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화산은 사라지지 않는다. (2)
털썩.
또 하나가 쓰러진다.
종남의 제자들의 얼굴은 이제 거의 사색이 되어 있었다.
'여섯.'
여섯이 쓰러졌다.
도합 여섯!
저 삼대제자 하나에게 종남의 이대제자가 여섯이나 쓰러져 버린 것이다. 심지어 단 한 번의 검도 격중시키지 못한 일방적인 패배였다.
하지만 지금 종남의 제자들을 두렵게 만든 것은 패배가 아니었다.
이 승부가 끝나는 순간까지 단 한 번의 승리도 거두지 못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그들을 정말 두렵게 만들었다.
'전멸한다고? 단 한 명의 삼대제자에게?'
손끝이 저려 온다.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눈앞이 깜깜해지고 다리에 힘이 빠진다.
이게 얼마나 커다란 불명예인지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천에 하나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그 소식은 말보다 빨리 천하로 퍼져 나갈 것이다.
화산에게는 더없이 영광스러운 실적으로.
그리고 종남에게는 수대가 흘러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더없는 치욕으로!
그 말도 안 되는 치욕의 역사가 지금 이곳에서, 다른 이들도 아닌 자신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다. 이를 깨달은 종남의 제자들은 중압감을 넘어 공포까지 느꼈다.
"다음!"
그리고 그들의 귀에 가장 공포스러운, 무정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젠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그들도 바보가 아니다. 한두 번은 요행으로 이길 수 있다. 하지만 여섯 번 연달아 이기는 것은 우연일 수 없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저 화산의 삼대제자 청명은 그들보다 강하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나서서 패배하는 건 더 이상 두렵지 않다. 하지만 자신이 나서서 패배함으로써 종남의 전멸이 한층 더 완성된다는 것은 그 무엇으로도 비견할 수 없는 부담이자 공포였다.
"누, 누가 나가 봐."
"나, 나는 못 해. 나는 못 이겨……."
"사, 사형. 사형이 나서야 하지 않습니까?"
"내가 뭘 어쩌라는 말이냐. 나는……."
그 순간이었다.
"한심하기 짝이 없구나."
진금룡이 더없이 싸늘한 목소리로 일갈한다.
"대 종남의 제자라는 놈들이 저보다 열 살은 어린 아이에게 겁을 집어먹는다고? 모두 수치를 아예 잊은 모양이군."
모두가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다.
진금룡이 앞으로 한 발 나섰다.
"내가 나간다."
"사, 사형!"
"저 오만방자한 놈을 더는 지켜볼 수 없다. 그러니 너희는 내가 종남의 명예를 되찾아 오는 것을 여기서 지켜봐라. 더 찾아올 명예가 남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진금룡이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비무장으로 향하려는 순간이었다.
"멈춰라."
"……."
진금룡이 돌아보니 사마승이 철갑이라도 씌운 것처럼 딱딱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마승은 시선을 둔 채 다른 이를 호명했다.
"만적."
"……예, 장로님."
"네가 나가라."
"……저, 저는……."
사마승은 변명 따위 듣지 않겠다는 듯 싸늘하게 말을 잘랐다.
"나가서 발목이라도 잡고 늘어져라.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예."
진금룡이 뭔가 입을 떼려 했지만 사마승은 눈빛으로 그를 짓눌렀다.
"이리 따라오거라."
"하나, 비무가 아직……."
"됐으니 이리로!"
사마승이 진금룡을 끌고 뒤쪽으로 향한다. 서로 목소리를 낮추면 누구도 듣지 못할 곳까지 이동한 뒤에야 사마승은 고개를 돌려 비무대를 바라보았다.
"다른 아이들이 이길 수 있을 거라 보느냐?"
진금룡은 대답하지 못했다.
뻔히 답이 나온 문제다. 하지만 그 말을 쉽사리 입에 올리지 못하는 것은 사제들에게 미안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런 대답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납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종남의 이대제자들의 실력은 세상 어디 내놔도 아쉬울 게 없다.
그런 사제들이건만, 청명을 상대로는 도무지 승산이 보이지 않는다.
혼란스러워하는 진금룡에게 사마승이 씹어뱉듯 말했다.
"네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예?"
"저건 숫제 괴물이다. 아니, 아직은 괴물의 새끼라고 해야겠지. 하지만 저놈을 내버려 두면 언젠가는 진짜 괴물이 되어 버릴 것이다."
"……장로님?"
"그리고 그 괴물은 다시 우리 종남의 앞길을 가로막겠지. 이게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진금룡의 눈이 흔들렸다.
'그렇게나?'
청명이 그 나이에 비해서 말도 안 될 정도로 강하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저 청명이 종남의 방해물이 된다고?
진금룡이 이를 악 물었다.
청명이 종남의 방해물이 된다는 말은 같은 시대를 살아가야 할 진금룡이 그를 감당하지 못할 거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적어도 사마승은 그렇게 생각하는 게 분명하다.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다.
'이 진금룡이 겨우 저런 아이 하나 감당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는 말인가?'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모욕적인 말이었다.
진금룡의 표정에 감추지 못한 분노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사마승이 그런 그를 가만히 보며 말한다.
"금룡아, 너는 천재다."
"……."
"하지만 이 강호에 천재라 불리는 이들이 몇이나 될 것 같으냐? 내 입으로 하고 싶지는 않은 말이지만, 이 천하에 너 정도의 재능을 가진 이는 네 세대에만 해도 열은 넘을 것이다.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지."
진금룡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 반응을 본 사마승이 싸늘하게 묻는다.
"너는 네가 훗날 천하제일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자신감 하나만은 천하제일이라 할 수 있는 진금룡이지만 감히 이 질문에는 쉬이 대답을 할 수가 없다.
천하제일인이라는 말은 그만큼 무거운 말이다.
진금룡이 대답을 망설이자 사마승이 눈을 가늘게 뜬다.
"수재. 천재. 그래, 그걸로 됐다. 이 종남의 정신을 잇고, 종남의 전성기를 만드는 것은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하나!"
지금부터가 사마승이 진짜 하고 싶었던 본론이다.
"천하제일인이 되는 건 그런 것만으로는 불가능하다."
"……."
"천하제일인을 두고 다투는 이들은 천재가 아닌 괴물들이다. 그런 세계이니라. 상식을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하고, 법칙을 힘으로 짓누르고, 순리마저 가진 재능으로 거스르는 이들만이 그곳에서 싸울 수 있다. 그래……."
사마승의 고개가 천천히 비무장으로 향한다.
"저런 괴물 말이다."
진금룡의 어깨가 떨렸다.
"장로님, 저는……!"
울컥하여 반발하려는 진금룡을 사마승의 냉정한 목소리가 제압한다.
"하나."
사마승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아무리 괴물이라 해도 지금은 그저 새끼일 뿐이다. 범이라 한들 새끼일 때는 개에 물려 죽는 법이지."
그 말의 의미를 깨달은 진금룡이 놀란 눈으로 사마승을 바라보았다. 그 놀람이 잘못되지 않았단 걸 증명이라도 하는 듯, 아주 작고 섬뜩한 목소리가 진금룡의 귀를 파고들었다.
"죽여라."
"자, 장로님."
사마승은 숫제 귀신 같은 얼굴로 속삭였다.
"아직은 가능하다. 저놈은 괴물이지만, 아직은 네가 상대할 수 있다. 그러니 지금 죽여야 한다. 지금 죽이지 못한다면 너는 평생이 가도 저놈을 죽일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다."
"……."
"잊지 마라. 재능을 가진 이가 천하제일이 되는 게 아니다. 천재니 신동이니 불리던 것들 중, 진짜 천하제일이 되는 이들은 오직 하나뿐이다. 재능 따위야 만개하기 전에 꺾어 버리면 그만. 죽여라, 금룡아. 지금 죽여야 한다! 죽이지 못한다면 팔이라도 잘라 버려라!"
진금룡이 자신도 모르게 뒤로 주춤 물러났다.
'제정신이 아니다.'
비단 그가 내뱉은 말 때문만이 아니었다. 사마승의 눈에는 소름 끼칠 만큼 광기가 번들거린다. 누가 봐도 지금의 그는 정상이 아니었다.
"장로님, 이성적으로……."
"이성?"
사마승이 허, 하며 웃음을 흘린다. 그리고 자신은 온전히 제정신이라는 듯 이를 갈았다.
"너는 평생을 저놈의 그늘에 가려 살아갈 셈이냐?"
진금룡이 입을 다물었다.
그늘에 가린다? 저 아이의?
진금룡이 주먹을 움켜쥔다. 얼마나 꽉 쥐었는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간다.
정말이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참아 내기 힘들 만큼 굴욕적이었다.
"선택은 네가 하는 것이다."
사마승이 으르렁대듯 말했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지마. 너는 그저 실수한 것이다. 비무 중에 실수야 흔하게 나오는 일이지. 그렇지 않더냐?"
이글거리는 눈으로 사마승을 바라보던 진금룡이 조금 시간이 흐른 뒤에야 입을 연다.
"먼저 확실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저런 녀석에게 가려질 만큼 하찮은 이가 아닙니다."
부정적인 말이 나왔음에도 사마승은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가 아는 진금룡이라면 여기에서 말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하나."
역시나 진금룡은 싸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 아이의 존재가 종남의 영화에 방해가 된다면, 굳이 수단과 방법을 가릴 필요는 없겠지요."
사마승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피어났다.
"옳은 말이다."
털썩.
또 하나가 쓰러진다.
이것으로 여덟.
청명이 검을 휙 내리고는 오만한 자세로 종남을 바라보았다.
남은 것은 이제 둘. 그의 눈에 절망 가득한 종남 제자들의 얼굴이 들어온다.
'아직 아니야.'
아직 절망하기는 이르다. 청명이 진짜로 준비한 것은 따로 있으니까.
"십 승 채우기가 쉽지 않겠는데?"
마지막으로야 당연히 진금룡이 나오겠지만, 그 앞의 하나를 채우기가 어렵다. 저리 다들 겁을 집어먹어서야 누가 나서겠는가?
'아쉽지만 구 연승으로 대충 만족을 해야 하나?'
그때였다.
저벅저벅.
한 사람이 말없이 천천히 비무대로 걸어 나온다. 나오는 이의 얼굴을 확인한 청명이 두 눈에 이채를 띠었다.
"굳이?"
그 짧은 말에 다가오던 이가 겸연쩍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직 제가 소도장과 승부를 겨루기에는 이르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다만…… 사문이 수치를 겪는데 뒤에서 지켜보기만 하는 것도 성미는 아닌지라."
"흐음."
청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남자라면 그럴 만하지.
이송백.
이미 은하상단에서 한 번의 인연을 겪은 이송백이 청명과 마주 선다.
"종남의 이대제자 이송백이 화산의 제자 청명 도장께 비무를 청하오."
"화산의 삼대제자 청명이 비무를 받아들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 검을 마주하고 섰다.
'어찌할까?'
청명이 가만히 이송백을 바라보았다. 종남 출신인데도 이상하게 미워지지 않는 이였다. 그렇다면…….
청명은 고민 끝에 살짝 검을 내렸다. 그리고 슬쩍 눈을 반개한다.
'보여 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받아 내고 극복한다면 약이 될 것이고, 극복하지 못한다면 독이 되겠지. 모든 것은 그저 이송백에게 달린 것이다.
"타아아아아앗!"
이송백이 기합을 지르며 청명에게 달려든다.
그에 따라 청명의 검 역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이송백이 올라야 하는 경지. 그리고 과거의 종남이 추구하던 경지. 지금의 청명은 겨우 초입밖에 보여 줄 순 없지만…….
지금의 이송백에게는 그로도 충분하다.
청명의 검 끝이 정확하게 이송백을 겨눈다.
그리고 그 순간.
청명을 향해 달려들던 이송백이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부릅떴다.
'거, 검이!'
청명의 전신이 검 끝에 가려진다. 아니. 그를 겨누고 있는 검이 더없이 커져 청명의 전신을 가려 버렸다.
'아, 아니 그것도 아니다!'
보이지 않는다.
느껴지지도 않는다.
눈으로 보고 기감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그저 자신을 겨누고 있는 검 한 자루뿐이었다.
'서, 설마 신검합일(身劍合一)?'
그의 머리가 채 해석을 내어놓기도 전에 거대한 충격이 이송백의 전신을 휩쓸었다.
콰앙!
피를 뿌리며 뒤로 나가떨어지며, 그는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보았…….'
털썩!
이송백마저 바닥에 쓰러진다.
구 연패.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청명이 고개를 돌려 종남의 제자들을 바라본다. 아니,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정확히 그중의 한 명이다.
"나와."
진금룡.
이제 죗값을 치를 시간이다. 종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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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비가입니다.
최근 연재와 관련된 몇 가지에 대해 언급해야 할 것 같아 이렇게 글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웹상에 작가의 흔적을 남기는 건 작품 감상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여 최대한 언급을 자제하려 했지만, 아무래도 몇 마디를 남겨야 할 것 같아 이리 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 부분 먼저 사과드립니다.
화산귀환을 즐겁게 봐 주시는 독자 여러분들께 먼저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남겨 주시는 댓글이 연재에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본론으로 들어가 화산귀환 최근 연재분에 대해 독자 분들이 주시는 피드백은 확실히 이해했습니다. 이 몇 가지 사안에 대해 입장을 밝히고 몇 가지는 변명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첫째로, 저는 웹 연재를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분량을 속인 적이 없습니다. 이 부분은 제 작가로서의 양심을 걸고 말씀드립니다.
현재 화산귀환은 어느 플랫폼에 올라가도 규정을 준수할 수 있는 분량으로 편당 제작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분량은 개행을 위해 엔터를 친다고 늘어나지 않습니다.
페이지 수는 개행에 따라 변동되지만 글자 수는 변동이 되지 않습니다.
화산귀환의 분량은 모든 화가 최소 5000자 이상으로 제작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속도감 있게 쭉 읽을 수 있는 스타일을 고수하려다 보니 이런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개행을 자제하는 것은 제가 지금까지 글을 써 온 스타일과는 맞지 않을 것 같으니 독자님들께서 만족하실 수 있도록 분량을 조금 더 확보하고자 노력해 보겠습니다.
둘째로, 최근 이어지는 에피소드가 과하게 길다는 피드백은 확실히 받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전개상 힘을 줘야 하는 단계라고 생각해 조금 길어진 측면이 있는데, 이 부분은 확실히 피드백 하고 빠르게 마무리할 수 있도록 애쓰겠습니다.
셋째로, 연참의 문제는 저도 최대한은 노력하고 있습니다. 추가 분량이 생기는 대로 바로바로 밀어 넣고는 있습니다만 워낙 신경을 쓰고 있는 작품이라 속도가 잘 나지 않아서 문제네요.
이 부분은 작가인 저의 역량 문제이니 독자 분들의 많은 양해 바랍니다. 더 많이 연재할 수 있도록 애쓰겠습니다.
넷째로 과거 연재되었던 작품들이 후반부에 크게 늘어졌다는 것은 저도 인식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이번 작품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신경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봐 주신 독자님들께서 완결의 순간까지 실망하지 않고 보실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딱히 댓글이나 글 말미에 작가의 입장을 남기지는 않지만, 여러분들이 남겨 주시는 댓글은 모두 확인하고 있고, 또 최대한 피드백 할 수 있도록 노력 중입니다.
더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항상 노력하겠습니다.
독자제현의 건승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