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네가 화산의 제자라면 그걸로 됐다. (1)
세상을 가득 뒤덮던 설화와 매화가 씻은 듯 사라져 버렸다.
마치 환상처럼 말이다.
지켜보던 이들은 그 장엄한 광경이 준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그저 멍한 눈으로 비무장을 응시했다. 꿈결 같던 모습이 사라지고 나니, 그곳엔 오로지 두 사람만이 서 있을 뿐이었다.
두 사람.
청명과 진금룡.
모두가 숨을 죽인 채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된 거지?'
'누가 이긴 거야?'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무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채지 못했다. 그저 새하얀 설화와 붉은 매화의 난무를 보았을 뿐이다.
하지만 이내 곧 그들의 눈으로 결과를 똑똑히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꼿꼿이 서 있던 진금룡의 무릎이 휘청한다.
시간이 멈춰 버린 세상에서 오로지 진금룡만이 움직이는 것 같다. 꺾인 무릎이 바닥을 찧고, 이내 그의 몸이 허물어진다.
털썩.
긴 정적을 끝내는 소리였다.
그 어색하고도 생경한 소리가 멈췄던 화산의 시간을 다시 움직이게 만들었다.
"……."
백천은 두 눈을 부릅뜨고 쓰러진 진금룡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진금룡이…….'
그에게는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이었던 진금룡이 지금 패해 쓰러졌다.
진금룡이 약했던가?
절대 그렇지 않다.
이번 비무에서 진금룡이 보여 준 신위는 백천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왜 그가 그토록 자신만만했던가를 증명해 주는 무위였다. 백천은 천 번을 싸운다고 해도 진금룡을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진금룡이 지금 바닥에 쓰러져 있다.
백천의 시선이 옆으로 이동한다.
검을 내린 채 가만히 진금룡을 바라보고 있는 청명이 보였다. 백천뿐만이 아니다. 모두의 시선이 청명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약간의 위화감.
그리고 가슴속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흥분.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은 자연히 깨닫게 되었다. 지금 그들이 보고 있는 광경은 아마 영원토록 회자될 것이다.
화산이 그 역사를 이어 가고, 종남이 그 현판을 내리지 않는 이상, 이 비무는 화산과 종남의 이름과 함께 세인들의 입에서 내내 오르내릴 게 분명했다.
다시 말해.
지금 이 자리에서 전설이 탄생한 것이다.
"……이겼어."
윤종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다.
십 연승.
화산의 삼대제자 청명이 종남의 이대제자를 상대로 열 번을 내리 이겼다. 그것도 종남 이대제자 중 최고수인 진금룡을 상대하면서까지 말이다.
"어……."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혼재했지만, 무엇 하나 말이 되어 나오질 않는다.
그저 신음을 흘리며 청명을 바라보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스륵.
청명이 마침내 들고 있던 목검을 허리에 차고는 주위를 둘러본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이들은 움찔하며 살짝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씨익.
청명의 입꼬리가 확 말려 올라간다. 웃는 낯으로 주위를 둘러본 그가 천천히 입을 연다.
"이번 화종지회는……."
살짝 뜸을 들인 청명이 높지도 낮지도 않은 목소리로 선언한다.
"화산의 승리다!"
그와 동시에 폭발적인 반응이 터져 나왔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윤종이 자신의 앞에서 미칠 듯이 고함을 지르는 백천을 보며 화들짝 놀라 버렸다.
화산에 입문한 이후 백천과 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지만, 윤종은 단 한 번도 백천이 저렇게 흥분하여 소리를 지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
삼대제자에 불과한 윤종이 종남에 가졌던 감정이 이대제자인 백천의 울분에 비견될 수 있을 리 없다. 백천은 윤종보다 적어도 십 년 이상을 더 종남에 짓눌렸던 이고, 더불어 화종지회를 몇 번이나 더 치러 낸 사람이다.
그런 만큼 이 순간에 느끼는 감정도 윤종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다. 윤종도 벅차게 차오르는 흥분에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인데 백천은 오죽하겠는가?
다른 이대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으아아아아! 이겼다! 우리가 종남을 이겼어!"
"화종지회 첫 승리다! 첫 승리라고! 빌어먹을 종남 놈들!"
"십 연승이다! 십 연승이야! 저 미친놈이 십 연승을 했어!"
"으하하하핫! 청명아! 청명아 이놈아아아아!"
자신들은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으니 침울해할 법도 하건만. 삼대제자 이상으로 기뻐하는 이대제자들을 보며 윤종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었다.
'이게 문파라는 거지.'
서로 다툴 수는 있다.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화산이라는 이름을 내세우는 순간 그런 감정 같은 건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
아, 물론.
"으아아아아아! 사형! 저 미친놈이 이겼습니다! 진금룡을 이겼다구요! 으아아아아아아!"
삼대제자라고 이대제자보다 덜 기뻐 날뛴다는 소리는 아니다.
곁에 있던 조걸이 윤종의 머리를 움켜잡고 목을 부러뜨릴 기세로 뒤흔들기 시작했다. 거의 이성을 놓아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는 모양이다.
"이, 이것 좀 놓고……."
"으아아아아아아! 미쳤다! 미쳤어! 십 승! 십 승이다! 내 저놈이 사람 아닌 줄은 알았지만, 세상에, 십 승이라니! 미친놈! 으하하하핫! 저 미친놈 진짜!"
"놓으라고, 인마!"
소리를 지르면서도 윤종은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머리를 통째로 흔들던 조걸이 급기야 그의 머리채를 쥐어뜯고 있지만, 도저히 기분이 나빠질 수가 없다. 가슴속에서 기쁨과 이상한 충족감이 동시에 치밀어 올라 스스로를 어찌할 수 없는 기분이다.
살면서 이런 감정을 느껴 본 적이 또 있던가?
'청명아. 수고했다. 이놈아!'
그의 시선이 비무장에 서 있는 청명에게로 향했다.
청명은 손을 들어 가슴을 꾹 눌렀다.
그리고 입 안 가득 밀려 올라온 핏물을 꿀꺽 삼켰다.
'좀 무리했어.'
알고 있는 것과 몸으로 행할 수 있는 것의 차이가 아직은 극심하다. 칠매검을 극한으로 펼쳐 진금룡을 제압하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기를 무리하게 운용한 탓에 내상을 꽤 입었다.
하지만…….
"뭐 아무려면 어때?"
이정도 내상이야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다. 그가 해낸 것에 비한다면 말이다.
과거 그는 매화검존으로 불리며 누군가에게는 두려움, 누군가에게는 존경의 대상으로 살았다. 하지만 그 삶을 통틀어도 이만한 일을 해낸 적이 있었던가?
'천마 목을 자른 건 나 혼자 한 게 아니니까.'
매화검존이라는 이름과 그 무위야 천하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지만, 확실하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만한 업적은 그리 많지 않았다.
특히나 이 나이 대에는 말이다.
오늘 이 비무는 청명의 삶 내내, 그가 화산에서 새로이 살아가는 내내 회자되고 기억될 것이다.
뿌듯하냐고?
'아니. 깨소금이지.'
청명이 슬쩍 고개를 들어 종남의 진영을 바라보았다. 하나같이 넋이 나간 그들을 보고 있으니 속에서부터 뭔가 고소한 것이 자꾸 올라온다.
이 기분이면 맨밥만 먹어도 꿀맛이지, 그냥!
입꼬리를 올리며 웃던 청명의 눈에 얼핏 차가운 빛이 어렸다.
눈에 보이는 승리도 중요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저들이 청명의 의도에 걸려들었다는 것이다. 넋이 나간 와중에도 몽롱하게 풀려 버린 눈을 보면 확실하다.
저들은 절대 이 비무를 잊지 못할 것이고, 그 무의식 속에 청명의 검을 확실하게 박아 넣었을 것이다. 이 일이 훗날 어찌 작용할지를 생각해 보니 십 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간다.
"그러게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현재를 잃는 것은 커다란 위기가 되지만, 미래를 잃으면 모든 것이 통째로 무너지고 만다.
오늘 청명은 종남에게서 그 미래를 빼앗아 왔다.
'어떻습니까! 장문사형! 이정도면 확실하게 복수했죠?'
- 거 도사라는 놈이!
'여하튼 진짜!'
청명이 얼굴을 확 일그러뜨린다. 도사는 원수도 없나!
이 순간만큼은 장문사형이 같이 살아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양반이 같이 돌아왔으면, 종남의 죄는 더없이 중하나 지금의 제자들에게는 죄가 없다는 말이나 늘어놨겠지.
그럼 청명은 속 타 죽는 거다!
'이걸로 다 갚은 건 아니다.'
청명이 종남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문파가 지척에 붙어 있는 이상 앞으로도 종남과 얽힐 일은 많을 것이다. 그 때마다 잊지 않고 착실하게 복수를 해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걸로 됐다.
한쪽에서는 터져나갈 듯한 환호를 받고, 다른 쪽으로는 절망 어린 시선을 받으며 청명이 고개를 돌렸다.
"사숙조."
"어? 어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운암이 청명의 말에 화들짝 놀란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운암이 마른침을 꿀꺽 삼킨다.
'이, 이거 내가 해야 하는 건가?'
하기야 그가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
운암이 주먹을 꾹 쥐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 답지 않은, 더없이 환한 얼굴로 진중하게 소리친다.
"이번 화종지회는 화산의 승리로 돌아갔음을 알립니다!"
함성 소리가 더 커진다.
삼대제자와 이대제자가 모여 있는 곳에서는 숫제 난리가 났다. 저들끼리 껴안고 방방 뛰고,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러 대고 있었다.
"쯧쯧. 체통도 없이."
청명이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쓰러진 진금룡을 바라본다. 자신들의 제자가 비무장에 쓰러져 있음에도 종남의 제자들은 아무도 그를 수습하려 들지 않았다.
아니, 그럴 정신이 없겠지. 살아생전 단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커다란 충격에 신음하는 중이니까.
"얘 좀 데리고 가요."
"……."
"거 정신 좀 차리고."
청명의 말에 화들짝 놀란 종남의 제자들이 그제야 비무대로 뛰어 들어온다.
"사형! 정신 차리십시오! 사형!"
"의약당으로! 빨리!"
소란스러워진 비무장을 지켜보던 청명이 빙글 몸을 돌리고는 제 자리로 향했다.
그러자 지켜보고 있던 이대제자와 삼대제자들이 일제히 뛰어나와 청명에게 달려들었다.
"허허. 거참, 뭐 대단한 사람 오셨다……."
청명의 말은 채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으아아아아아아! 청명아아아아아!"
"이 미친놈! 이 또라이 같은 놈!"
"아니!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진짜?"
제자들이 단체로 달려들어 청명을 뒤덮는다. 자신의 위로 올라오는 육중한 남자들의 체중을 느끼며 청명이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내상! 야, 이것들아! 내가 내상을……!"
"으하하하하!"
"미쳤다! 미쳤어!"
"내상 입었다고! 이것들아!"
하지만 흥분한 제자들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일제히 덮쳐든 제자들이 청명을 내리누르고 끌어당기고 후려치…….
방금 어떤 새끼야?
한참을 시달린 끝에야 청명은 달려든 제자들에게서 가까스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혀를 내둘렀다.
비무를 하면서 입은 상처보다 지금 여기서 입은 상처가 더 많은 느낌이다.
하지만.
'기분이 그리 나쁘지는 않군.'
청명이 피식 웃고 말았다.
과거에도 그는 언제나 화산의 체면을 세워 주는 역할을 맡았지만, 지금처럼 격한 반응을 받아 본 적은 거의 없었다. 모두가 청명의 승리를 당연하게 여겼으니까.
다시 살아나 골치 아픈 일들만 떠안게 되었지만, 덕분에 예전에는 할 수 없었던 여러 가지 경험을 해 볼 수 있게 된 청명이었다.
확실한 것은 하나.
'오늘 이 일로 화산은 바뀌겠지.'
물줄기를 틀었다.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제자들은 이제 긍지를 가질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 긍지가 이들을 더 높은 곳으로 이끌 것이다.
'장문사형. 됐습니까?'
- 고생했다. 청명아.
거 칭찬 한 번 받기 더럽게 어렵네.
청명의 입가에 더없이 뿌듯한 미소가 자리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