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네가 화산의 제자라면 그걸로 됐다. (3)
시작은 거창했지만, 마무리는 꽤 맥이 빠졌다.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로 화산 역시 자신들의 승리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딱히 승리를 축하할 만한 행사를 준비하지 않았다. 그러니 자축을 하려고 해도 뭔가 애매해져 버렸다.
둘째로 사마승이 그리 돌아가 버렸으니, 종남의 제자들도 어정쩡하게 화산을 빠져나갈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장문인!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없겠습니까?"
"거 밀지 마시오! 내가 먼저 서지 않았소이까!"
"장문인! 잠시면 됩니다! 장문인!"
사마승이 돌아가자마자 비무를 지켜보았던 섬서의 유지들이 현종에게 달려든 것이다. 그들도 눈이 있으니 본 것이 있고, 그런 만큼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
'반드시 거래를 터야 한다!'
'이건 무조건 남는 장사다!'
'은하상단만 재미 보게 놔둘 수는 없지!'
이 승부로 화산이 종남을 압도하게 되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화산이 가공할 속도로 강해지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세상의 이치가 그러하듯 힘이 있는 곳에는 돈이 꼬이기 마련. 비무를 지켜본 섬서의 유지들은 화산에 모이는 돈이 자신의 돈이기를 바랐다.
"거 알 만한 분들이 왜 이러시오!"
현영이 크게 호통을 치자 섬서의 유지들이 움찔하여 현영의 눈치를 보았다.
'좀 과했나?'
'그렇지. 아무래도 한 문파의 장문인인데, 조금 더 예의를 갖춰서…….'
'이리 한 번에 다들 몰려왔으니 당황스러울 만도 하지.'
하지만 이내 이어진 말은 그들의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현영이 더없이 기꺼운 얼굴로 말한다.
"그런 문제는 재경각주인 저와 이야기를 하셔야지요. 다과를 준비했으니 이쪽으로 오십시오. 오늘 시간을 충분히 준비할 테니 그리 서두르지 않으셔도 됩니다."
"……."
"아, 혹시 몰라 숙소도 마련을 해 두었습니다. 묵고 가실 분이 있으면 언제든 말씀을 해 주시면 됩니다. 그럼, 모두 이쪽으로."
"……."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재경각으로 향하는 현영을 보며, 오늘 거래는 만만치 않겠다고 생각하는 유지들이었다.
그리고 종남의 제자들이 모두 돌아가기 전. 청명은 한 사람을 다시 마주했다.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뭘?"
"감사합니다, 소도장."
청명이 뚱한 표정으로 이송백을 바라보았다.
"저기 다른 사형제들은 다들 이쪽으로 이를 박박 갈고 있을 텐데, 여기 와서 그러면 안 되는 것 아니에요?"
이송백이 어색한 얼굴로 머리를 긁는다.
"이미 뭐 반쯤은 사이가 벌어져 버려서."
반쯤이 아닌 것 같은데?
이걸 낙천적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둔하다고 해야 하나? 종남의 제자들은 이미 눈빛으로 이송백을 갈아 마시고 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원래 적보다 배신자가 더 싫은 법이니까. 종남의 입장에서 보면 적 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적이 청명이다. 그런 사람에게 굳이 따로 말을 거는 이송백을 좋게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게 이송백답긴 하지만.
"전에는 소도장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송백이 단호한 눈으로 말한다.
"하지만 이제는 소도장이 한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습니다. 제가 가야 할 길도 말이지요."
"……저기, 저는 화산의 제자인데요?"
이송백이 빙그레 웃는다.
"스승을 구함에 있어서 문파가 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배울 것이 있다면 그 누구라도 스승이 될 수 있는 법이죠."
"저기요. 혹시……."
"예?"
"도관에 입문해 보실 생각은 없으세요?"
네가 가라, 화산.
나보다 네가 더 도인 같다.
"이미 종남에 적을 둔지라."
이송백이 겸연쩍게 웃고는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에 여전히 의식을 잃고 업혀 있는 진금룡이 보인다.
"사형은 오늘의 승부로 많은 것을 느꼈을 겁니다. 조심하십시오. 사형은 굉장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이제는 소도장을 목표로 삼고 수련하겠지요. 더 강해지고 더 무서워질 겁니다."
"네, 뭐. 그러시든가."
심드렁한 청명의 반응을 본 이송백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소도장께는 의미가 없는 말이겠군요."
청명은 진금룡보다 더 빠르게 강해질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격차는 벌어지기만 할 뿐, 결코 좁혀지지 않는다. 이송백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저 감사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럼 다시 뵐 때까지 이만……."
"잠시만."
이번에는 청명이 이송백을 잡았다.
"예?"
정작 불러 세운 청명은 말없이 이송백을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이나 그렇게 이송백을 빤히 바라보던 청명이 이제까지와 다른, 낮은 어조로 입을 연다.
"어려운 길이 될 텐데?"
"……."
이송백이 청명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소도장은 정말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 같습니다. 뭐 하나 숨길 수가 없군요."
"그래도 가겠다고?"
이송백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가고 싶어 가는 길이 아니지요. 가야 하니까 가는 길 아니겠습니까."
청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사형제들에게로 돌아가는 이송백을 보며 청명은 묘한 감흥에 사로잡혔다.
이송백은 아마 이제부터 외로운 싸움을 해야 할 것이다. 이곳에 온 종남의 문하들은 청명의 검을 잊지 못할 것이고, 그 검을 목표로 삼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런 흐름 속에서 종남의 검을 지키는 게 쉬운 일일 리 없다. 사람은 자신과 다른 존재를 배척하고 경원시하는 법이니까.
더없이 외롭고 어려운 싸움이 될 테지만…….
"해낸다면 언젠가는 종남의 희망이 될지도 모르지."
청명이 고개를 돌려 삼대제자들 바라보았다.
헤실헤실 웃고 있는 조걸과 다른 사형제들을 보니 한숨이 절로 새어 나온다.
'남의 문파 놈은 저리 잘났는데.'
왜 이놈의 문파 놈들은 하나같이!
이송백 같은 놈이 하나만 있었어도 청명의 일이 두 배는 쉬워졌을 텐데!
"끄응."
청명이 고개를 내저었다.
어쩌겠는가?
'죽어라고 굴리면 사람 되겠지.'
인간은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는 법이다. 가지지 못한 것을 탓해 봐야 의미가 없다.
산문을 나서는 종남의 제자들을 보며 청명이 몸을 돌렸다.
종남과는 이걸로 일단락을 맺는다. 이제는 청명이 먼저 나서서 종남을 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저들은 모르겠지만, 이미 청명은 충분할 정도로 복수를 했으니까.
그럼 종남과의 인연이 여기서 정리되었는가?
"그럴 리가 있나."
이제 종남에게 있어 청명은 눈엣가시를 넘어서 반드시 처리해야 할 제일의 숙적이 되어 버렸다.
충분히 이해는 간다. 입장 바꿔서, 청명이 종남의 장문인이라 해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를 꺾으려 들 것이다.
그게 종남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그러다 뒈지는 거지."
청명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때 누군가 그를 찾으며 다급하게 뛰어왔다.
"청명아!"
윤종이었다.
"왜 사형?"
"빨리 와 보거라. 장문인께서 찾으신다!"
"……."
청명의 얼굴에 미묘하게 싫은 기색이 떠올랐다.
'시작이네.'
그가 고개를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본다.
'적당히 할걸.'
사실 이 일련의 사태는 해낸 거라기보다는 저질렀다에 가깝다.
사문의 어른(?)들 앞에서 종남의 이대제자들을 모조리 때려잡고, 검으로 매화를 피워 내지 않았는가?
당연히 장문인과 장로들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야 비무가 진행되고 있었으니 어찌할 수 없던 일이지만, 이제는 비무가 끝났으니 당연히 이야기가 나올 것이다.
'뭐라고 변명하지?'
사실 내가 네 조사니라?
아, 이건 아니고.
그게 제가 지나가다가 주운 비급으로 익혀 보았습니다?
아, 이것도 아니고.
"끄으응."
도무지 빠져나갈 방법을 찾지 못한 청명이 머리를 벅벅 긁어 대자 윤종이 고개를 갸웃한다.
"뭐 하느냐. 얼른 가자."
"으응."
청명이 한숨을 푹푹 내쉰다.
아이고, 내 팔자야.
이제는 이겨 놓고도 변명거리부터 찾아야 하는구나.
장문사형. 장문사형 보고 계시오? 내가 이렇게 살아야겠소?
- 그럼 뒈지든가.
아니, 이 양반이!
자기 죽었다고 말이 심하시네!
청명은 결국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꼴로 장문인의 방으로 향했다. 방 앞에 신발이 꽤 여러 개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장로들과 일대제자들도 모여 있는 모양이었다.
"장문인. 윤종입니다. 청명을 데리고 왔습니다."
"들여보내거라."
"예."
윤종이 청명에게 안으로 들어가라고 손짓을 한다.
"……."
윤종이 재차 손짓한다.
"……."
"뭐 해, 인마? 들어가!"
"……끙."
청명은 꾸역꾸역 한숨을 내쉬고는 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들어가면 또 지옥 같은 질문이 쏟아질…….
"오오오오오! 청명이 왔느냐!"
"크으! 잘생겼다! 잘생겼어! 우리 청명이 이리 잘생겼어!"
"……."
뭐여?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장로들과 일대제자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시커먼 아저씨들이 단체로 박수를 치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매우, 매우 기분이 이상했다.
'이 사람들 왜 이래?'
고개를 들어 보니 다들 만면에 웃음꽃이 피어 있다. 검으로 매화를 못 피운다고 아주 얼굴로 피워 댈 기세다.
가운데 앉은 현종의 입이 귀에 걸리기 직전까지 가 있는 것을 본 청명이 새삼 한 가지를 깨달았다.
'아, 얘들은 이리 좋아 본 적이 없구나.'
매화고 나발이고 그런 게 뭐가 중요하냐는 듯 일단 웃어젖히는 사문의 어른들을 보노라니 뭔가 찜찜하면서, 동시에 울컥한 청명이었다.
뭐랄까.
고기반찬 하나 제대로 못 사 주던 아버지의 심정이랄까…….
뭐가 짠함을 느끼는 와중에 현종이 입을 연다.
"그래. 청……. 푸ㅤㅎㅜㅂ! 그래 청명……. 큭!"
현종이 고개를 숙이고 손으로 입을 가린다. 청명이라는 말만 해도 좋은 모양이었다.
"크흐흐흐흠!"
장문인이 헛기침을 한다. 하지만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것이, 여전히 웃음을 참느라 고생하는 모양이었다.
"그래. 다친 곳은 없느냐?"
"그냥 살짝 베인 정도입니다."
"혹여 상처가 곪을 수 있으니, 이곳에서 나가면 의약당에 가 보도록 하거라."
그러자 현상이 눈을 부라린다.
"의약당주를 부르면 되지! 왜 바쁜 사람을 오라 가라 하십니까?"
"……말이 좀 이상한 것 같은데. 누가 바쁜데?"
"그야 저 아이가 바쁘지요! 의약당주가 하는 게 뭐가 있다고!"
"……."
현종이 멍한 눈으로 현상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떳떳하다는 듯 가슴을 활짝 편다. 심지어는 모여 있는 이들도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리하든가 하고."
"예, 장문인."
"네가 화산의……."
그때였다.
벌컥!
문이 열리더니 현영이 안으로 박차고 들어온다!
"장문인! 유지들이 돈을 퍼붓고 있습니다! 으하하하하! 아주 돈이 넝쿨째 굴러 들어옵니다! 내 살다살다 비무 하고 돈을 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보지도 못했는데! 저놈은 재신입니다! 재신! 이제는 하다하다 비무를 해서 공을 벌어 오……. 청명이 이놈! 여기에 있었구나!"
현영이 청명에게 와락 달려들어 그의 볼을 쭉 잡아 늘렸다.
"이 귀여운 놈! 으하하하핫! 내가 너 같은 손자 하나만 있었어도 세상에 바랄 게 없을 텐데."
볼이 쭉 늘어난 청명이 허망한 눈으로 천정을 바라보았다.
장문사형.
제가 이리 삽니다. 제가.
이제는 손자뻘도 안 되는 애가 제 볼을 잡고 이러고 있습니다. 예? 제가 이렇게 살아야 됩니까? 예?
"애답해 보입이어. 증믄스흉."
"으하핫? 뭐라고? 그래그래. 나도 즐겁구나! 으하하하하핫!"
다들 반쯤 정신 줄을 놓아 버린 화산의 어른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