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화산은 사라지지 않는다. (4)
"장로님, 사형은 이기겠지요?"
자신에게로 조심스럽게 향한 질문에, 사마승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질끈 깨문 입술이 찢어지며 피가 한 줄기 주륵 흘러나온다.
"이기겠냐고?"
안일하기 짝이 없는 질문이다.
"무슨 수를 써도 이겨야 한다."
오늘 이곳에서 저 괴물의 날개를 꺾어 버리지 못한다면 저 괴물은 언젠가 기어코 하늘로 비상할 것이다.
한번 하늘로 올라 버린 괴물은 무슨 수를 써도 잡을 수 없다.
그 순간부터 괴물은 괴물에 머무르지 않고 용이 되어 버릴 테니까.
어쩌면 이게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
최악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지만, 사마승은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진금룡이라면 가능할 것이다.'
같은 이대제자이긴 하지만, 진금룡은 다른 이들과는 한 차원 다른 존재다. 진금룡의 실력은 종남의 일대제자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따끔하고 냉정하게 말하기는 했지만, 사실 조금의 운만 따라 준다면 언젠가는 천하제일인이 되어도 이상할 게 없는 자가 바로 진금룡이다.
다시 말하면?
진금룡이 막을 수 없다면, 저 나이 대에서는 천하의 누가 오더라도 청명을 막아 낼 수 없다는 말이 된다. 다시 말해, 지금 이곳에서 청명이 진금룡을 이긴다면 후대의 천하제일인의 자리는 당연히 청명이 꿰찰 거란 뜻이다.
그것만은 용납할 수 없다.
'더 빨리 숨통을 끊었어야 했다.'
체면을 가릴 게 아니었다. 강호의 비난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화산을 완전히 멸문시켰어야 한다. 그 질긴 숨통을 끊지 못한 결과가 이것이다.
'빌어먹을 화산 놈들!'
사마승의 눈에 핏발이 섰다.
절대 오늘 이 자리에서 오욕의 역사가 만들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절대로!
그 순간 진금룡의 검이 환상처럼 세상 가득 꽃을 피워 내기 시작했다. 완벽에 가깝게 펼쳐지는 설화십이식을 보며 사마승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너희의 검이 너희의 숨통을 끊을 것이다!'
청명은 가만히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검을 바라보았다.
'비슷하군.'
겉모습 하나는 정말 끝내주게 베꼈다.
저 화려함.
꽃이 한 송이, 한 송이 살아 숨 쉬는 것 같은 아름다움. 그리고 그 아름다움 속에 숨은 더없이 날카롭고 치명적인 일격.
그야말로 이십사수매화검법.
일전에 이송백이 펼쳤던 설화십이식과는 그 차원을 달리한다. 이송백의 검은 그저 매화를 흉내 낸 것에 불과했다면, 진금룡의 설화십이식은 청명도 감탄할 정도의 정교함을 보여 주고 있었다.
어지간한 이라면 이토록 환상적인 검 앞에 넋을 놓고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진금룡의 앞에 있는 이는 청명이었다.
청명이 날아드는 검을 피해 낸다.
스슷.
진금룡의 검이 그의 옷자락을 잘라 낸다.
스슷.
머리카락 끝이 잘려 나가며 허공으로 휘날린다.
스슷.
이내 진금룡의 검이 청명의 얼굴을 가볍게 스쳐 지나갔다. 붉은 선이 생겨나며 한 방울 피가 얼굴을 타고 흘러내린다.
뒤로 훌쩍 물러난 청명이 손가락을 들어 흘러내리는 피를 닦아 혀로 핥았다. 비릿하다.
"그리 달아나기만 해서는 나를 이길 수 없을 텐데."
진금룡의 도발에 청명은 그저 말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진금룡의 눈에 어느 정도 여유가 돌아왔다.
"한때, 너희 화산은 꽃을 닮은 검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지?"
"……."
"하지만 그건 과거일 뿐이다. 이제 너희의 상징조차 종남의 새로운 검에 묻히겠지. 세상은 종남의 설화십이식을 기억하고 화산의 검을 잊을 것이다."
청명은 대답 없이 묵묵히 그 말을 들었다.
"종남의 선대가 이 검을 창안한 이유는, 그 어떤 형태를 취하더라도 종남의 검이 화산의 검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하더군. 나는 솔직히 그게 그리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다 망해 버린 문파보다 우월함을 증명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단!"
진금룡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화산의 마지막 숨통을 끊는 것이 이 검이 된다는 것은 분명 의미가 있는 일이겠지. 오너라. 내가 너희의 마지막 미련까지 끊어 주겠다."
오만하기 짝이 없는, 하지만 무엇보다 통렬한 일갈이었다.
그런데 이 말을 모두 들은 청명의 반응은 진금룡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끅."
"……?"
청명이 입가를 틀어막았다. 그러더니 이내 경련하듯 웃기 시작했다.
"……뭐 하는 짓이더냐."
끅끅대며 웃음을 참던 청명이 잠시 후에야 고개를 숙인 채 손을 내젓는다.
"아니, 아니.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더는 참을 수가 없어서요."
청명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그리고 검을 들어 진금룡을 정확하게 겨눈다.
"잘 봤어요. 감상은 음……. 뭐랄까. 광대 같네요."
"광대?"
"네. 어설픈 흉내 잘 봤어요. 그 정도면 어디 가서 공연해도 되겠네요."
진금룡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미간이며 이마에 온통 주름이 패인 채, 그는 이를 갈아붙였다.
"감히…… 내 검을 광대놀음에 비교해?"
"아, 오해는 안 했으면 좋겠네요. 딱히 그쪽을 무시한 건 아니에요. 제가 무시한 건 오히려 음…… 그 검술? 아니면 그 검술을 만들어 낸 종남?"
진금룡은 무시무시한 얼굴로 청명을 노려보았다. 그럼에도 청명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태연하게 말했다.
"그런 얼굴로 노려볼 것 없어요. 나는 선물을 줄 거라니까요. 그 검에 비어 있는 것을 내가 채워 드리죠."
"……그 몸 멀쩡히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아까부터 살초만 쓰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진금룡이 흠칫한다.
설화십이식은 더없이 화려하다. 그렇기에 상대하는 이조차도 그 검 안에 숨어 있는 실과 허를 제대로 구분할 수 없다. 그러니 살초와 허초도 구분할 수 없었을 텐데?
진금룡이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아무래도 좋다. 어차피 청명은 이 비무장에서 살아 돌아가지 못한다. 그리고 화산은 감히 그 대가를 진금룡에게 묻지 못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종남 전체를 상대해야 할 테니까.
결국 강호를 지배하는 것은 힘.
약자는 억울함을 호소할 수는 있을지언정, 강자를 벌할 수 없다. 그건 강호가 생겨난 이래 지금까지 바뀌지 않는 절대적인 법칙이다.
"너는……."
하지만 청명은 야멸차게 진금룡의 말을 잘라 버린다.
"하나 묻겠는데."
청명답지 않게 잔뜩 가라앉은 어조였다.
"그 검 안에는 대체 뭐가 담겨 있죠?"
"……그게 무슨 말이냐."
"아뇨. 그걸로 됐어요."
청명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살짝 올라오려는 본심을 꾹 내리누른 청명은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모두가 들으라는 듯 크디큰 목소리로 말이다.
"제법 잘 따라했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죠. 화산의 검은 더 빠르고, 더 날카롭고, 더 화려하니까요."
지금 이 말을 모두가 들었겠지.
그걸로 됐다.
이걸로…….
종남은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입은 살았구나."
"입만 죽이는 법이 있으면 좀 알려 주시죠. 그리고 아까부터 말은 그쪽이 더 많이 한 것 같은데?"
"이……."
진금룡이 더는 말을 섞어 봐야 소용없다는 듯 검을 움직였다. 말이 아니라 검으로 보여 주겠다는 뜻.
한 송이.
또 한 송이.
그의 검이 더없이 화려하고 빠르게 세상을 누빈다. 검에서 뿜어져 나온 진기가 더없이 선명한 꽃의 문양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다.
한 송이.
그리고 또 다른 한 송이.
이윽고 진금룡이 만들어 낸 꽃이 비무장을 가득 뒤덮기 시작했다.
더없이 아름답지만, 더없이 위험한.
'너는 이 검에 죽는다!'
설화십이식.
펼쳐 낸 진금룡마저 만족스러울 정도로 완벽한 설화만천(雪花滿天)의 초식이었다.
세상을 새하얗게 물들인 꽃송이가 금방이라도 청명의 육체를 갈기갈기 찢어 버릴 것처럼 그의 주변을 감싸기 시작한다.
"처, 청명아!"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온다.
지금까지 홀린 듯이 비무장을 바라보고 있던 화산의 제자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들도 아는 것이다.
저 검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리고 얼마나 굉장한지.
딱히 경지를 느낄 필요도 없다. 그저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전신에 소름이 돋고 심장이 쿵쾅거린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들에게 불안감을 주지 않은 청명이지만, 저 말도 안 되는 검의 변화 속에서는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다.
윤종은 저도 모르게 가슴 앞에 양손을 모았다.
'천존이시여!'
저 괴물 같은 청명 놈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진금룡의 검은 날카롭고 매서웠다. 세상 그 누구도 감히 저 설화(雪花)의 폭풍 속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이대제자와 백천마저도 비명을 지르며 청명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오직 하나.
유이설만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을 뿐, 큰 동요 없이 그 광경을 바라본다. 다만 한 줄기 의문이 그녀의 눈동자를 스친다.
'저건……?'
어디선가 본 듯한 광경. 어쩌면 익숙하다고 말할 수 있는 광경이다. 과거에 보았고 얼마 전에도 보았다. 하지만…….
'달라.'
뭔가 다르다.
저 검은 그녀가 알고 있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하지만 청명의 검을 보았을 때와 같은 영혼이 빨려 들어가는 듯한 감흥을 주지는 못한다.
무엇이 다른 걸까?
그녀의 시선이 청명에게로 향했다.
무엇이 다른지는 바로 저 아이가 알려 줄 것이다.
바로 저 검으로.
청명은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꽃송이들의 물결을 보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또 색다른 경험이군.'
사형제들과 비무를 하던 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사형제를 상대로 진짜 살기를 느껴 볼 일은 잘 없으니까.
'이십사수매화검법을 상대하던 마교 놈들이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조금 다르긴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청명은 지금 그에게 날아드는 검에서 아무런 위협도, 어떠한 압박도 느끼지 못했다.
왜냐?
'이건 그냥 껍데기니까.'
정확하게는 실패한 검법이다.
검은 술(術)에서 시작하여 법(法)에 이르고, 예(例)에 올라 학(學)에 도달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더 나아간 검은 마침내 도(道)를 완성하는 법이다.
하지만 이 검에는 그 어떤 것도 담겨 있지 않다.
이 껍데기뿐인 검에는 술과 법은 존재하지만 예와 학은 없다. 이래서는 절대로 도에 이를 수 없다.
눈앞의 이 검은, 그저 화산의 검술의 껍데기를 베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알맹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껍데기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길고 긴 오해에서 시작된 것이다.
'매화검법이 꽃을 피워 내는 검이라고?'
그건 두 가지 면에서 틀렸다.
첫째로.
청명의 검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화산의 제자들은 청명이 펼친 검이 칠매검의 기수식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칠매검?'
칠매검이 화산이 되찾은 위대한 검이라는 것은 그들 모두 안다.
하지만 저 종남의 정체불명의 검을 상대하기에 칠매검은 너무도 나약해 보였다.
그때 청명이 혼잣말하듯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매화검법만 꽃을 피워 낼 수 있는 건 아니지."
꽃이란 울창한 숲에서만 피어나는 게 아니다.
깎아지른 절벽에 외로이 홀로 선 한그루의 매화에서도 꽃은 피어나는 법.
매화검법이든, 칠매검이든, 검을 잡은 이가 화산의 제자라면 검법 같은 것은 상관없다.
그저…….
이윽고 청명의 검 끝에서 소담스러운 꽃 한 송이가 피어났다.
세상을 하얗게 물들여 버릴 것 같은 설화십이식의 새하얀 검기들 속에서 붉은 꽃 한 송이가 피어난다.
그건 마치 긴긴 겨울 눈 덮인 산속에서 피어나는 한 송이의 설매(雪梅)처럼 보였다.
설매화는 모든 꽃이 진 겨울에 홀로 피어나지만, 그 어떤 꽃보다 짙은 향을 풍기는 법.
청명이 피워 낸 한 송이의 매화는 점차 불어나더니 이내 눈 덮인 화산의 봉우리에 피어나는 설매화처럼 비무장 전체를 붉은 매화의 형상으로 뒤덮어 버렸다.
지켜보는 이들 모두가 넋을 잃었다.
검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아름다웠고, 인간이 만들어 낸 광경이라기에는 너무도 장엄했다.
'이건 환상이다.'
시간이 정지한다.
그리고 멈춰 버린 시간 속에서 오롯이 피어난 매화만이 절로 눈이 감길 만큼 짙은 향을 흘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