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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12화 (112/1,567)

112화. 네가 화산의 제자라면 그걸로 됐다. (2)

"허, 허어. 허? 허허허허……."

현상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연이어 새어 나온다.

"이, 이런 일이. 허허허허!"

할 말이 없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새어 나오는 헛웃음을 자제하는 것뿐이었다.

승리는 응당 기쁜 일이지만, 상대가 워낙 처참하게 당한 덕분에 대놓고 표출하기도 쉽지 않다.

'내가 일대제자만 됐어도! 지금 저기에 달려갔을 텐데!'

화산의 장로라는 이토록 거추장스럽게 느껴진 건 이번이 처음이다.

'정말로 우리가 종남을 이겼구나!'

정확하게는 화산이 아니라 청명이 이긴 거지만, 그게 그거 아닌가? 체통을 지키느라 마음 놓고 기뻐할 수 없다는 게 유일한 안타까…….

"으하하하하핫! 이겼다! 이겼어! 보셨습니까? 사형! 청명이 놈이 또 돈을 세웠습니다!"

"……공을 세운 거겠지."

"그게 그거 아닙니까! 으하하하핫! 대체 어디서 저런 황금덩어리가 굴러 들어왔단 말입니까! 으헤헤헤헤헤!"

"사, 사제. 체통을 좀……."

"체통은 빌어먹을! 이 상황에서 무슨 체통을 지키란 말입니까! 내가 이 망할 놈의 화산에 입문한 이후로 이런 날이 처음인데!"

"이, 일단 진정을 좀 하고……."

"으하하핫! 저 종남 놈들의 표정 좀 보십시오! 내가 화종지회 끝날 때마다 저 새끼들의 의기양양해서 돌아가는 꼴을 보며 속이 터지다 못해 위장병까지 생겼었는데! 으하! 저 피죽도 못 먹은 얼굴이라니! 돌아가는 길 내내 아주 지옥이겠구만!"

현상은 현영을 말리려다 포기한 채 그냥 웃고 말았다.

'말은 맞는 말이지. 체통이 무슨 소용인가.'

그동안 체통을 지켜서 화산에 좋은 일이 뭐가 있었다는 말인가? 그저 남 좋은 일에 박수나 쳐 주었을 뿐이다.

"크흐흐! 장문사형! 장문인! 보셨습니까! 저 청명이 놈이 사고를 쳤……. 장문사형?"

현종에게 달려간 현영이 더없이 온화한 현종의 표정을 보며 움찔했다.

"다…… 이루었……."

"아니! 이 양반은 뭔 등선을 시도 때도 없이 해! 정신 차려 보십시오! 사형!"

현종이 고개를 흔들었다.

뭔가 잠시 영혼이 빠져나간 느낌이 들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다.

"이게 꿈은 아니겠지?"

"꿈도 이런 말도 안 되는 꿈은 없습니다!"

"그렇지. 그렇겠지."

현종이 더없이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청명을 바라보았다. 다른 제자들 사이에 둘러싸인 청명이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듯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며 구박을 하는 중이었지만, 사형제들과 사숙들은 그래도 좋다고 청명을 얼싸안고 있었다.

'이것이구나.'

화산의 제자들이 저리 서로 모여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 만인가?

종남에게 이겼다는 사실보다 제자들이 저리 기뻐한다는 게 더욱 뭉클하게 다가오는 현종이었다.

"장문인."

그때 다가온 운검이 빙그레 웃으며 현종에게 말한다.

"즐거움은 이루 말할 수 없으나 이제 그만 정리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 종남을 저리 두는 것 역시 그리 좋은 일은 아닐 겁니다."

"그렇구나."

현종이 흐뭇하게 웃으며 운검을 돌아보았다.

"너는 이리될 줄 알고 있었더냐?"

"여기까지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다만?"

운검이 한쪽을 바라보며 말한다. 물론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청명이 있었다.

"저 녀석이 화산의 체면 정도는 세워 줄 거라 생각했습니다."

"과하게 세웠구나."

"그렇습니다. 워낙 여러 가지 의미로 기대를 뛰어넘는 녀석이라."

"그래, 그렇구나."

여러 가지 의문이 남아 있는 건 사실이지만, 지금 그런 것이 무어가 중하겠는가.

"가자꾸나. 저들을 보내 주고, 이곳에 온 유지들에게도 인사를 해야겠지."

그러자 현영이 재빨리 말을 거들었다.

"선물이라도 챙겨 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야 어디 가서 이 이야기를 더 퍼뜨릴 것 아닙니까. 사형! 돈을 찔러줍시다! 지금 돈이 남는데 이걸 쓱싹 밀어 넣어 줘야 저 인간들이 어디 가서 화산 칭찬을……. 읍! 으읍!"

현상이 현영을 잡아끌고 나가자 현종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사마승은 그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사람이 정말 극한에 몰리면 화도 나지 않는다더니 그 말이 맞는 모양이다. 조금 전까지 그를 지배하던 분노는 씻은 듯 사라졌다. 남은 것은 그저 생전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짙은 허탈뿐이었다.

'왜 이렇게 되어 버렸지?'

종남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종화지회에서 패배한 적이 없다. 그런데 하필이면 지금. 마지막 종화지회에서 지금껏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참혹한 패배를 당해 버렸다.

당당한 구파일방의 일원이자 섬서의 패자인 종남이, 몰락하여 현판을 내릴 날만 기다린다는 평가를 받던 화산에 대패했다.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만 것이다.

'왜?'

단순한 패배로 끝날 일이 아니다.

이 패배는 섬서의 판도를 바꿀 것이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직은 누구라도 섬서의 패자로 종남을 언급하겠지만, 그 말 뒤에는 훗날에는 모른다라는 말이 반드시 따라붙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마승은 앞에 서 있는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몇몇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쓰러져 있었고, 몇몇은 그 주변에서 쓰러진 제자들을 돌보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제자들은 넋이 나간 얼굴로 허공을 바라볼 따름이다.

눈에 생기가 사라져 버린 그들을 보고 있으니, 가슴속에서 뭔가 울컥 치밀어 오른다.

'이들 역시 화산에 공포를 가지게 되겠지.'

과거의 종남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마교의 습격이 있었던 이후, 화산의 제자들이 종남에 느꼈던 그 절망감을 이제는 종남의 제자들이 느껴야 한다. 도무지 넘을 방법이 보이지 않는 벽 앞에서 좌절하고 무너지는 경험을 해야 한다.

'왜?'

모든 것은 다 저놈 때문이다.

사마승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우린 화산에게 패하지 않았다.'

청명 단 한 사람에게 패한 것이다.

청명만 아니었다면 이런 끔찍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삼대제자들이 당한 것 정도는 사고로 치부해 버릴 수 있다. 애초에 종남의 삼대제자들은 화산의 삼대제자들에 비해 무척 어리지 않은가?

하지만 청명이 이대제자들을 저리 참혹하게 꺾어 버리며 변명의 여지가 사라졌다. 이제 종남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저 청명의 이름이 덧붙여지겠지.

'이 무슨 굴욕이라는 말인가?'

치욕.

종남의 긴 역사에 다시없을 치욕이다.

"이……."

이를 으드득 갈아 대는 사마승을 보며 종남의 제자들이 고개를 숙였다.

"이이……. 빌어먹을!"

이제야 상황을 실감한 사마승이 밀려오는 분노와 굴욕감에 눈을 까뒤집었다. 심장이 터져 버릴 것처럼 뛰고, 눈앞이 순간순간 아득해진다.

"장문인의 얼굴을 어찌 보라는 말이냐."

신음처럼 흘러나온 그 목소리에 종남의 제자들의 얼굴이 더 나빠진다.

뭔가 할 말을 찾는 사마승의 눈에 그들에게 다가오는 화산의 장문인이 보였다.

으득.

질끈 깨문 입술이 다시 터진다. 입 안으로 비릿한 핏물이 스며든다.

하지만 저 화산 놈들에게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다. 그건 오히려 저들에게 즐거움이 될 테니까.

가까스로 표정을 관리한 사마승은 다가오는 현종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장문인."

"고생 많으셨소이다."

현종이 빙그레 웃으며 말한다.

"이번에는 저희가 운이 좋았습니다."

"……그럼 저희가 운이 나빴군요."

사마승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자제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현종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속에서 천불이 끓어오른다.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문 사마승이 싸늘하게 일갈했다.

"마음껏 기뻐하셔도 됩니다. 장문인. 화산에는 다시없을 일이지 않습니까? 이게 마지막 기쁨이 될지도 모르는데 기뻐하셔야지요! 아암! 기뻐하셔야지요!"

"저, 저런……."

현영이 막 발작하려는 찰나 현상이 얼른 그의 소매를 잡아당긴다.

사마승은 발악처럼 말을 이었다. 점점 언성이 높아졌다.

"종화지회에서 패한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화산이 종남을 이긴 건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겨우 삼대제자와 이대제자의 비무 따위로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는 사실 역시 말입니다."

현종은 날카로운 사마승의 말을 들으면서도 빙그레 웃는다.

"당연히 그리 생각하고 있소."

"……."

"장로의 지적 감사히 받겠소. 종남의 장문께도 안부 전해 주시구려."

사마승이 도끼눈을 뜨고 현종을 노려보았다.

'이 작자가 감히 내 앞에서!'

이전 종화지회까지는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하던 이가 현종이다. 그런데 한 번 이겼다고 뭐라도 된 듯 굴다니…….

"이……."

그 순간이었다.

"하. 거 싸가지는 진짜 어디 안 가네."

"……."

사마승의 고개가 획 돌아간다.

이제는 너무도 익숙한 목소리다. 그리고 앞으로는 꿈에서도 잊지 못할 목소리였다. 청명이 사형제들을 대동하고 그들을 향해 다가온다.

사마승의 눈에 핏발이 섰다.

'모두가 저놈 때문이다.'

불이라도 뿜어져 나올 듯한 사마승의 시선을 받으며, 청명은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곁에 선 조걸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사형! 싸가지! 응? 싸가지!"

"내가 사형이야, 인마!"

"그러니까. 윗사람이면 최소한 체통은 지켜야지. 그렇게 싸가지 없이 굴면 되나?"

"……너 지금 누구한테 이야기하는 거냐?"

"누구긴 누구야? 사형이지!"

청명이 조걸을 한번 걷어차고는 몸을 돌려 현종에게 포권을 했다.

"장문인. 비무가 끝났으니 상대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 예의인 것 같아 이리 왔습니다."

"허허. 그래, 그렇구나."

예의도 바르지. 내 새끼.

장문인의 흔쾌한 허락이 떨어지자 청명이 슬쩍 사마승을 바라보았다. 빙글빙글 웃는 청명의 낯에 사마승은 이제 아예 몸을 부들부들 떨어 대었다.

'전부 이놈 탓이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이놈은 종남의 가장 큰 적이자 장애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소매 안에서 사마승의 손이 꿈틀거렸다.

오명만 각오한다면 사문에 다시없는 공을 세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다시는 재기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종남은…….

그때 청명이 빙그레 웃으며 말한다.

"일격에 되시겠습니까?"

"……."

사마승의 눈이 흔들렸다.

'이놈…….'

청명이 자신의 의도를 파악했다는 것 알아챈 사마승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무슨 어린놈의 심계가…….'

무방비한 청명이라면 기습으로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리 대비를 하고 있는 청명이라면 그가 보여 준 무위를 감안할 때, 일격에 죽이는 것은 무리다.

그리고 청명을 죽이는 데에 실패한다면 사마승은 오명을 뒤집어쓸 것이고, 사문 역시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아니, 사문 역시 사마승과 함께 오명을 뒤집어쓰겠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마승을 보며 청명이 빙그레 웃었다.

"앞으로도 자주 뵐 것 같은데. 다음에는 먼저 인사드리겠습니다."

"……."

아무 말 없이 핏발 선 눈으로 청명을 노려보던 사마승이 몸을 획 돌린다.

"돌아간다!"

그러곤 제자들을 기다리지도 않고 빠른 걸음으로 홀로 화산을 벗어났다.

"저저……."

"으음."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는 탄식을 들으며 청명이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러게 왜 깝치냐고.'

본전도 못 찾을 거면서.

"청명아."

청명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현종이 무척이나 복잡한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 표정에서 애정과 안타까움, 뿌듯함과 미안함을 동시에 본 청명은 저도 모르게 눈을 살짝 감아 버렸다.

이럴 때는 현종의 얼굴에서 청문 사형이 보인다.

그도 때때로 저런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곤 했다. 그때는 그 얼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지만, 이제는 청명도 안다. 화산을 이끌어 보니 자연히 알게 되었다.

한참의 망설임 끝에 나온 현종의 목소리가 청명의 귀를 파고든다.

"……애썼다."

청명이 빙그레 웃었다.

"별말씀을요. 장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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