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화산은 사라지지 않는다. (3)
현종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은 비무장에서 단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았다.
쓰러진 이송백을 응시하던 현종의 시선이 느릿하게 청명에게로 옮겨 간다.
구 연승.
아홉 번의 승리를 거둔 청명은 이제 마지막 상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로들과 일대제자들이 모인 곳은 온통 숨 막히는 정적으로 가득했다. 그 누구도 먼저 입을 열어 이 분위기를 깨려 들지 않는다.
청명에 대한 의문?
이 상황에 대한 의혹?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나중에라도 얼마든지 알아볼 수 있다.
다만 지금 중요한 것은 저 청명이 종남을 상대로 완전무결한 승리를 이루기 직전이라는 사실 그 자체.
'화산의 역사상 이런 일이 있었던가?'
화산과 종남은 언제나 서로를 경계해 왔다. 장문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배제하고서라도, 이 두 문파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화산은 주로 종남에게 한발 앞서 있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지금은 전세가 뒤집혔지만, 역사를 볼 때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처럼 화산이 공식적으로 종남을 완전히 뭉개 버린 사건은 그가 아는 한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매화검존 시절, 청명 때문에 종남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고는 하지만 이는 그저 위상의 문제였다. 지금처럼 세간에 회자될 만큼 큰 공식적인 '사건'이 벌어진 적은 그때도 없었다.
다른 시기도 아니고 화산의 암흑기로 칭해야 할 이 고난의 시절에,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던 사건이 벌어지는 중이다. 눈을 뗄 수 있을 리 없다.
현종은 종남의 진영을 응시하는 청명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당당하다.
현종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상황보다 저 청명의 당당한 태도에 더욱 큰 감명을 받는 중이었다.
대체 언제였던가.
화산의 문하가 종남 앞에서 저리 당당할 수 있었던 게.
동등한 검문으로서 어깨를 펼 수 있었던 게?
'선조시여.'
자꾸 눈가가 시큰해진다. 화산의 장문으로 절대 보여서는 안 될 모습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연신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이 격정을 어찌할 도리가 없다.
"장문인……."
"아무 말 말게."
현상의 말에 현종은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은 그저 지켜보자꾸나. 저 아이가 또 무엇을 보여 줄지 말이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청명의 일거수일투족에 시선을 집중했다.
'어쩌면 오늘…….'
현종의 눈에 지금까지 없었던 빛이 떠올랐다.
'화산의 운명이 바뀔지도 모르겠구나.'
낯설다.
그에게 와 닿는 시선.
발끝이 바닥을 누르는 느낌.
손에 와 닿는 목검의 감촉.
그 모든 것이 평소와는 달랐다.
진금룡은 이제껏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부담을 느끼며 비무대로 향했다.
'이상하군.'
진금룡은 새삼 의문을 느꼈다.
평소 그에게로 쏟아지던 시선은 이런 게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주변의 기대에 찬 시선을 한 몸에 받던 사람이다.
그래.
그는 '해결'하는 사람이지, '우려'를 받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담겼던 감정은 언제나 기대와 자랑스러움이었다. 이런 불안이 담긴 시선을 받는 것은 결단코 처음이다.
어째서일까?
왜 저들은 지금 자신에게 저런 시선을 보내는 걸까?
진금룡이 고개를 들었다.
조금 심드렁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는 청명의 모습이 보인다.
'그래. 저놈 때문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마땅히 분노해야 할 일이다.
진금룡은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평생을 노력해 왔다.
평생을 노력해 그 가능성을 인정받았고, 평생을 노력해 그 실력을 증명해 보였다. 그리하여 모두가 입을 모아 그를 칭송하였다. 언젠가는 종남의 장문인이 될 사람으로, 그리고 이제껏 없었던 종남의 전성기를 열어젖힐 이로.
평생에 걸쳐서 얻어낸 인정과 기대였다.
하지만 고작 반나절도 되지 않는 시간 만에 그 모든 것들이 우려와 걱정으로 바뀌었다.
'내가 그토록 못 미덥다는 말인가?'
몰락한 문파의, 그것도 한 배분이나 차이 나는 아이 하나를 감당하지 못할까 봐 우려의 시선을 받을 정도로?
차갑고 묵직한 분노가 진금룡의 전신을 휩쓸었다. 그는 살기등등한 눈으로 청명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 오만한 얼굴도, 태연자약한 여유도, 그리고 언뜻언뜻 비치는 날카로움도.
그 무엇보다 진금룡을 앞에 두고도 그저 다른 종남의 제자를 보는 듯 심드렁한 태도가 특히 거슬린다.
진금룡이 깊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감정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칭찬이라도 해야 할까?"
"딱히 그럴 필요까지야."
청명이 어깨를 으쓱한다.
"뭐 대단한 일 한 것도 아니고 말이죠."
"……."
진금룡은 차가운 눈으로 눈앞의 건방진 어린아이를 바라본다.
"감히 종남을 무시하는 건가."
"무시라."
청명이 피식 웃는다.
"무시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죠. 나보다 약한 애들을 쓰러뜨리는 걸 자랑스러워할 이유는 없으니까."
거슬린다.
저 태도 하나하나가.
"너는 겸……."
뭔가 말을 하려던 진금룡은 잠깐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살짝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네게 겸손이란 필요하지 않은 일이겠지. 과례는 비례라고, 네가 떠는 겸손은 오히려 듣는 이를 화나게 할 테니까."
"흠?"
"인정하마. 너는 오만할 자격이 있다. 대종남의 이대제자 아홉을 꺾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는 다시없을 천재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청명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스르륵.
진금룡이 허리춤에서 목검을 뽑아 들고는 천천히 청명을 겨누었다.
"너의 불행이 무엇인지 아느냐?"
"글쎄요?"
"나와 같은 시대에 태어난 것이다."
청명이 미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진금룡이 가만히 청명을 노려보며 말을 이어 간다.
"그 불행의 대가로 너는 평생 나와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채, 나의 등만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청명이 피식 웃었다.
"자신감은 좋네요."
"내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진금룡이 싸늘하게 일갈했다.
"혹여 네가 화산을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그 불행을 극복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네가 화산이 아닌 종남을 선택했다면 언젠가는 나를 뛰어넘을 가능성이라도 있었을 테니."
"그래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뻔한 일."
진금룡이 호흡을 가다듬고는 말을 이었다.
"화산은 여전히 과거에 묶여 있다. 그 문하들은 오직 과거의 무학을 되찾고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려 할 뿐이지. 하지만 종남은 아니다. 우리는 나아간다. 과거 따위에 미련을 두지 않고 말이다. 더 나은 무학을 창안하고, 더 나은 체계를 만들어, 더 나은 미래를 쟁취할 것이다."
진금룡이 선언하듯 말했다.
"이게 너희 화산이 다시는 종남을 따라잡을 수 없는 이유다."
"크으."
청명이 감탄을 터뜨렸다.
심정 같아서는 박수라도 쳐 주고 싶다. 만약 저 말을 종남이 아닌 다른 문파가 했다면 사형제들의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저거 좀 보고 배워라, 이 한심한 것들아!'
하고 외쳤을지도 모른다.
저 진금룡이 말하는 미래라는 게, 화산의 무학을 도둑질해 만든 게 아니었다면 말이다.
'말해 뭐 하겠어?'
진실을 만드는 데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사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 사실을 관철하는 힘이다.
종남이 매화검법을 도둑질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청명은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을 만큼 분노했다.
하지만 분노한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현실적으로 화산이 종남을 징벌할 방법 같은 건 없다.
공개적으로 그 문제를 거론해 봤자, 그럼 매화검법을 펼쳐 그 사실을 증명해 보라는 소리만 들을 뿐이다. 설사 실전된 매화검법을 복원해 펼쳐 보인다고 하더라도 되레 종남에서는 화산이 설화십이검을 베꼈다고 주장하며 오히려 공격해 올 것이다.
그리고 화산은 그 공격에 그저 당할 수밖에 없다.
왜?
힘이 없으니까.
무학이란 민감한 요소다. 독문 무공을 유출한 이들은 오로지 목숨으로만 그 대가를 치르고, 상대의 독문무공을 훔친 이들은 모든 것을 건 전쟁을 각오해야 한다.
하지만 화산은 종남을 벌할 수 없다. 설화십이검의 문제를 제기하는 순간 종남을 옳다구나 화산에 전쟁을 걸어올 것이고, 천하의 누구도 화산을 돕지 않을 것이다.
망해 가는 문파를 옹호하기 위해 구파일방과 척을 질 이들은 강호 어디에도 없다. 강호가 얼마나 차갑고 냉정한 곳인지 청명만큼 뼈저리게 실감한 이가 누가 있던가?
그렇기에 지금까지 참았다.
이 순간까지!
끓어오르는 분노를 꾹꾹 억누르며, 당장이라도 종남으로 달려가 모조리 쳐 죽이고 싶은 마음을 이 악물고 버텨 냈다.
바로 이 순간 하나를 위해서 말이다.
청명이 섬뜩한 미소를 입가에 피워 냈다.
"종남의 미래라. 좋은 말이네요."
청명이 진금룡을 보며 가만히 웃었다.
그래. 종남의 미래. 나도 많이 생각했지.
대체 그 미래를 어찌해야 할지 말이다.
조금 전 청명은 종남에 단 하나의 씨앗을 남겼다. 그 씨앗이 과연 발아할지 아닐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으로 인간적인 도리는 다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부터, 화산의 삼대제자 청명은 없다.
지금부터 그가 하는 일은 화산의 삼대제자 청명이 아닌, 매화검존 청명으로서의 과업이 될 것이다.
은혜를 원수로 갚은 저 더러운 이들에 대한.
"그 미래에……."
청명이 검을 들어 진금룡을 겨누었다.
"선물을 하나 드리죠."
"……선물?"
"네. 평생 동안 잊지 못할 선물이 될 테니, 잘 봐 두는 게 좋을 거예요."
진금룡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바라보았다. 하지만 청명은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제대로 된 선물이 되겠지.'
다른 이름으로는 저주가 되겠지만.
화산을 키워 지금의 종남을 부수는 것 정도로는 분이 풀리지 않는다. 지금 청명이 하려는 것은 종남의 미래를 영원히 끊어 버리는 것이었다.
'화산의 검이 탐났다고?'
청명이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사냥감을 앞에 둔 늑대처럼 말이다.
"그럼 제대로 가져가 보시지."
절대 잊을 수 없도록 제대로 보여 줄 테니 말이야.
청명이 검을 잡은 손을 꽉 움켜잡았다.
"비켜 봐라!"
"사숙?"
"백천 사형!"
숨도 쉬지 못하고 청명과 진금룡을 바라보던 화산의 제자들이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좌우로 물러났다.
열린 길을 따라 백천이 비틀거리며 걸어온다.
"사, 사형! 몸은 괜찮으십니까?"
쏟아지는 질문에 백천은 그저 손만 대충 내젓고는 앞으로 나간다. 그 휘청이는 걸음을 본 백상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의자! 빨리 의자를 가져와라!"
"예, 사숙!"
삼대제자 중 하나가 서둘러 의자를 가져와 백천의 자리를 만들었다. 하지만 백천은 의자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비무장의 청명과 진금룡을 바라보았다.
'나는 이걸 봐야 한다.'
눈을 뜨자마자 청명이 구 연승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말을 듣고도 얌전히 침상에 누워 있는 건 백자 배의 대제자가 할 짓이 아니다.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곳에서 청명을 응원해야 한다.
진금룡.
그리고 청명.
그에게는 남다른 의미를 가진 이들이 지금 서로를 마주 보고 있다.
'이겨라. 청명아.'
백천의 눈에 간절함이 어리는 순간.
스슷.
스으읏.
낮은 파공음과 함께 청명과 진금룡의 검이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한다.
결론이 어떻게 나든 이 승부는 섬서를 울릴 것이고, 천하를 울릴 것이다. 그 역사적인 광경을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화산의 제자들이 두 눈을 부릅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