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영원히 잊지 못할 날을 만들어 주지. (5)
모두의 시선이 청명에게 집중되었다.
청명이 선봉으로 나온 것은 이곳의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무학에 조금이나마 조예가 있는 사람이라면……. 아니, 무학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도 청명이 삼대제자 중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으니까.
유리한 싸움이라면 모를까 불리한 싸움일 때는 최고의 패를 마지막까지 남겨 두는 게 기본이다. 특히나 연승전과 같은 승부의 형태일 때는 말이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저 종남의 이대제자와 정면으로 맞붙겠다는 건가?'
청명이 어떤 기책을 보여 줄지 기대했던 이들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청명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당황하고 말았다.
현종과 운검이 그러했으며, 황문약이 그랬고, 윤종 역시 그러했다.
"사, 사형. 지금이라도 말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제가 선봉으로 나가겠습니다. 그럼……."
"나라고 그게 최선이라는 걸 모르는 게 아니잖으냐."
삼대제자 중 하나가 다가와 하는 말에 윤종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저놈이 직접 나가겠다는데 누가 말리겠느냐."
모두의 우려가 청명의 등 뒤로 향한다. 하지만 청명은 말없이 종남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검제(劍帝)가 열다섯에 팽가 오호도를 꺾어서 천하제일 후기지수 소리를 들었던가?'
아마 그랬던 것 같다. 청명과 같은 시기의 사람이 아닌, 이전 시대의 사람임에도 청명은 그 이야기를 몇 번이고 들었다.
'목불(木佛)은 열여덟에 나한진을 오관(五館)까지 뚫었다고 했었지.'
그 역시 천하에 울려 퍼진 이야기다.
그 외에도 이런 예는 수도 없다.
어릴 적부터 천하에 이름을 날린 당대의 고수들은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회자되는 일화 하나씩은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왜냐고? 일화가 없으면 회자가 안 되니까.
강호는 강한 자를 알아서 찾아내어 칭송해 주는 곳이 아니다. 강함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걸맞은 상대를 통해 그 능력을 보여 주어야 하는 곳이다.
문파 역시 마찬가지다.
화산이 아무리 강해진다고 한들 그 사실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아무도 그 변화를 알아주지 않는다. 이 험준한 산속에서 두 배 더 강해지든 열 배 더 강해지든, 그건 그저 화산만의 변화일 뿐이다.
그 변화를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끼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강호가 화산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한다. 그게 땅에 떨어져 버린 화산의 명성을 되찾아 오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그리고 오늘.
청명은 화산의 이름을 널리 퍼뜨릴 전설을 하나 만들어 버릴 작정이었다.
'문파의 이름을 날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 두 가지 있지.'
하나는 무시 못 할 업적을 쌓는 일.
그리고 다른 하나는 문도의 강함을 증명하는 일이다.
천하제일인? 물론 좋다.
천하제일검? 그것도 좋다.
하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의외로 천하제일 후기지수를 품는 것이다.
사람들이란 기대감을 품었을 때 가장 호의적으로 상대를 바라보는 법이니까. 당장 적이 될지도 모르는 천하제일인보다, 내 경쟁자가 될지도 모르는 천하제일검보다, 적당히 만만하고 적당히 기대할 수 있는 천하제일 후기지수가 제일 입에 담기 편한 법.
사람들이 괜히 오룡삼봉이니, 사룡오화니 해 대면서 후기지수들을 묶어 평가하는 게 아니다. 그건 강호 대대로 내려오는 유구한 놀이 법이다.
화산의 삼대제자가 종남의 삼대제자를 이겼다?
그건 재미있는 사건이겠지.
화산의 삼대제자가 종남의 이대제자를 이긴다?
그건 놀랄 만한 사건이지.
하지만!
화산의 삼대제자가 홀로 종남의 이대제자를 연이어 격파한다?
그건 강호를 뒤집어 놓을 일이다.
그리고 아마 종남에게는 대대로 씻을 수 없는 거대한 수치가 되겠지.
청명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러게 왜 화산을 건드리셨나.'
적어도 내가 없을 때 건드리지. 아, 하기야 내가 없긴 했네.
"자, 그럼 이자 쳐서 받아 볼까?"
청명이 막 목검을 들어 올리려는 찰나 건너편에 선 종남의 유백이 나직하게 일갈했다.
"그 자신감만은 천하제일이라 불러도 무방하겠지만, 실력 없이 내세우는 자신감은 패가망신의 지름길이라는 걸 내가 알려 주지."
"후."
청명이 딱히 대답을 하지 않고 검을 앞으로 겨누었다.
평소의 그라면 아마 몇 마디 더 이죽거렸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대신 청명은 고개를 돌려 삼대제자들을 바라봤다.
"사형."
"……비, 비무 중에 인마!"
"내 말 기억해. 하나도 놓치지 마."
"으응?"
아마도 이런 실전과 같은 비무를 보여 줄 수 있는 기회는 흔하지 않을 테니까.
청명은 가만히 유백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화산의 삼대제자 청명이 종남에 비무를 청합니다."
막 한소리 더 늘어놓으려던 유백이 움찔하며 그 말을 받았다.
"종남의 이대제자, 유백이 화산의 비무를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걸 지켜보던 삼대제자들은 전신이 팽팽해질 만큼의 긴장감을 느꼈다.
'저놈 지금 뭔가 다르다.'
평소의 청명이 아니다.
평소의 청명이었다면 비무가 시작된 순간까지도 눈앞의 상대를 도발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청명에게선 평소의 장난기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상단세를 취한 그의 등에서는 심지어 지금껏 보지 못한 차가움이 묻어났다.
마치…….
전장에 나가는 검수 같다.
윤종은 홀리기라도 한 듯 청명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곧 어마어마한 일이 벌어질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청명의 검이 천천히 움직인다.
위에서 움직이기 시작한 검이 천천히 아래로 내리그어지고, 이내 다시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온다.
윤종은 숨도 쉬지 못하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기수식.
지금 청명이 펼쳐 보인 것은 분명 육합검의 기수식이었다.
기수식이란, 상대에게 내가 준비되었음을 알리는 인사이자 예의이다. 하지만 지금 윤종은 그 간단한 기수식에 자신이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더없이 완벽한 검로. 그리고 더없이 완벽한 속도. 그리고 더없이 완벽한 자세.
어떻게 단 한 번의 기수식만으로 이리 많은 것을 보여 줄 수 있는가?
윤종은 알아챘다.
저 기수식은 상대에게 보여 주는 것이 아니다. 바로 화산의 삼대제자들에게 전하는 것이다. 지금부터 육합검을 사용할 테니 지켜보라고.
"놓치지 마라."
윤종이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처, 청명의 동작을 단 하나도 놓치지 마라! 절대! 눈도 깜빡이지 말고 지켜봐라!"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들은 그저 얕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대답할 기운마저 끌어모아 청명을 지켜보려는 듯.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겠다!"
그 대단함을 알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너무도 잘 알아서 압박감에 휩싸인 것인지. 종남의 유백은 거센 기합을 내지르며 청명을 향해 먼저 달려들었다.
청명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는다.
육합(六合).
화산의 모든 검의 기본이 되는 검식.
육합은 곧 천지사방(天地四方)을 의미한다. 이는 곧 세상 모든 것을 일컬음이고 또한 합일(合一)에 뜻을 둔다.
그 본질은 그저 단순한 기본 검식.
찌르고, 베고, 후려치고, 막는다.
아무것도 아닌 기본 검식에 불과하다.
하지만 결국 세상의 모든 검은 거기서 출발하는 법이다. 그 어떤 검술도 찌르고, 베고, 후려치고, 막는 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
상대의 검이 화려하게 하늘을 수놓는다.
"저!"
뭔가 이상함을 알아챈 현종이 눈을 부릅뜬다.
마치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을 연상케 하는 저 검술. 저건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하지 않은가?
종남에 저런 검이 있었나?
그 감상과는 별개로 검술이 가진 날카로움만은 확실했다. 수십 개의 검영이 일순 바람에 휘날리는 꽃잎처럼 기괴한 움직임을 보이며 청명을 휩쓸어 간다.
하지만 그 검을 바라보는 청명의 눈은 그저 낮게, 또 낮게 가라앉았다.
청명이 상단세를 겨눈 채, 단 한 걸음 앞으로 전진한다. 그와 동시에 검을 앞으로 찔러 넣는다.
"큭!"
허공을 뒤덮던 변화가 감쪽같이 사라진다.
'어, 어떻게?'
변화와 변화 사이를 정확하게 노리고 들어온 청명의 검이 유백의 손목을 깔끔하게 가격한다. 손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통증에 유백이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건 명백한 실수였다.
청명이 한 걸음을 더 전진하며 검을 내리친다.
카각!
진기가 실린 목검과 목검이 마주치며 둔탁한 소리를 낸다. 어찌어찌 검을 들어 일격을 막아 낸 유백이지만, 그 검에 실린 역도는 그의 몸을 깔끔하게 짓눌러 버렸다.
"크윽!"
그는 결국 청명의 검을 밀쳐 내며 뒤로 더 물러났다.
하지만 청명은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로 한 걸음 더 다가와 유백을 향해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화려한 변초 같은 건 없다. 날카로운 쾌검도 아니고, 어마어마한 역도가 실린 패검도 아니다.
그저 간결하게 휘두르는 게 전부인 검.
내리치고, 후려치고, 찌르고, 밀어 낸다.
그 어린아이 장난 같은 검초에 저항할 수가 없다. 막았다 싶으면 다시 검이 날아들고, 밀어 냈다 싶으면 어느새 검이 턱 끝을 찔러 대고 있다.
'이, 이게 대체 뭐란 말이냐? 대체!'
막는다. 또 막아 낸다. 하지만 청명의 검을 막을 때마다 유백은 몇 걸음씩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하, 한 번만!'
단 한 번의 틈만 있으면 된다. 그러면 그 틈에 검을 찔러 넣고 거리를 벌려 원하는 대로 설화십이식(雪花十二式)을 전개할 수 있을 것이다.
종남이 새로 창안해 낸 이 검술을 마음대로 펼쳐 낼 수 있다면 이 건방진 놈을 쓰러뜨리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아악!"
미처 검을 다 뻗기 전에 청명의 검이 그의 검을 후려친다.
손목이 부러져 나가는 고통에 절로 비명이 나왔다. 그 와중에 검을 놓치지 않은 것이 그의 의지이고, 자존심이었다.
'하, 한 번만!'
딱 한 번이면 된다. 딱 한 번의 틈! 딱 한 번…….
하지만 청명의 검은 그저 무심했다.
상대의 검을 제대로 받지 못한 대가는 컸다. 그저 정직하게 뻗어지는 검. 결코 서두르지 않는 연격. 그 일련의 흐름이 천천히 유백을 무너뜨린다.
'이, 이게 대체 뭐냔 말이냐!'
어느새 자신이 비무장의 끝까지 몰렸다는 것을 깨달은 유백이 혼이 빠진 얼굴로 청명의 검을 바라보았다.
그저 찌른다.
그저 휘두른다.
하지만 그 한 번의 찌름, 한 번의 휘두름에는 단 한 치의 틈조차 없다.
완벽. 그야말로 완벽한 검.
카앙!
결국 그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 유백의 검이 허공으로 솟구친다. 자신의 검을 튕겨 낸 후 머리로 떨어지는 청명의 검을 보며 유백이 멍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이건 꿈……."
파앙!
청명의 검이 유백의 머리 바로 앞에서 멈춘다. 직접 가격하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검에 실린 역도와 진기를 감당하지 못한 유백이 뒤로 털썩 나가떨어진다.
"사, 사제!"
"사형!"
비무대의 끝.
그 뒤는 당연히 종남의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유백을 쓰러뜨린 청명이 가만히 종남의 제자들을 바라본다.
그 눈빛을 정면으로 받은 종남의 제자들은 오싹함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청명의 입이 열리고,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음."
"……."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종남의 제자들이 절실하게 깨닫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