른다는 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지 못하는 나이이기도 했고…….
'그때의 화산은 지금의 화산과는 달랐으니까.'
산문에서의 놀람은 놀람도 아니었다. 산문 안으로 들어온 위소행은 주변을 가득 채운 으리으리한 전각에 놀라 기절할 뻔했다.
분명 기억 속의 화산은 다 쓰러져 가는 전각들이 드문드문 들어차 있는 황량한 곳이었는데, 십 년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리 변해 버렸다는 말인가?
자리가 사람을 만들……. 아니 옷이 날개…….
'돈이 날개라고!'
화산의 자금력을 실감하게 되자 괜히 더 위축이 된다. 과연 그가 이런 부탁을 해도 되는지 말이다.
"그래. 무슨 일로 나를 보자고 했는가?"
"예. 장문인 그게……."
하지만 위소행이 입을 열 기회는 그리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벌컥!
다짜고짜 문이 열리더니 냉막한 인상의 노도인 하나가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온다.
"화영문? 화영문의 사람이 왔다고 하셨습니까, 장문인?"
"들어오면 인사부터……."
"자네가 화영문에서 온 사람인가?"
현영이 위소행을 매섭기 짝이 없는 눈으로 노려본다. 괜히 움찔한 위소행은 겁먹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가……."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현영이 그에게로 성큼 다가서선 팔을 휘둘렀다.
'얻어맞는 건가!'
위소행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현영은 환한 웃음을 지으며 위소행의 어깨를 두드렸다.
"화영문! 그래 화영문에서 왔군! 하하하하하! 헌앙한 것을 보니 과연 화영문의 제자로다!"
"……."
"무슨 일인가! 얼마든지 이야기를 해 보게! 혹시 어려움이 있어서 찾아왔는가? 내 어떻게든 해결해 줌세!"
"……."
위소행이 얼떨떨한 얼굴로 현영을 바라보았다.
뭐지? 이 갑작스러운 환대는?
보다 못한 현종이 현영을 만류한다.
"갑자기 그리 굴면 사람이 당황하지 않는가?"
"장문인! 화영문입니다! 모르시겠습니까?"
"으응?"
현영이 살짝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속가문파 중에 지난 삼십 년 동안 푼돈이라도 꾸준히 본산으로 보낸 문파는 화영문밖에 없습니다! 이제야 다들 어떻게 한 다리 걸쳐 보겠다고 선물을 싸 보내고, 돈 몇 푼 가지고 오는 거지. 우리가 거지꼴일 때 본산을 우대했던 곳이 화영문 외에 어디 있습니까?"
아니. 거 손님 앞에서 거지꼴이라니.
우리 체면도 좀…….
"그런데 화영문은 화산이 땅에 떨어진 것 주워 먹고 사는 동안에도 어떻게든 본산에 도움이 되라고 돈을 보내온 곳이란 말입니다! 예? 돈을!"
"거 알았다니까……."
"이런 문파가 없습니다. 화영문은 화산 속가 중에 제일입니다! 삼십 년을 넘게 돈을 보내면서도 뭐 하나 요구한 적이 없는 곳입니다. 그러니 어찌 어여쁘지 않겠습니까!"
표현은 과격하지만 충분히 이해가 가는 말이었다.
돈의 액수가 많고 적은 게 중요한 게 아니다. 화산이 빚에 허덕여 넘어갈 판일 때, 화영문이 보내온 그 금전이 현영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겠는가?
돈은 갚을 수 있지만 마음의 빚은 갚을 도리가 없는 법이다. 현영에게는 화영문에 대한 마음의 빚이 늘 크게 남아 있었다.
"그래. 무슨 일인가? 혹시 돈이 부족한가? 말만 하게! 내가 아주 싸게 빌려줌세."
"……현상."
"예, 장문인."
현상이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현영이 살짝 찔끔하여 입을 닫는다.
"아, 알았습니다. 닥치고 있으면 될 것 아닙니까?"
입이 튀어나온 현영이 자리를 찾아 앉는다. 그 광경을 보며 현종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 철이 들는지.'
정확하게는 급작스레 사라져 버린 철을 언제 되찾을지 걱정이다. 청명의 등장과 함께 날아가 버린 현영의 철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돌아올 줄을 몰랐다.
"긴장도 풀린 것 같으니 이야기를 해 보게나. 화산에는 무슨 일로 왔는가?"
"예, 장문인."
위소행이 살짝 심호흡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화영문에 화가 닥쳤습니다. 그리하여 제 아버님께서 저를 보내 화산에 도움을 청하라 하셨습니다."
"어떤 도움을 말하는 건가?"
"청명."
"……응?"
위소행의 눈에 힘이 들어간다.
"화산신룡(華山神龍) 청명 도장을 모셔 가고 싶습니다!"
청명이라는 이름이 나온 순간 장내의 모든 사람의 얼굴에 깊은 껄끄러움이 감돌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