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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14화 (114/1,567)

114화. 네가 화산의 제자라면 그걸로 됐다. (4)

청명은 산을 오르는 현종의 등을 바라보았다.

대충 청명에 대한 치하를 끝낸 현종은 청명을 따로 불러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러더니 가타부타 말없이 낙안봉을 오르는 중이었다.

그 뒤를 조용히 따르는 청명의 시선에 현종의 등이 들어온다.

이렇게 그의 등을 빤히 바라보는 것은 두 번째다. 일전에 화산 장문만이 들어갈 수 있는 비고의 앞에서 조용히 오열하던 뒷모습을 본 이후로 말이다.

몰락해 가는 화산을 홀로 이끌어 온 현종의 등. 남 앞에서는 보일 수 없는 그 서글픈 등은 청명의 기억 속에 똑똑히 남아 있다.

하지만 오늘 현종의 등은 과거의 모습보다는 조금 더 편안해 보였다.

이윽고 정상에 도달한 현종이 가만히 화산을 내려다본다.

청명도 현종을 따라 정상에 올라 주변을 돌아보았다. 화산의 험한 산세가 한눈에 들어온다.

"청명아."

"예. 장문인."

"이곳이 화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다."

"예."

"올라보니 느껴지는 것이 있느냐?"

조금은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청명은 생각나는 것을 솔직히 말했다.

"높네요."

"……."

현종이 슬쩍 고개를 돌려 청명을 바라본다. 하지만 청명은 당당하게 배를 쭉 내밀었다. 물어서 대답했는데 무슨 문제라도?

그런 그의 얼굴을 본 현종이 웃고 만다.

"그래, 그렇지. 네 말이 옳다."

현종의 얼굴이 조금 편안하게 풀린다.

"내 너를 이리 부른 것은 네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다."

'시작인가?'

청명의 얼굴에 비장한 빛이 어렸다.

뭣부터 물어 올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최대한 꼬이지 않게…….

"청명아."

"예, 장문인."

"네 검에 매화가 피었더구나."

청명이 재빨리 입술을 핥았다. 일단…….

"고맙다."

현종이 청명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인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현종의 행동에 청명이 움찔하여 뒤로 한 걸음 물러난다.

"왜 이러십니까, 장문인!"

"이건 화산의 장문으로서가 아니라. 인간 현종으로서 하는 감사란다. 나는 평생 그 광경을 꼭 한 번이라도 보고 싶었다."

"……."

"하지만 인간으로서의 나보다 화산 장문으로서의 위치가 더 중요하니, 묻지 않을 수가 없구나. 어떻게 칠매검으로 매화를 피워 낸 것이더냐?"

청명이 가만히 현종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저 자연스레 그리되었습니다."

"……자연스레?"

"예. 칠매검을 익히며 어느 순간 자연히 매화가 피어났습니다. 어찌하여 그리된 것인지는 저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렇구나."

"그저……."

"음?"

청명이 가만히 현종을 보며 입을 열었다.

"화산의 모든 검은 결국 그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현종은 아무 말 없이 발아래로 보이는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높디높은 화산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온다.

"우문이었구나."

청명이 칠매검으로 매화를 피워 낸 것에 뭔가 비결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청명의 대답은 그런 현종의 생각을 부정한다.

'그렇지. 그게 화산의 검이지.'

청명은 그저 자신이 다른 이들보다 더 앞서갔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말인즉, 다른 이들도 꾸준히 칠매검을 수련한다면 언젠가는 그 검 끝에 매화를 피워 낼 수 있다는 뜻이다.

'매화라.'

화산의 제자들이 모두 매화를 피워 낼 수 있는 날이 온다면, 화산의 시대가 다시 열릴 것이다.

"매화검수인가……."

이제는 감히 누구도 입에 올리지 못하는 그 말.

화산의 상징이 매화라면 화산의 무력을 상징하는 이름은 매화검수(梅花劍手)다.

지금은 화산의 누구도 감히 매화검수라 불릴 자격이 없지만, 청명의 말대로 언젠가 화산의 모두가 매화를 피워 내게 된다면, 언젠가는 그 이름을 이을 이들도 나올 것이다.

"아직은 하아아안참 멀었지만요."

"……."

거 분위기 좋았구만, 꼭!

떨떠름한 눈으로 청명을 돌아보자 청명이 배시시 웃고 있다. 그 웃음을 보니 어쩐지 마음이 편해진다.

덩달아 슬쩍 웃으며 현종이 말했다.

"청명아."

"예, 장문인."

"너에게 화산은 무엇이더냐?"

청명이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들었다.

푸르디푸른 하늘에 그의 사형제들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화산. 화산이라.

"제게 있어 화산은……."

장문사형이 말했었지.

"그저 화산입니다."

이제는 그 말뜻을 조금 알 것 같다.

청명의 답에 현종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네가 화산의 제자라면 그걸로 됐다."

그의 입가에 따뜻한 미소가 맺힌다.

"사람은 그저 그 자리에 있으려 하나, 세상은 사람을 그저 내버려 두지 않는 법이다. 세상의 이치가 그러하다. 너는 그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청명이 씨익 웃었다.

"감당할 수 없었으면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구나."

현종이 미소 띤 얼굴로 청명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네 생각이 그러하다면 화산이 너를 지킬 것이다. 네가 감당해야 할 모든 것들을 내가, 그리고 이 화산이 막아 주마."

청명이 미소를 지었다.

묻지 않는다.

현종은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청명에게 묻고 싶은 것이 수도 없이 많을 텐데도 그저 청명을 지키겠노라 말하고 있다.

'화산의 장문이라.'

현종은 청명보다 늦게 태어났고, 청명에 비한다면 강호에 명성을 떨치지 못했다. 배분으로 보나 강함으로 보나 감히 청명에게 비견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인정하게 된다.

장문인으로 살아 본 적 없던 청명에게는 없는 무언가가 저 사람에게는 있으니까. 스스로를 도기(道器)라 말할 수 없는 청명은 우직하게 자신의 길을 걷는 이들을 존중할 수밖에 없다.

"장문인. 지켜 주는 것이 아닙니다."

현종이 눈에 의문을 담는다.

"그저 함께 가는 것이죠. 화산이라는 이름 아래 말입니다."

살짝 굳어졌던 현종의 얼굴에 웃음이 어린다.

"네 말이 옳구나."

현종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청명아."

"예, 장문인."

"내게 하나만 약속하거라."

청명이 고개를 들어 현종을 바라본다. 현종의 눈빛과 얼굴은 더없이 부드러웠다.

"언젠가는 네게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구나."

청명은 입을 살짝 열었다가 꾹 닫았다.

이상하게 가슴속에서 뭔가 치밀어 오르는 느낌이다.

스스로도 알 수 없는 감정을 꾹꾹 내리누른 청명은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될 겁니다."

언젠가는.

그래, 언젠가는.

* * *

흥분이란 그리 쉽게 가시는 것이 아니다.

특히나 이제껏 겪어 보지 못한 어마어마한 일을 겪었다면 그 흥분은 며칠은 물론이고 몇 달 동안 사람을 지배하기도 한다.

화산의 삼대제자들이 지금 딱 그런 상태였다.

화종지회가 끝났지만, 삼대제자들은 아직 화종지회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 진짜 이긴 거지?"

"……눈으로 보고도 못 믿냐?"

"꿈만 같아서 그런다. 우리가 진짜 종남을 이기다니."

스스로의 실력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종남을 해볼 만한 상대로 여겼다면 받아들이기가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삼대제자들 대부분은 비무장에 나서는 그 순간까지 자신의 실력을 온전히 믿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의 실력은 스스로 키워 낸 것이 아니라, 청명이 강제로 주입한 것에 가까우니까.

게다가 청명은 불친절하기로는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인간이라 이 수련이 어떤 효과가 있는지, 수련을 끝내면 어떤 수준이 되는지 전혀 설명해 주지 않았다.

그러니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그놈은 진짜 뭐 하는 놈인지 모르겠어."

"누구?"

"누구긴 누구야. 청명이밖에 더 있냐?"

모인 이들 모두가 멍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건의 여파가 그들을 휩쓸고 진정이 되기 시작하자, 청명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짓을 했는지 실감이 간다.

청명이 대단한 놈이라는 걸 모르는 삼대제자가 있겠냐마는, 이번에 청명이 저지른 일은 이제까지 그들이 내렸던 그에 대한 평가를 다 뒤집어엎어 버릴 만큼 어마어마했다.

그때 이상하리만치 넋을 놓고 있던 조걸이 윤종에게 말을 붙였다.

"사형."

"응?"

"잠을 잘 못 자겠습니다."

"……이제는 내게 불면증 상담까지 하려는 거냐?"

"그게 아니라……."

조걸은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눈만 감으면 자꾸 청명이 보여 준 검이 아른거립니다. 자꾸 홀리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뭐라고 설명은 못 하겠는데. 여하튼 그렇습니다."

윤종이 침음을 흘렸다.

'이 녀석도 그런 건가?'

윤종 역시 마찬가지였다.

눈만 감으면 자꾸 청명이 만들어 낸 매화가 어른거린다. 아니, 심지어 눈을 뜨고 있어도 자꾸만 그 광경을 생각하게 된다.

처음에는 그저 좋기만 했다.

대부분은 청명이 해낸 일이지만, 여하튼 나머지 삼대제자들도 종남을 꺾는 데 일조를 했으니까. 생각하면 할수록 벅찬 가슴을 진정시키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흥분은 가라앉았고 그들이 무엇을 보았는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 검은…….'

환상.

그 말이 아니고서야 설명할 수 있을까?

이쯤 되니 종남과의 승부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든다.

그 검.

그 환상적인 검을 이 손으로 펼쳐 낼 수만 있다면…….

"사형."

윤종이 조걸을 돌아본다.

"우리도 언젠가는 그런 검을 펼칠 수 있을까요?"

윤종이 생각에 잠겼다.

'언젠가는…….'

"걸아."

"예, 사형."

"어쩌면 이건 화산 삼대제자의 대제자로서는 해서는 안 될 말인지도 모르겠지만……."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윤종에게 집중되었다.

"솔직하게 말해 나는 그저 강해지고 싶었을 뿐이다."

"……."

윤종은 담백하게 말을 이어 갔다.

"어떤 경지에 오른다든가, 어떤 검을 펼쳐 보이고 싶다는 생각 같은 건 해 본 적이 없다. 그저 막연히 강해지고 싶었지."

"그건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조걸이 고백하듯 말한다.

하긴 대부분이 그랬으리라. 윤종은 조금 더 마음이 편안해졌다.

"하지만 이번에 그놈이 펼치는 검을 보고……."

뭐라 말해야 할까.

윤종이 말을 고르기 위해 잠깐 입을 다물었다.

평소 말주변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지금 느끼고 있는 기분을 말로 표현하는 게 너무도 어렵게 느껴졌다.

잠시간의 고민 끝에 윤종은 솔직하게 말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고. 그 검을 내 손으로 펼치고 싶다고."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이 말이 지금 삼대제자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말일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화산의 검.

그들이 영혼에 새기고 평생을 이루려 노력해야 할 지향점이다.

입문한 지 몇 해가 지난 이제야 겨우 화산의 검을 본 것이다.

"우리도 언젠가는 그 검을 펼칠 수 있을까요?"

모두의 시선을 받은 윤종은 쏟아지는 시선을 묵묵히 감내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럴 수 있다고 믿는다."

그의 눈에 단호한 의지가 어렸다.

"우리는 화산의 제자다. 화산의 제자가 화산의 검을 펼치지 못할 리가 없지. 우리가 끊임없이 노력한다면 언젠가는 당연히 우리도 그 검을 펼쳐 낼 수 있을 것이다."

"사형!"

"그럼 수련을 열심히 하면 되겠군요."

"저도 언젠가는 반드시 그 경지에 오르고 말겠습니다. 목표가 생겼습니다."

"그래. 나 역시 노력할 것이다. 너희들과 함께 말이다."

화산의 삼대제자들이 긴 시간 만에 서로를 믿고 하나로 뭉치기 시작했다.

"설사 우리에게 부족한 면이 있더라도 청명이가 해결해 주지 않겠습니까?"

"도깨비 같은 놈이니까."

"대신에 확실하게 강하게는 만들어 주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그와 동시에 청명에 대한 신뢰감이 무럭무럭 솟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였다.

쾅!

문이 과격하게 열린다.

'문은 차는 게 아니라 여는 거라고 한 오십 번은 말한 것 같은데.'

하기야 저 귀에 말을 한다고 들리겠는가? 차라리 벽에 도경을 외지.

안으로 들어온 너무도 익숙한 얼굴이 천천히 백매관 안의 제자들을 훑기 시작한다. 평온했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저, 저거 또 시작이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실룩대던 청명의 입술이 과격하게 열린다.

"어디 그 따위로 비무 해 놓고 훈훈하게 덕담 주고받고 있어! 어?"

……귀신은 뭐 하나?

저 인간 안 잡아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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