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네가 화산의 제자라면 그걸로 됐다. (5)
"와, 왔어?"
"고생 많았다. 좀 쉬……."
좋은 말. 좋은 말.
이 분위기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좋은 말.
삼대제자들은 필사적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청명은 남의 말 따위에 자신의 기분을 바꾸는 사람이 아니었다.
외려 그의 고개가 모로 꺾인다.
'저, 저거 왜 또 저러냐고!'
'좋은 일 있었으면 됐지! 또 왜!'
고개를 꺾은 청명이 입을 연다. 목소리마저 삐뚤어져 들리는 것 같다.
"괴앵장히 기분이 좋으신 모양이시죠? 사형드을?"
"……."
"와, 사람이 쉬네. 그렇게 비무를 해 놓고 쉬네. 나 같으면 당장 나가서 칼을 만 번 휘둘러 볼까, 아니면 접시에 물을 받고 코를 한번 박아 볼까 고민하고 있었을 것 같은데."
세상 모든 곳에 대처할 수 있어도, 망할 사제의 꼬장에는 대처할 수 없는 삼대제자들이었다.
모두가 필사적으로 윤종에게 눈짓을 한다. 그래도 네가 대사형이니 어떻게 좀 해 보라는 뜻이다.
'이럴 때만 대사형이지. 썩을 것들!'
평소에 좀 존중을 해 주든가! 평소에!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런들 저런들 그가 대제자인 건 사실인데.
"하하하."
윤종이 일단 어색한 웃음으로 포문을 열었다.
"왜 그렇게 화가 났느냐. 이번에는 우리도 나름 잘한 것 같은데."
비무에서 다 이겼는데 왜 구박이냐는 말의 완곡한 표현이었다. 하지만 저 빌어먹을 놈은 완곡하게 돌려 말하면 알아듣지를 못하는 모양이다.
"잘해? 사형들이?"
청명이 눈을 희번덕댄다.
그 눈을 본 삼대제자들의 얼굴이 암담해졌다.
"거 뭐 대단한 놈들 이겼다고, 옹기종기 모여서 축하연까지 열고 있어! 그 시간에 수련을 해야 할 거 아냐, 수련을! 비무 이기면 인생 끝나나?"
그거였구나.
그거였어.
청명이 얼굴 전체에 못마땅함을 씌우고는 말을 이었다.
"나 때는 말이야! 전쟁에 나가서 칼침 맞고도 그다음 날이면 벌떡 일어나서 수련부터 했는데, 요즘 것들은 에잉……."
네가 언제 전쟁에 나갔는데?
그리고 우리가 연상이거든?
"조, 종남의 삼대제자들을 이겼으면 나름 대단한 전공 아니냐. 축하 정도는 할 수 있지."
살짝 반항 아닌 반항을 해 보는 윤종이었다. 물론 언제나 그랬듯, 반항이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일은 없다. 특히나 저 청명을 상대로는 말이다.
"이겨? 아, 그래. 말 잘했어."
"……."
"딱 봐도 사형들보다 다섯 살은 어린애들이더구만! 그런 애들 이겼다고 지금 좋아서 날뛰고 있는 거야?"
"……."
"지금 봐도 어린애들이던데. 그럼 이 년 전에는 얼마나 어렸다는 거야? 그때는 완전 코찔찔이였을 텐데, 걔들한테 얻어맞았어? 걔들한테?"
"……."
거 아픈 데를 찌르나.
달아올랐던 백매관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우울해졌다.
"비무라도 잘했으면 내가 말을 안 해! 보법 밟다가 삐끗해서 넘어질 뻔 한 놈!"
제자들 중 하나가 움찔하고는 시선을 돌린다.
"머리 내려치려다가 어긋나서 어깨 친 놈."
움찔.
"이기고 있다고 이성 잃고 달려들었다가 잘못 맞고 질 뻔한 놈!"
"……."
금방이라도 버럭 소리를 지를 듯 말을 하던 청명이 갑자기 한숨을 푹 내쉬더니 천장을 바라본다.
"내가 잘못 가르쳤지, 내가……. 사형들이 무슨 죄가 있겠어. 다 내 죄지."
"……."
조걸이 윤종과 시선을 교환했다.
'저 새끼 왜 저래요?'
'낸들 알겠냐?'
'수습 좀 해 보세요.'
'하…….'
윤종이 죽을상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무, 물론 실수는 있을 수 있지.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잘되지 않았느냐? 실전에서 실수야 당연히 나오는 거고."
"실수우우?"
"……."
뭔가 말을 잘못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윤종이었다.
"전장에서 칼 맞고 쓰러지면서
'허허허허. 이거 실수했구만?'
하고 돌아가실 생각이세요?"
"……아니지."
"실전에서 실수하지 말라고 수련을 하는 건데! 실수가 당연해? 그런 정신 상태로 수련을 하니까 이런 사태가 벌어지는 거야! 그냥 검 한번 제대로 휘두르라는데 그걸 못해? 그걸?"
윤종은 더는 이놈을 말리는 걸 포기했다.
"그러면서 뭐? 언젠가는? 언젠가느으으은?"
청명이 빙그레 웃는다.
"그 언제가 올 것 같아?"
"……."
"하루하루 침식을 잊고 수련을 해도 될까 말까인데! 비무는 그렇게 조져 놓고 지금 놀고 있으면서 뭐? 언젠가느으으은?"
조걸이 빙그레 웃었다.
'어머니. 보고 싶습니다.'
제가 어머니께 잔소리 좀 그만하라고 한 것 집에 가면 꼭 사과드릴게요. 그건 잔소리도 아니었네요. 잔소리도.
'저 새끼는 입에 회초리가 붙었나?'
어찌 한마디 한마디가 다 아픈가.
청명이 살짝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일희일비하지 마."
"……."
"이제 겨우 한 번이야. 앞으로 수도 없이 부딪치고, 수도 없이 싸워야 해. 이게 사형들에게는 큰일일지 모르겠지만, 지나고 돌아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야."
삼대제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물어도 되냐?"
"얼마든지."
"우리가 정말 네 말대로 열심히 하면, 우리도 그런 검을 쓸 수 있는 거냐?"
청명이 얼굴을 확 일그러뜨렸다.
"사형들.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응?"
"쓰고 싶다가 아니라 써야 한다겠지."
"……."
청명이 두 눈을 희번덕거렸다.
"화산의 제자라는 것들이 검으로 꽃 한 송이 못 피워 내는 게 말이나 돼? 내가 그 꼴을 두고 볼 것 같아?"
이상하다.
분명히 같은 말인데 누가 하느냐에 따라서 이렇게 달라질 수가 있는가?
조금 전까지 어떻게든 청명이 보여 주었던 검을 자신들도 펼쳐 보이겠다는 의욕에 가득 찼던 삼대대제자들이 순식간에 의욕을 잃었다.
초롱초롱 빛나던 눈이 썩은 동태눈이 되어 간다.
"뭐 해?"
"응?"
청명이 턱짓을 한다.
"가야지. 오늘 수련 빼먹으려고?"
"……처, 청명아. 시간이 벌써……."
"펼치고 싶다며, 그 검?"
아니. 그렇기는 한데…….
아니, 청명아 우리가 그게 그리 급하지는 않거든? 아주 나중에도 괜찮은데.
"당장 안 튀어나가?"
"히이익!"
삼대제자들이 우르르 백매관 밖으로 달려 나갔다. 와글와글 차 있던 공간이 순식간에 텅 비었다.
청명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들뜨면 안 되지.'
이제 겨우 첫걸음을 내디뎠을 뿐이다. 이번 승부가 삼대제자들에게 자신감을 심어 준 것은 좋은 일이지만, 자칫하면 그 자신감이 오만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
승리에 대한 만족감이 지속적인 수련으로 이어질 수 있어야 진짜 발전을 논할 수 있는 법이다. 조금 과하게 몰아붙인 감이 있기는 하지만 뭐…….
"내가 나 좋자고 이러는 것도 아니니까!"
청명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밖으로 따라가려는 순간 한 사람이 백매관 안으로 들어왔다.
"어?"
예상 외의 얼굴에 청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웬일이세요?"
"……."
안으로 들어온 이의 눈가가 살짝 떨린다.
"사숙을 봤으면 일단 인사부터……. 아니다. 네게는 이런 말이 의미가 없겠구나."
백천이 청명을 똑바로 응시하며 입을 연다.
"잠깐 시간을 내줄 수 있겠느냐?"
* * *
낙안봉에 오른 백천이 슬그머니 청명을 돌아본다.
"아이고. 다리야."
청명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나무 그루터기를 찾아 앉았다. 모양세가 영락없는 노인이다.
'어린 녀석이.'
하는 짓을 보면 중늙은이가 따로 없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지적할 상황이 아니다.
"시간을 내 줘서 고맙다."
"별말씀을요. 그래도 사숙인데."
알긴 아니 다행이다.
"그런데 무슨 일로? 이 으쓱한 곳으로 불러내는 걸 보니 습격이라도?"
"……."
안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놈이지만, 때때로 이놈의 머리를 열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백천이었다. 대체 머릿속에 뭐가 들어 있으면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걸까?
"너와 진금룡의 비무는 봤다."
"그 몸으로 고생하셨네요."
"압도적이더군."
"별말씀을."
백천은 아무 말 없이 청명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난 뒤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네 사숙들도 모두 꽤 동요하고 있다. 처음에는 그저 좋기만 했던 모양이지만, 이제는 심사가 복잡한 모양이다."
그렇겠지.
눈이 있는 이상 청명의 무위는 부정할 수가 없다. 그리고 삼대제자들 역시 눈에 띄게 강해진 게 사실이다.
그들은 사숙으로서 삼대제자를 이끌어야 하는 이들이다. 그런데 까딱하다가는 삼대제자들이 그들보다 강해질지도 모르니 어찌 심란하지 않겠는가?
아니, 어쩌면 이미 삼대제자들은 그들보다 강해졌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씀이?"
"강해지고 싶다."
"……호오."
백천이 단호한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네가 알지는 모르겠지만, 사숙으로서 네게 이런 말을 하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충분히 이해해요."
새파란 어린애들에게 사숙이니 사숙조니 굽실거리고 다니는 청명이 아니면 누가 백천의 심정을 이해하겠는가?
'속 터지지, 그거.'
처음으로 백천에게 약간이나마 동질감을 느끼는 청명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게 최선인 것 같다. 내가 사숙조들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그분들께 배울 수 있는 것과 네게 배울 수 있는 건 다를 테니까."
청명이 심드렁한 얼굴로 백천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자존심이고 뭐고 다 내려놓으실 테니까, 본인을 포함한 이대제자들을 저보고 가르치라는 말씀?"
"말하자면 그렇다."
청명이 피식 웃는다.
"제가 왜 그래야 하죠?"
"……."
그 대답이 뜻밖이었는지 백천은 말을 잃고 멍하니 청명을 바라보았다.
"귀찮기만 하고 딱히 얻는 것도 없는데, 제가 굳이 그런 수고스러움을 감수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나는 너의 사숙이다. 우리는 동문이 아니더냐?"
"그래서 사숙은 없는 시간 쪼개서 삼대제자들의 수련이라도 봐주신 모양이죠?"
백천이 입을 닫았다. 이 말이 나와 버리면 할 말이 없다. 확실히 그는 삼대제자들의 수련에 딱히 신경을 써 본 적이 없다. 그건 운검의 역할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너는 이미 삼대제자들의 수련을 봐주고 있지 않느냐?"
"왜일까요?"
청명이 되물어 오자 백천이 뭔가 말을 하려다 입을 닫았다.
왜일까? 왜일까…….
그 이유는 너무도 간단하다. 삼대제자들은 청명의 수하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귀찮고 짜증 나지만, 잘 키워 놓으면 나중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살 수 있을 것이다.
백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머리를 숙이라는 이야기구나."
"에이. 태연한 얼굴로 사람 패륜아 만드시네요. 제가 설마 그런 말을 하겠어요?"
말을 안 해도 알아서 기라는 뜻이다.
백천은 이런 말은 또 찰떡같이 알아듣는 자신이 싫었다.
"……그, 그래도 화산의 법도가 있거늘."
"사숙."
"응?"
청명이 태연하게 말한다.
"삼대제자들 수련하는 것 보셨죠?"
"……봤지."
거의 사람을 솔방울 굴리듯이 굴리더만.
그러고도 살아 있다는 게 대단한 거지. 대단하고말고.
"제가 사숙들을 그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정확한 대답은
'너는 물론 그러고도 남을 놈이지만, 남의 눈을 봐서 참는 거겠지.'
에 가깝다. 하지만 백천은 화법을 아는 이였다.
"어렵겠지. 그래도 네가 나름 예의가 있는 놈이니까."
"그렇죠, 그렇죠."
그렇긴 개뿔이.
청명이 어깨를 으쓱한다.
"그래서 안 돼요. 사형들까지는 어떻게 해 볼 수 있는데, 사숙들은 제가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그랬다가는 사숙조들이 저를 가만두지 않을 걸요?"
백천이 가만히 청명을 바라보았다.
'할 수는 있다는 거로군.'
이런저런 문제가 있다는 말을 할 뿐, 불가능하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럼 그 모든 걸 해결하면 강하게 만들어 줄 수는 있다는 뜻이겠지?"
"눈으로 보지 않으셨나요?"
봤다.
그렇기에 이곳에 온 것이다.
백천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청명은 화산의 삼대제자를 가르쳐 종남의 삼대제자를 꺾었고, 제 손으로는 종남의 이대제자와 진금룡을 꺾었다.
화산의 이대제자들이 손도 대 보지 못한 그들을 말이다.
백천이 입술을 질끈 깨문다.
"그건 우리가 해결하마."
"어떻게요?"
"교육을 받는 동안 우리는 너의 사숙이 아니다. 가르침을 받는 이는 오로지 제자일 수밖에 없지. 스승으로 너를 존중하겠다."
"호오."
청명이 흥미롭다는 듯 백천을 보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거로는 안 되죠."
"……왜?"
"수련이 끝나고 욕하면 제가 방법이 없잖아요."
"……."
백천이 멍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 우리가 그렇게 저열하지는……."
"수련 하루만 받아 보면 말이 달라질걸요? 사형들도 처음에는 안 저랬어요."
백천이 할 말을 잃고 청명을 바라본다.
"그,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려면 확실하게 해야죠."
청명이 손가락을 튀겼다.
"배우고 싶으면 수련 시간이고 뭐고 할 것 없이 제대로 숙이세요. 그럼 저도 노력해 보죠. 하지만 그게 안 되면 아무것도 못 해 드려요. 저도 살아야죠."
"……."
백천이 깊은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그 고민은 결코 길지 않았다.
'내게 남은 자존심이 있던가?'
사질에게 고개를 숙이는 건 치욕적인 일이다. 하지만 무인이 약하다는 건 더 큰 치욕이다.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그 검을 펼쳐 보고 싶다.'
진금룡을 무너뜨렸던 그 검. 화산의 검이 그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좋다."
진금룡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지금 이 순간부터 너는 이대제자의 사질이 아니다. 호칭은 사질일지 몰라도 이대제자 중 누구도 너를 지위로 누르려는 시도는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내 이름을 걸고 보장한다."
'낚았다.'
청명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어렸다.
안 그래도 이것들을 어떻게 낚아 볼까 고민했는데, 제 발로 그물로 뛰어들어 주는 물고기라니. 어찌 이리 기특한가.
"진짜요?"
"그렇다!"
"확실하죠?"
"그렇다니까!"
"어. 그래. 그럼 내일 아침에 다들 모여서 나와."
"……."
"왜?"
"아, 아니. 아무것도."
뒤늦게, 자신이 뭔가 큰 실수를 한 것 같다고 생각하는 백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