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116화 (116/1,567)

116화. 언젠가는 천하에 매화가 피어나리라. (1)

다음 날 새벽.

"……사형."

"……."

"저분들이 왜 저러고 계십니까?"

"글쎄."

그걸 나한테 묻는다고 무슨 답이 나오겠냐?

화산의 삼대제자들은 새벽 달빛을 받으며 어슬렁어슬렁 기어 나오는 이대제자들을 보며 살짝 몸을 떨었다.

화산은 워낙 높은 산에 있다 보니 겨울이 지나도 새벽공기는 차갑기 그지없다. 입에서 새하얀 김을 줄기줄기 뿜으며 걸어 나오는 이대제자들의 모습은 전장으로 나가는 장수의 모습을 방불케 했다.

"오늘 저희 죽는 겁니까?"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이윽고 이대제자들이 모두 나와 삼대제자들의 건너편에 도열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백천이 느릿하게 걸어 나와 가장 앞에 선다.

"다 왔나?"

"예, 사형!"

"그래."

백천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대제자들을 바라본다. 그가 나직하게 한숨을 짓더니 먼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설마.'

'아니겠지.'

그때 백매관의 문이 벌컥 열리고 청명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나왔다.

"아우. 잠은 왜 항상 자도자도 부족한 걸까?"

그럼 좀 자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 어떻게 하루를 안 빼먹고 매일 나오냐? 매일!

터덜터덜 걸어나온 청명이 윤종에게 다가왔다. 그러자 윤종은 기다렸다는 듯 잽싸게 청명 옆에 바짝 붙었다.

"청명아. 저분들은 왜 나오신 거냐?"

"아, 사숙들."

"그래. 사숙들!"

"사형."

"응?"

청명이 손을 뻗어 윤종의 어깨를 감쌌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어."

뭐래? 갑자기.

"그동안 사형들이 사숙들에게 얼마나 치였는지 내가 아주 잘 알고 있지."

그런 적 없거든?

우리가 치였으면 너한테 치였지, 갑자기 사숙들은 왜 끌고 들어오냐!

"하지만 이제는 안심해도 돼. 오늘부터는 수련 시간만은 만민이 평등한, 아름다운 세상이 열릴 테니까."

"모두가 평등한 곳?"

"그렇지."

"혹시 거기를 지옥이라고 하는 거냐?"

"……어?"

그럴싸한데?

윤종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결국은 백자 배마저.'

이놈의 마수는 끝을 모르고 뻗는다. 삼대제자들을 지옥으로 몰아넣은 지 얼마나 됐다고, 이제는 이대제자마저 자신의 손아귀에 틀어쥔다는 말인가?

'화산이 어찌 되려고.'

윤종이 못내 치밀어 오르는 서글픔을 누르는 동안 청명이 중앙으로 가서 섰다.

"새벽부터 나오느라 고생했다, 제군들."

"……."

"다들 이렇게 '자발적'으로 훈련에 동참해 주다니 이 교관은 무척이나 감동했다."

'양심도 없는 새끼!'

'쉬는 사람한테 쌍욕 쳐 가며 훈련하라고 할 때는 언제고! 태상노군이 천벌을 내릴 놈!'

삼대제자들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지만, 의외로 이대제자들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수련은 힘들어야 수련이다. 하고 나서 개운하고 보람차면 수련이라고 할 수 없지. 수련이 끝나는 순간 욕이 나오고, 젓가락을 들 힘이 없어서 식판에 얼굴을 처박을 수 있어야 진짜 수련이라고 할 수 있다!"

가공할 논리가 설파되는 중이었다.

"강해지는 데는 왕도가 없다. 오로지 최선을 다해 구르고 구르는 것만이 강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본 교관을 믿고 따라온다면 여러분은 강해질 것이다. 알겠습니까?"

윤종이 얼굴을 확 일그러뜨렸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사숙들한테……. 사숙들 참지 마시고 따끔하게……!'

그 순간이었다.

"예에에에에에에엣!"

이대제자 쪽에서 우렁찬, 과도하게 우렁찬 대답이 터져 나왔다. 삼대제자들이 화들짝 놀라 주춤 물러섰다.

"뭐, 뭐야?"

"왜 저래?"

동생뻘도 안 되는 사질에게 가르침을 받는다는 건 어쩌면 껄끄러운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이대제자들에게는 그건 문제도 아니었다.

'삼대제자들한테 뒤처지면 개망신이다!'

청명에게 교육을 받는 건 수치스러운 일이지만, 삼대제자보다 약해진다는 건 아예 혀 깨물고 죽어야 할 일이다.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지금이야 어찌어찌 해 볼 수 있겠지만, 몇 년만 지나면 정말 이대제자는 삼대제자의 보호를 받는 처지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한두 사람도 아닌 삼대제자 전체보다 약해진다면 대체 어디서 위엄을 되찾아야 한단 말인가?

'절대로 그 꼴만은 볼 수 없어.'

'차라리 내가 혀를 깨물고 죽고 말지.'

이대제자들의 눈에 핏발이 섰다.

때로는 불순한 동기가 사람의 의욕을 불태우는 법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불순한 동기일수록 더 큰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강함에 대한 순수한 열망만으로는 이렇게까지는 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이대제자들의 등을 떠미는 것은 자존심과 불안함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방법은 모르겠지만, 우리도 저놈한테 배우면 종남의 이대제자를 이길 수 있다는 거겠지.'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강호에서 무시당하느니, 차라리 여기에서 무시당하고 강호에 나가서 떵떵거리는 게 백 배는 낫다!'

'구른다!'

이대제자들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받으며 청명이 크으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거지, 이거!"

저 배움을 갈구하는 눈빛!

금덩이를 떠다 입에 물려 줘도 자꾸 뱉어내려고 하는 삼대제자들만 상대하다가 배움에 대한 열정이 가득한 이대제자들을 보고 있으니 절로 마음이 뿌듯해지는 청명이었다.

물론 삼대제자들도 원래부터 반응이 저리 뚱하지는 않았었지만, 청명이 그런 것을 생각할 리가 없었다.

"자, 그럼."

청명이 입꼬리를 확 말아 올렸다.

"뭐든 기초가 중요하지. 근력 운동부터 시작해 볼까, 사형들? 뭐 해? 사숙들에게 근력 운동 하는 법을 알려 줘야지."

그 말에 삼대제자들의 입꼬리도 말려 올라갔다.

"그렇지. 그래야지."

"아암. 내가 최선을 다해 알려 드려야지."

삼대제자들도 '어디 니들도 한번 당해 봐라' 하는 심정으로 두 눈에 핏발을 세웠다.

'이게 좋은 건 줄 아셨지?'

'한번 해 보면 곡소리가 석 달 열흘은 갑니다. 제가 아주 제대로 곡하게 만들어 드립죠!'

삼대제자들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기구(?)를 들고 다가오자 이대제자들이 불안한 눈빛으로 흠칫 물러났다.

하지만 의외로 그 상황에서 앞으로 나오는 이가 있었다.

"응?"

청명은 자신의 앞에 선 사람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또 왜?"

"배우려고."

"저기 다른 애들한테 배워."

"나한테는 아무도 안 와."

"……어?"

청명이 유이설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왜 아무도……. 사형들 뭐 해?"

청자 배들은 청명의 말을 듣고도 그저 먼 밤하늘을 바라볼 뿐이었다.

"어색하면 그냥 여제자……. 잠깐만. 그러고 보니 왜 청자 배에는 여자가 없지? 왜 다 남자야? 백자 배에는 사저들이 저리 많은데."

"……."

청명이 윤종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니, 사형. 청자 배는 남자만 골라 받았어? 이러니까 백매관 들어가면 칙칙하고 분위기가 우울한 거 아냐. 왜 여제자를……."

"청명아."

"응?"

윤종이 피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세상에는 건드리지 말아야 할 부분이라는 게 있는 거다."

"……."

청명이 한참 윤종을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다.

"내가 잘못했다. 사과합니다. 용서해 줘."

"……주의해 줘."

"그럴게."

깔끔하게 사과를 마친 청명이 떨떠름한 시선으로 유이설을 바라본다.

"나는 여자라고 봐주는 것 없어."

"바라던 바야."

"울고 불어도 절대 안 봐준다."

"그럴 일 없어."

찰거머리도 이런 찰거머리가 없다.

"대신 하나 약속해 줘."

"뭘?"

"이걸 버텨 내면 나도 검으로 매화를 피울 수 있는 거지?"

"다들 이상한 소리를 하네."

청명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사숙들, 그리고 사형들이 화산의 제자라면 매화를 피우는 걸 목표로 삼아서는 안 돼. 그건 그저 과정일 뿐이야. 목표로 삼아야 하는 건 '완성'이다."

"완성……."

"뭐, 그렇지. 그럼……."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일단 개화를 위한 토대부터 만들어 보지. 시작해!"

이대제자들이 기구를 둘러메는 것을 본 청명이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예전에는 내 실력만 신경을 쓰고 사형들의 무공을 봐주지 못했지.'

그때는 그게 당연하다고 여겼지만, 이제는 아니다. 과거 십만대산에서 느끼지 않았던가? 결국 화산이 맞서야 할 상대는 단 한 명의 절대 강자가 아니라 다른 문파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언젠가 이들이 강해져 청명의 뒤를 받쳐 줄 수 있게 된다면?

"크흐흐흐. 다 뒈지는 거야. 강호일통이다. 내가 소림 그 빡빡이 들의 머리에 매화를 그려 주지."

뭔가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들었다고 생각한 화산의 제자들이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흐음."

운검은 먼 곳에서 수련에 열중하는 화산의 제자들을 바라보며 기분 좋은 침음을 흘렸다.

'이제는 백자 배까지인가.'

하긴,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도 본 것이 있고 느낀 것이 있을 테니까.

운검이 어제 있었던 장문인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 내버려 두거라.

장문인은 그리 말했다.

- 어차피 우리 품으로는 안을 수 없는 아이다. 아이를 이끌겠다고 간섭하는 것이 오히려 그 아이의 길을 방해할 수도 있다. 우리는 낡았다. 그리고 저무는 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아이들의 길이 빛날 수 있도록 거름이 되어 주는 일이다. 내버려 두거라. 그 아이의 안에 도(道)가 있으니 결코 나쁜 길로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괜히 궁금한 것이 있다고 이리저리 찔러보다가 아이가 경계하게 만들지 말라는 의미다.

운검도 그 사실에 동의했다.

청명이 피워 낸 매화라든가, 그 이해할 수 없는 실력, 그리고 불분명한 출신까지. 궁금한 것은 너무도 많았지만, 굳이 그걸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

'도(道)라.'

도는 그저 흘러가는 것.

그리고 품는 것이다.

청명이 어떤 아이든 그가 화산의 제자인 이상 품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도란 더없이 넉넉한 것이니까.

그보다…….

'나도 한번 배워 볼까?'

한참을 아이들을 바라보던 운검이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획 돌려 버렸다.

'욕심이지. 욕심이야.'

강해질 수만 있다면 사손의 지시에 따라 바닥을 구르는 게 무어가 대수겠냐마는 운검도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는 이제 나이가 있어 다른 방식으로 강해지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그나마 백자 배가 아직은 성장할 수 있는 나이인 걸 다행으로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지.'

아이들이 저리 노력하는데 스승 된 입장에서 어찌 게으름을 피우겠는가. 저 가르침은 청명에게 맡겨 두더라도 그가 알려 줄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가르쳐야 한다.

"화산은 강해지겠지."

종남이 끝이 아니다.

청명이 오고부터 화산은 완전히 달라졌다.

운검 역시 최근에야 자신이 그저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기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을 알아챘으니까.

이제는 일대제자는 물론이고 장로들도 분위기가 바뀌었다.

적어도 저 아이들에게 짐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 저 아이들의 도움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언젠가 저 아이들이 자신들의 무학을 완성하는 날이 온다면, 천하는 천하제일검문을 논했던 화산의 재림을 보게 될 것이다.

아직은 조금 먼 이야기지만 말이다.

운검이 고개를 슬쩍 돌렸다.

"허리를 펴지 말고 수련을 하란 말이야! 허리를! 아직 숨 쉴 힘이 남아 있으면 수련하는 데는 문제가 없어! 뭐? 괜찮아! 괜찮아! 안 죽어, 안 죽어! 내가 살면서 싸우다가 죽었다는 놈 이야기는 들어 봤어도 수련하다 죽었다는 놈은 본 적이 없어!"

운검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주화입마? 주우화아입마아아아? 아이고. 얼마나 고절한 무학을 익히셨기에 주화입마를 걱정하세요? 내가 그 무학 수준 한번 봐야 할 것 같은데? 나와! 주화입마로 죽는 게 빠른지, 대가리가 깨지는 게 빠른지 한번 보자!"

우르르 달려들어 청명을 말리는 삼대제자들을 보면서 운검이 겸연쩍은 얼굴로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그리 멀지 않은지도 모르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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