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언젠가는 천하에 매화가 피어나리라. (2)
청명은 연화봉에 올라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는 딱히 무학을 숨길 필요도 없지만, 그동안의 수련이 버릇이 된 건지 연화봉에 올라야 마음이 편해졌다.
한참 동안 하늘을 바라보던 청명이 고개를 돌려 발 아래로 보이는 화산을 굽어보았다.
"흐음."
산 하나를 넘었다.
하지만 아직은 조금도 만족스럽지 않다.
"갈 길이 구만리네."
조급함은 화를 부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은근슬쩍 마음이 조급해진다.
지금 삼대제자들의 성취가 느린 건 아니다. 이대로만 가도 언젠가 그들은 천하의 누구도 감히 무시하지 못할 고수가 될 것이다.
하나 그것은 먼 훗날의 일.
지금 당장의 화산은 여전히 나약하고 볼품없는 문파에 지나지 않는다.
"이게 이끈다는 거로구나."
어깨에 무거운 짐이 올라와 있는 느낌이다. 이제는 어떤 일이 생길 때마다 제자들이 본능적으로 청명을 돌아본다. 과거에도 같은 일이 수없이 있었지만, 그때 사형제들이 보내던 눈빛과 지금의 사형제들이 보내는 눈빛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사형도 힘들었겠네요."
이끄는 자의 등을 밀어 주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누군가 밀어 준다고 해도 모두를 이끌어 가는 것은 더없이 어려운 일이었다.
과거의 청명은 자신이 화산을 이끌고 있다고 생각했다.
천하에 가장 많이 알려진 화산의 이름은 누가 뭐라 해도 매화검존이었고, 화산의 위세를 만들어 낸 것 역시 매화검존의 존재였다.
그럼 정말 청명이 화산을 이끌었는가?
'그럴 리가 없지.'
살짝 가슴이 아려 온다.
지금 그가 알고 있는 것들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어쩌면 화산의 운명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화산의 후예들뿐 아니라, 청명의 사형제들도 그리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자신이 가는 곳이 사지임을 알면서도 담담히 걸어가던 그들도 말이다.
"잡생각을."
청명은 이내 머리를 흔들었다.
이미 지나간 과거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과거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거름 삼아 현재를 살아가는 것. 그리고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내가 더 강해져야 한다."
과거처럼 모든 것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다.
청명은 알고 있다.
강호는 더없이 비정한 곳.
협의? 물론 존재한다. 의리? 그것도 물론 있겠지. 하지만 그 협의와 의리 역시 강자가 약자에게 베풀 수 있는 권한에 불과하다. 힘이 없는 자는 협의를 실천할 기회도 얻지 못하고, 감히 의리를 논할 자격도 없다.
화산의 제자들은 이미 그 비정함을 겪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화산이 몰락하는 과정에서 더없는 고통을 겪었다고 생각하겠지.
그렇지 않다.
곧 그들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이 험준한 화산의 보호를 받고, 화산이 해 온 일들에 보호받고 있었음을.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끝이다.
이제 곧 화산은 천하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강호의 비정함을 대면하게 될 것이다.
'품에 안고 싸고돌 생각은 없지만.'
그때 그들이 믿고 의지할 곳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게 청명이 되었든 화산이 되었든.
청명은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대로 가만히 눈을 감고 내부를 관조했다.
보인다.
그의 안에 자리한 단전이 이제는 작은 과실 정도의 크기로 자라나 있었다. 예전 그의 내공에 비한다면 여전히 조족지혈에 불과하다.
하지만 불어나고 있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그가 원했던 대로 차근차근 말이다.
화산의 무학은 정공(正功).
험난한 산을 그저 두 발로 오르고 올라야 정상에 도달할 수 있는 정직한 무학이다.
편법 따위는 없다. 그저 한 걸음 한 걸음을 쉬지 않고 걸을 뿐이다.
'나는 더 강해진다.'
과거의 매화검존이 아닌, 지금의 청명으로서.
강해지고 또 강해질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 천마마저 뛰어넘는다.
무의 완성을 위한 끝없이 이어지는 여정.
청명이 가만히 고개를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 네 매화는 피어났느냐?
청명의 입꼬리가 가만히 말려 올라간다.
"아직이죠."
하지만…….
"언젠가는 피어날 거예요."
언젠가 청명의 검 끝에서 그만의 매화가 피어날 때.
화산뿐 아니라 온 천하가 짙은 매화 향으로 뒤덮이리라.
청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걱정할 것 없어요. 장문사형."
청명이 씨익 웃는다.
"저 청명이거든요."
그건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과도 같았다.
청명이 천천히 산을 내려간다.
"음?"
산을 내려가는 청명이 어디선가 풍겨 온 매화 향을 맡으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봄이구나."
매화가 피어난다.
코끝을 스치는 매화 향에, 청명은 조금은 가벼워진 걸음으로 산을 내려갔다. 그리고 그런 청명의 뒷모습을 화산이 말없이 내려다본다.
청명을 품은 화산이 새로운 변화를 태동하는 와중에도 시간은 그저 무심하게 흘러갔다.
피고 지고, 다시 또 피고 지고.
매화가 두 번 피고 지도록.
세월은 그저 유수처럼 흐르고 또 흘러갔다.
* * *
섬서 화음현.
북적거리는 사람들 사이로 봇짐을 맨 한 사내가 화음의 입구에 들어섰다.
"……여기가 그 화음현인가?"
사내.
아니 아직은 사내라기보다는 소년에 가까워 보이는 얼굴이다. 그는 살짝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기가 맞을 텐데?"
눈에 보이는 모습이 아련한 기억 속의 모습과 너무 다르다.
과거 그가 본 화음은 작은 마을과 도시의 경계에 있는 곳이었다. 나름 번화하기는 했지만 어디에 내세울 정도는 아니고, 그렇다고 낙후되었다고 말할 수도 없는.
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 보이는 광경은 번화한 도시와 다를 게 없었다.
물론 그 규모에 있어서는 진짜 큰 도시들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대로의 좌우로 늘어서 있는 깨끗하게 새로 지어진 건물들이라든가, 빈 곳 없이 빽빽하게 들어찬 가게들을 보고 있으면 '현'이라는 말이 무색하다.
'내가 잘못 찾아왔나?'
사내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지나는 이에게 말을 건넸다.
"저기, 여기가 화음현이 맞습니까?"
"초행이요?"
"아니요. 초행은 아닙니다. 한 십여 년 전에 한 번 들렀었는데, 그때와는 너무 달라진 것 같아서."
대답을 해 주던 이가 고소를 머금는다.
"십여 년 만에 오는 이라면 그럴 만하지. 이 년 전에 화음에서 떠났다 돌아온 이들도 깜짝깜짝 놀란다오."
"아……. 그럼 여기가 화음현이 맞군요."
"그렇소이다. 너무 많이 변해서 이상하긴 하겠지만, 여기가 그쪽이 알고 있는 화음이 맞을 거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여기가 대체 왜 이렇게 변했죠?"
"왜긴 왜야? 화산 덕분이지."
"예?"
"화산 모르시오? 화산? 화산파!"
"아, 아니요. 압니다. 화산파야 당연히 알지요."
사내. 위소행(魏小行)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화음현의 사람들에게 화산을 모른다는 말을 하면 사람 취급을 못 받는다. 이곳의 사람들에게 화산은 단순히 옆에 위치한 문파가 아니었다.
자존심이자 자부심이고, 가족과도 같은 존재였다.
"안 그래도 그 화산파를 방문하기 위해서 온 참입니다."
"오? 그런가? 이거 손님이셨군. 자자. 궁금한 거 있으면 내게 다 물어보게. 내가 다 대답해 주지."
화산을 찾아왔다는 말을 듣자마자 장년인의 얼굴이 확 핀다.
"화산 때문에 화음이 발전했다는 말이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그야 뻔한 소리지. 자네도 요즘 화산의 기세가 욱일승천! 사해만방에 그 명성을 떨치고 있다는 것 알고 있지 않은가?"
아뇨. 제가 타지에 있어서 아는데, 그 정도는 아닌데요?
하지만 차마 그 말을 이 사내의 앞에서 할 수는 없었다. 화산을 조금이라도 무시하는 말을 했다가는 네 턱주가리를 날려 버리겠다는 눈빛이다.
"그, 그렇죠."
"그래서 근래에 화산을 찾아오는 이들도 많아졌네. 화산을 찾는 이들이 많아지니, 당연히 화음을 방문하는 이들도 많아졌고, 보다시피 사람이 북적이게 되지 않았는가?"
"그렇지요."
"사람이 모이는 곳은 돈이 모이기 마련이지. 그러다 보니 자연히 화음이 이리 바뀐 거라네."
"……굉장히 극적이네요."
"하하하하. 그게 다 화산파 덕이 아니겠는가? 자네도 알지 않나. 이 년 전 화종지회에서 화산이 저 썩을 종남 놈들의 콧대를 아주 뭉개 버린 걸 말일세."
"물론입니다."
그건 이제 천하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이야기였다.
몰락했다고 알려졌던……. 아니, 이제는 그 기억조차 희미해져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혔던 화산이 최근 기세가 사해를 떨친다던 종남을 완전히 박살 내 버린 사건이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타인의 불행을 즐기는 법. 하물며 잘나가던 문파가 개망신을 당한 사건이니, 씹고 뜯고 맛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가듯, 화종지회에서 벌어진 일들은 단숨에 천하로 퍼져나갔다. 이제는 동네에 노는 꼬마들도 알 정도로 회자된 뒤였다.
오죽하면 그때의 화종지회를 승천하던 용이 바닥으로 추락한 회합이다 하여 낙룡지회(落龍之會)라 부르는 이들까지 생겨났겠는가?
"종남이네. 다른 곳도 아닌 종남이지. 그런 종남을 혼쭐을 내 놨으니 화산의 명성이 얼마나 올랐겠는가? 그 이후로 화산을 찾는 이들이 얼마나 늘어났는지 모르네. 입문하겠다는 이들의 문의도 끝이 없다는구먼."
"그렇군요."
위소행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말을 위소행만큼 잘 이해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다름 아닌 위소행이 그 달라진 화산의 위상 때문에 이곳을 찾은 이였으니까.
만약 화종지회의 소문이 돌지 않았다면, 위소행은 이곳을 찾아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좀 아쉬운 게 말이네."
"예?"
장년인이 조금 언짢은 표정으로 화산을 바라보았다.
"그 이후로 이 년 간 별일이 없단 말이지. 슬슬 뭔가를 할 만도 한데 말이야."
"아……."
"하기야. 거파는 그리 쉽게 움직이지는 않는 법이지. 대붕은 천 년을 웅크리다가 한 번의 날갯짓으로 천리를 간다고 하지 않는가? 화산이 그럴 걸세. 아암, 그렇지 말고."
화산에 대한, 숨길 수 없는 자부심이 드러나는 말이었다.
위소행은 그 모습을 보며 참 많은 것이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그저 겉모습만이 바뀐 게 아니다.
과거 그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마을에서 생기를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이제는 화음의 사람들에게서 활력이 느껴진다.
"화산을 방문할 생각이라면 적당한 곳에 처소를 잡아 보게. 곧 해가 질 텐데, 지금 오르면 꼼짝없이 화산을 오르는 중에 밤을 맞게 될 테니까. 내일 아침에 오르는 게 좋을 걸세."
"예. 말씀 감사합니다."
"그럼."
장년인이 손을 흔들고 멀어지자 위소행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입을 살짝 벌렸다.
'이렇게까지 바뀌는구나.'
한 문파가 명성을 조금 얻었다는 것만으로 마을 하나가 상전벽해 되어 버렸다. 사람이든 문파든 왜 모두 이름값에 목숨을 거는 건지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위소행이 고개를 들어 화산을 바라보았다.
완전히 바뀐 화음을 보고 있으니 긴가민가하던 마음이 확실해진다. 화산은 그가 알던 과거의 화산과는 다르다.
그러니…….
'어떻게든 화산의 협조를 구해야 한다.'
위소행이 단호한 눈으로 화산을 바라보았다. 저 험준한 화산의 정상에 화산파가 있다.
- 화산이 반드시 우리를 도와줄 것이다. 화산에 가서 도움을 청하거라.
'아버지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입술을 꾹 다문 위소행은 이내 몸을 돌려 화음현 안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