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화산은 사라지지 않는다. (5)
'이건…….'
진금룡은 자신이 만들어 낸 설화 속에서 피어나는 붉음을 보았다.
그저 미약한 한 송이.
새하얀 설원에 떨어진 한 방울의 피처럼, 더없이 붉지만 더없이 미약한 붉은 점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붉은 점이 이내 선명한 매화의 형상을 만들어 낸다.
한 송이. 또 한 송이. 순식간에 피어난 매화가 그의 설화와 어우러지기 시작했다.
녹아내린다.
내리쬐는 봄볕에 눈이 녹는 것처럼, 붉은 매화가 피어난 곳의 설화들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매화?'
화산은 더 이상 매화를 피워 낼 수 없다고 들었다. 그렇기에 모두가 화산이 다시는 부활할 수 없을 거라 여겼다.
화산의 상징은 누가 뭐라 해도 매화. 그 매화를 다시 피워 낼 수 없는 화산은 결국 예전과 같은 화산이라 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사라졌다고 생각한 화산의 매화가 진금룡의 눈앞에서 다시 한번 피어난다.
그것도 더없이 생생하고 화려하게.
"이익!"
믿을 수 없다.
청명의 검이 다시 매화를 그려 내는 것쯤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지금 진금룡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게 아니다.
그가 필사적으로 피워낸 설화(雪花)가 화산의 매화에 녹아내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째서?'
설화십이검이다.
이 검에는 최근 백 년 간의 종남의 노력이 스며들어 있다. 종남의 모든 검에 대한 정수가 담긴 새로운 검술이자, 종남의 검이 발전하고 있다는 증거가 바로 설화십이검이 아니던가?
전설처럼 들려오는 화산의 매화검법이 이곳에서 다시 재현된다 한들, 설화십이식은 거기에서 몇 단계는 더 나아간 검술일 터.
구세대의 유물에게 패하는 일 따위는 있을 수 없다!
한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녹아내린다.
허물어진다.
그가 만들어 낸 새하얀 설화가 청명의 붉은 매화에 닿는 순간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스러진다.
"어째서?"
진금룡의 눈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 이상 완벽한 검을 펼쳐 낼 수 없었다. 완벽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완전한 형태로 펼친 검이다. 그런데 왜 저 초라한 매화조차 당해 내지 못한단 말인가?
으스러진다.
설화십이식이.
이지러진다.
종남의 검이.
무너져 내린다.
그의 자부심이.
"어……."
그가 쌓아 올려 온 모든 것들이 지금 저 붉은 매화에 산산이 흩어지고 있었다.
"어째서어어어어어어어어!"
진금룡이 절규가 화산 전체를 뒤흔들었다.
청명이 반개한 눈으로 검을 휘두른다.
그의 검 끝에서 붉은 매화 송이가 줄기줄기 피어났다. 그 매화에 닿은 진금룡의 설화가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이지러진다.
'껍데기.'
저건 그저 껍데기일 뿐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껍데기를 모방한 껍데기의 모조품이다.
세상 사람들은 화산의 검을 오해한다. 심지어는 화산의 제자들조차도 자신들의 검을 오해했다.
매화검법은, 아니 화산의 검은 매화의 형상을 만들어 내는 검이라고 말이다. 화려하고 아름답게 매화가 휘날리는 모습을 충실하게 재현한 검이라고.
얼마나 더 아름답고 정교하게 매화의 형상을 만들어 내느냐로 화산의 검이 완성된다고 오해하는 이들이 수두룩했다.
하나, 과연 그런가?
화산은 도문(道門)이다.
화산의 모든 검은 도에 이르기 위한 일환일 뿐이다.
무당은 태극(太極)을 그 근원으로 삼는다.
점창은 태양(太陽)을 그 근원으로 삼는다.
공동은 오행(五行)을 그 근원으로 삼는다.
세상에 존재하는 도문들은 자연의 한 모습을 닮아, 스스로의 육체로 도를 구현하는 것을 그 궁극의 목표로 삼는다.
그러나 화산만은 다르다.
화산만은 그 검으로 그저 매화를 좇을 뿐이다.
무당의 검이 극에 달하면 태극이 되고, 점창의 검이 극에 달하면 태양이 된다. 그리고 공동의 검은 오행의 이치를 세상에 재현한다.
그러나 화산만은 매화. 그저 매화일 뿐이다.
이것이 화산을 다른 도문과 다르게 만들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속가의 성향이 강한 문파라고 말이다.
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정말 화산의 검이 그저 매화의 형상만을 좇을 뿐인가?
'그럴 리가 있나.'
모두가 오해하고 있다.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두르고 매화를 피워 내고 또 피워 낸 끝에, 일평생을 화산의 검과 함께하며 마침내 그 누구도 오르지 못한 곳에 올라선 후에야 알게 된 것.
화산의 검이 재현하려는 것은 결코 매화가 아니다.
화산의 검은 매화를 흉내 내지 않는다. 화산의 검은 매화를 피워 낸다.
'매화가 아니다.'
바로 '피어남'이다.
"개화(開花)."
그건 생명의 잉태.
긴긴 겨울을 버텨 내는 인내의 끝에 마침내 피어나는 기다림의 결실.
매화가 만발한 화산이기에 그저 매화를 그렸을 뿐. 검 끝에서 새로운 생명을 피워 낼 수 있다면 그 꽃이 무엇이든 무어가 중요하겠는가?
화산 검학의 본질은 바로 '개화'다.
매화의 화려함에 눈을 빼앗기고, 검의 날카로움에 영혼이 홀린 이들은 결코 화산 검학의 진수에 도달할 수 없다.
화산의 검이 추구하는 것이 매화가 아니라 '개화'에 있다는 것을 아는 이라면……. 그래, 청명이 도달한 경지에 올랐던 이라면 굳이 검법을 구분할 필요도 없다.
굳이 매화검결이 아니더라도. 이십사수매화검법이 아니더라도.
칠매검의 끝에서, 낙화검의 끝에서. 심지어는 육합검의 끝에서도 매화는 피어난다.
그것이 화산 검법의 본의(本意).
화산의 이름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이들이 마음에 품어야 할 것.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그저 보이는 화려함과 아름다움에만 눈을 빼앗긴 이들은 영원히 화려함의 늪을 헤맬 뿐이다.
그래.
지금의 진금룡처럼.
저들이 만들어 낸 설화십이식처럼 말이다.
청명의 시선에 넋이 나간 눈으로 비무장을 바라보고 있는 종남 문하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지켜봐라.'
너희의 검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인간의 기억이란 오묘한 법.
종남의 운명을 결정하는 비무에서 종남의 검이 더 화려하고 붉은 청명의 검에 꺾이는 모습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화인이 되어 저들의 기억에 새겨질 것이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이 광경이 떠오를 테고, 수련을 할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이 모습을 따라하려 들겠지.
결국은 저들이 생각하는 강함마저 이 검을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더 화려하게. 더욱더 화려하게.
하지만 그 끝에는 아무것도 없다. 존재하는 것은 그저 허무뿐.
화려함을 쫓으면 쫓을수록 종남은 자신들의 검을 잃어버리고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지게 될 것이다.
믿었던 이들이 배신해도.
문파의 중심이 되는 검법을 잃어도.
불구대천의 숙적이 본산까지 밀고 들어와도.
화산은 사라지지 않는다.
화산의 정신이, 화산이 추구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꽃이 진 매화가 겨울을 견뎌 내고 다시 피어나는 것처럼, 화산은 다시금 세상에 그 이름을 떨칠 것이다.
하지만 자신들의 검을 잃는다면? 자신들이 추구해야 할 것을 잃어버린다면? 자신들의 본의마저 저버린다면?
무너뜨릴 적이 없어도 문파는 스스로 붕괴한다.
지금 이 검은 종남의 정신에 독처럼 스며들어 영원히 그들의 미래를 옭아맬 저주가 될 것이다.
'봐라!'
똑똑히!
너희가 훔치려 했던 것을. 너희가 그토록 원했던 것을.
내가 보여 주지.
이것은 너희에게 영원한 족쇄가 될 것이고, 무도했던 너희에게 주는 더없는 복수가 될 것이다.
청명의 검이 더없이 유려하게 하늘을 누볐다. 그의 검 끝에서 작은 매화의 봉우리가 피어난다.
한 송이. 또 한 송이.
매화는 끊임없이 피어난다.
꽃은 피어나고, 그 생명을 세상으로 뿜어낸다.
무극은 음과 양으로 나뉘어 태극을 이루고, 태극은 이윽고 오행으로 나뉜다. 오행은 세상을 구성하고, 그 세상에서 생명은 태어난다.
흐르리라. 결국 세상이란 영원한 태어남의 반복.
이 개화 속에 먼 화산의 선조가 닿으려 했던 도가 있다.
청명의 시선에 화산의 제자들이 들어온다. 넋을 잃고 화산의 검을 바라보는 그들의 모습이 청명에게 묘한 애수를 불러일으켰다.
'이건 또한 나의 속죄.'
이어 줘야 했으나 이어 주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보아라.
이것이 너희가 잃었던 것.
이것이 언젠가 너희가 도달해야 했던 곳이다.
"아아……."
현종의 입이 탄식을 흘린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는 그도 알지 못했다. 지금 그의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이치를 넘어 마음으로 와 닿는다.
세상에 매화가 만발한다.
아직은 삭막하기만 한 화산에, 아직은 피지 않아야 할 매화가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았던 봄이 있다.
계절이 바뀌어도 오지 않던 봄.
홍안의 소년이 건장한 청년이 되고, 건장한 청년이 책임감에 어깨가 짓눌린 장년이 되고, 결국 그 장년의 머리가 새하얗게 새어 주름 가득한 노인이 될 때까지도 끝끝내 오지 않았던 봄.
그토록 기다리고 갈구했음에도 끝끝내 맞이할 수 없었던 봄이 바로 저기에 있다.
현종의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여기에 있다.
그가 그토록 보고 싶었던 화산이. 평생을 기다리고 또 기다려온 화산의 검이.
바로 이곳에 있었다.
현종의 입가에 미소가 맺힌다.
그의 눈에선 여전히 눈물이 그치지 않았지만, 그 흠뻑 젖은 얼굴로 현종은 더없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화산이여."
우리는 이곳에 있다.
그 모진 세월을 버티고, 또 버텨 낸 끝에 마침내 이곳에서 꽃은 피어난다.
"화산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의 삶을, 그의 인내를, 그리고 그의 기다림을 양분 삼아 바로 이곳에서 백 년 만에 첫 매화가 피어나고 있었다.
사라진다.
진금룡이 만들어 낸 설화가 마치 환상처럼 사라져 간다. 차갑고 매서운 눈의 꽃은 불어오는 훈풍에 밀려나 가고, 그 자리를 따뜻한 봄의 매화가 채워 나간다.
피고. 또 피고.
만산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붉은 매화가 이윽고 진금룡의 시야를 더할 곳 없이 가득 채워 버렸다.
그건 차라리 매화의 바다.
끝이 보이지 않게 피어난 매화의 숲이었다.
'이게……. 이게 화산.'
이게 화산의 검.
종남의 장로들이 그토록 두려워했고, 그만큼 닮으려 했던 화산의 검.
진금룡은 이제야 왜 종남의 윗대들이 그렇게나 화산이라는 이름에 두려움을 보이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 검에는 종남에는 존재하지 않는 그 무언가가 있다.
종남의 검으로는 닿을 수 없는, 화산만의 검이다.
바람이 분다. 그리고 부드러운 바람에 피어난 매화들이 일제히 날리기 시작했다.
온 세상이 매화 꽃잎으로 가득 찬다.
수없이 많은 꽃잎이 일제히 하늘 가득 솟구쳐 오른 광경은 장관이라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었다.
'아름답다.'
진금룡은 넋을 잃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스스로의 상황을 모를 리 없음에도, 진금룡은 눈앞에 흩날리는 매화의 광경에 넋을 놓고 말았다.
인세의 것이 아닌 것 같은 광경. 영혼이 빨려 들어가는 광경이다.
'무엇이 다른가?'
어째서 그는 이 화려함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가?
어째서 그의 검은 이토록 아름답지 않은가?
어째서?
매화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저 부드럽게, 그리고 화려하게, 또한 장엄하게 세상을 뒤덮었을 뿐이다.
그리고.
영원히 잊지 못할 광경을 화인처럼 눈에 담는 진금룡의 이마에 더없이 부드럽게 휘날려온 매화 잎 한 송이가.
조용히.
아주 조용히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