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영원히 잊지 못할 날을 만들어 주지. (1)
"저놈이……!"
"감히 어디다 대고!"
격한 분노의 반응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진금룡은 이를 악물었다. 안 그래도 패배의 충격에 정신이 혼미한 마당에, 윤종이 먼저 건방지게 비무를 청해 오니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다.
한편, 종남 쪽에서 격렬하게 쏟아지는 반응을 본 윤종은 움찔하고 말았다.
'좀 너무 나갔나?'
안 그래도 초상집이 된 곳인데, 이리 도발을 해 버렸으니 반응이 좋지 않은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이건 윤종으로서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기껏 청명이 만들어 놓은 흐름을 이어 나가지 않을 수 없으니까.
진금룡이 노한 음성으로 소리친다.
"공진(孔眞)! 공진!"
"예, 사숙!"
"나가라! 저 건방진 놈을 박살 내고 돌아와라!"
"알겠습니다!"
진금룡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이번 종화지회에서 그가 원한 것은 오로지 완전무결한 승리였다. 하지만 방금 화산이 날린 일격으로 그의 완벽한 승리에 금이 갔다.
그것도 다시 붙이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커다란 금이 말이다.
'청명!'
그의 눈이 건너편에 있는 청명에게로 향한다.
'이 멍청한!'
믿고 내보낸 선우량이 저리 처참하게 당할 줄이야. 선우량이 생각보다 약했던 것인가? 아니면 청명이 생각보다 강한 것인가?
'후자겠지.'
그가 사문의 사질인 선우량의 역량을 잘못 파악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선우량은 확실히 종남의 삼대제자 중 기량으로는 제일이다.
그런 그가 청명에게 당했다는 말은, 청명이 종남의 삼대제자들보다 훨씬 강하다는 뜻이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다.'
불의의 일격을 얻어맞았지만, 아직 완전히 망신을 당한 건 아니다. 남은 삼대제자들을 모조리 끝장낼 수 있다면, 청명의 선전은 그저 청명의 선전으로 끝날 뿐, 화산의 것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삼대제자 중 대제자인 공진이 잔뜩 독이 오른 얼굴로 목검을 들고 비무대로 올랐다.
그 모습을 보며 윤종이 깊게 심호흡을 했다.
'이 년 만인가?'
햇수로는 그만큼, 실제로는 그보다 빨리 마주했다.
지난 화종지회에서 윤종은 바로 저 공진과 맞붙었다. 그리고 제대로 반격조차 해 보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밀리다 끝내 패배했다.
그로부터 이 년.
'솔직히 승산이 없었겠지.'
청명이 오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청명이 없었던 기간 동안 윤종은 제대로 수련을 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의무적으로 수련은 했지만 강해지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하지 않았다.
의미가 없다고 느꼈으니까.
종남과의 비무에서 얻은 충격은 화산 전체를 무기력에 빠뜨렸다.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절망감. 그 절망의 벽에 도전한 이는 백천뿐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청명이 나타났다. 그놈 덕분에 윤종은 지난 몇 달간을 정말 최선을 다해 보낼 수 있었다.
그 몇 달의 수련으로 과연 저들과의 간격이 좁혀졌을까? 그건 확신할 수 없다. 다만…….
'절대 쉽게는 안 진다.'
그는 삼대제자들의 대사형이다.
설사 실질적인 삼대제자의 수장이 청명이 된 상황이라고는 해도, 윤종에게는 화산의 적통을 잇는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절대 꼴사나운 모습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공진이 사납게 눈을 뜨며 윤종을 노려본다.
"말은 필요 없겠지. 지난 비무 때, 내가 얼마나 네 체면을 봐줬는지 오늘 뼈저리게 느끼게 해 주마."
"딱히 고맙다는 말을 할 생각은 없는데."
"문답무용!"
공진이 과격한 기함을 토하며 윤종에게 달려들었다. 윤종이 입술을 질끈 깨물며 검을 움켜잡았다.
'저놈의 검은 빠르고 정직했다.'
뻔히 보이는 투로, 그리고 다음을 예측할 수 있는 검로.
그럼에도 과거의 윤종은 공진을 막지 못했다. 그건 윤종과 공진이 그만큼 차이가 난다는 뜻이다. 어설픈 기책이나 변수로는 어찌할 수 없는 수준의 차이가!
그러니 이번에는!
카앙!
공진이 뻗은 검이 윤종의 검에 막힌다.
"허?"
공진이 뜻밖이라는 듯 검을 회수하고는 다시 찔러 들어온다.
"그동안 마냥 놀지는 않은 모양이구나! 하지만 그 정도로는 어림없다."
"큭!"
윤종이 날아드는 공진의 검을 연달아 쳐 낸다.
빠르다.
그리고 묵직하다.
공진의 검은 과거보다 훨씬 더 빠르고 강렬해졌다. 그가 얼마나 고련을 해 왔는지 충분히 실감할 수 있었다. 과거의 그보다 적어도 두 배는 강해진 것 같다.
그런데…….
'왜?'
카앙! 카아앙! 카앙!
윤종의 검이 간결하게 움직여 공진의 검을 쳐 낸다.
이 년 전에는 제대로 볼 수도 없었던 검이다. 그 검이 더 빨라졌으니 얼마나 매섭겠는가?
그러니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왜 이게 다 보이지?'
느린 건 아니다.
분명 빠르다. 헉 소리가 날만큼 빠른 일격들이 연달아 이어진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윤종의 눈에는 공진의 검이 뻔히 다 보였다. 그리고 과거처럼 보고도 대처할 수 없는 게 아니라…….
카앙!
간결하게 움직인 윤종의 검이 공진의 검을 후려치듯 멀리 밀어 낸다. 그 반동을 이기지 못해 뒤로 확 밀려난 공진이 자세를 고쳐 잡았다.
"……이놈이."
윤종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공진을 바라보았다.
"……설마 그게 다냐?"
"이……."
"아, 아니. 화내지 말고. 내가 지금 도발하거나 그러려는 게 아니라, 정말 순수하게 물어보는 거거든? 혹시 지금 나를 망신 주려고 살살하고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 이러다가 갑자기 확 세진다거나?"
"이놈! 죽여 버리겠다!"
윤종의 말을 놀리는 것으로 받아들였는지 머리끝까지 화가 오른 공진이 성난 멧돼지처럼 윤종을 향해 달려든다. 그 광경을 보며 윤종은 두려움보다는 황당함을 느끼고 있었다.
'청명, 저 자식이 대체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달려드는 공진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똑똑히 보인다. 그의 어깨가 움직이는 것으로 어느 방향으로 검을 휘두를지까지 미리 알 수 있었다.
이건 검로를 통한 예측이 아니다. 눈으로 보고 안 것이다.
쇄애애애액!
목검이 진기를 담고 과격하게 휘둘러졌지만, 윤종은 그저 한 발 뒤로 물러나는 것만으로 그 검을 완벽하게 피해 냈다. 검이 윤종의 배 바로 앞을 스쳐 지나간다.
너무 많은 힘이 담겨서인지 공진의 자세가 살짝 기울어진다. 과거였다면 절대 보지 못했을 작은 틈. 하지만 지금의 윤종은 그 틈을 너무도 선명히 볼 수 있었다.
퍼억!
윤종의 발이 머리보다 먼저 움직여 공진의 옆구리를 걷어찬다. 공진의 몸이 뒤로 날아가는 것을 확인한 윤종이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청명.
청명이 심드렁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지루하니 빨리 끝내라는 듯 말이다.
'저 미친놈.'
어쩐지 태도가 이상하더라.
저놈은 이 모든 결과를 미리부터 예측하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으아아아아아아아!"
그때, 분노와 흥분으로 아예 이성을 놓아 버린 공진이 윤종을 향해 재차 달려들었다. 그런 공진을 본 윤종은 양다리를 살짝 벌리고 검을 살짝 들어 올렸다.
상단세.
모든 검의 기본이 되는 자세이자, 육합검의 기본이 되는 자세.
그리고 윤종이 열흘 동안 미친 듯이 휘둘러 온 단 일격을 시작하는 자세였다.
공진의 검이 뻗어진다. 그러더니 지금까지 그가 펼쳤던 종남의 검과는 사뭇 다른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과거의 윤종이라면 당황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윤종의 눈빛에는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모든 변화와 검초도 결국에는 손끝에서 나오는 것. 태산같이 하체를 고정하고, 눈으로는 단 하나의 변화도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스슷.
보인다!
검과 검이 이어지는 찰나. 그 미묘한 틈을 윤종은 놓치지 않았다. 눈이 틈을 확인한 순간 그의 몸은 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아!
검이 대기를 가른다.
단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내리쳐지는 검.
흔들리지 않는 마음. 단련된 육체. 그리고 정확한 목적.
정기신(精氣神)의 합일(合一)을 이룬 검이 공진의 검로를 꿰뚫고 정확하게 그의 어깨를 내리친다.
공진이 기겁하여 급격하게 검로를 틀어 윤종의 검을 막았다.
콰아아아아아앙!
하늘로 검이 솟구친다.
반 토막이 난 공진의 검이 팽그르르 회전하며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툭. 투둑.
목검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만이 정적 가득한 화산을 고요히 울렸다.
"……."
조용한 침묵.
몇몇은 벌떡 일어나 비무대 위를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본다.
공진.
종남 삼대제자 중 대제자인 그가 바닥에 쓰러진 채 의식을 잃고 있다. 그 바로 앞에 검을 아래로 내린 윤종이 태산처럼 우뚝 서 있다.
굳이 승패를 말할 필요도 없는 완벽한 승리.
가만히 공진을 내려다보던 윤종이 검을 회수해 허리를 차고는 정중하게 포권 한다.
"잘 배웠습니다."
그리고 빙글 몸을 돌려서 제자리로 돌아간다.
이윽고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이겼다! 이겼어! 윤종 사형이 이겼어!"
"흐하하하하! 미친, 이거 말도 안 돼!"
비단 아이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화산의 어른들이 자리한 곳도 난리가 났다.
"으하하하하하! 윤종아! 윤종아아아아아!"
"고, 고정하십시오 사형!"
현상이 당장이라도 윤종에게 달려갈 듯 움찔거리자, 현영이 황급히 그를 움켜잡았다.
"고정은 빌어먹을! 내가 지금 고정하게 생겼는가! 으하하하핫! 이겼어! 이겼다고!"
"사형! 체통! 체통 좀 지키십시오!"
"체통이고 나발이고 이겼다니까!"
하지만 현영 역시 현상을 잡아끌면서 만면에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얼마나 좋으면.'
항상 근엄하던 사형이다. 하지만 현영이 화산의 재정에 한이 맺혔듯이, 현상 사형은 화산의 무학에 한이 맺힌 사람이다. 무각주로서 화산의 무학을 이끌어 나가야 할 사람이다 보니, 언제나 실전된 무학과 낮은 수준에 절망만 거듭해 왔다.
밖으로 그런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얼마나 답답해했을지 안 봐도 뻔했다.
그런데 기대도 하지 않았던 삼대제자들이 저 건방진 종남 놈들의 코를 아주 주저앉히고 있다.
'장문인은?'
현영이 고개를 돌려 현종을 바라본다.
그는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더없이 자애롭고 푸근하다 못해 보고만 있어도 그저 마음이 따뜻해지…….
"으아아아아! 지금 등선하시면 안 됩니다!"
현영이 현상을 내팽개치고 현종에게 달려가 그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정신 차리십시오! 장문인! 지금은 아닙니다! 아니 뭐 했다고 혼이 빠져나가!"
"다, 다 이루었……."
"아니라고! 아직 한참 남았다고! 의원! 의원을 불러라! 의원!"
난장판이 된 와중에 윤종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쏟아지는 사형제들의 환호에 그는 머쓱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 역시 내심으로는…….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다.
하지만 이렇게 모두가 기쁨에 춤을 추는 와중, 단 한 사람 조걸만은 웃지 못했다. 이제는 그의 차례이기 때문이다.
"사형! 대사형! 어떻게 한 겁니까? 제가 뭘 해야……."
"걸아."
"예! 사형!"
"그냥 나가라."
"……예?"
윤종이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왜 청명이 그에게 별다른 설명을 해 주지 않았는지 알 것 같다.
"지고 싶어도 못 진다. 그냥 나가라. 나가 보면 안다."
"……."
조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윤종이 그렇다면 그런 것. 조걸은 이윽고 표정을 굳히며 비무대로 향했다.
윤종은 조걸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청명에게 일직선으로 걸어가 그 옆에 앉았다. 그리고 묵직하게 입을 연다.
"뭘 어떻게 한 거야."
그러자 청명이 씨익 웃으며 윤종을 바라보았다.
"뭘?"
"우리!"
"아, 그거?"
청명이 피식 웃고는 심드렁하게 입을 연다.
"별거 아냐. 그냥 이기게 만들어 준 거지."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했냐고, 인마!
이 도깨비 같은 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