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별것도 아닌 게 깝치고 있어. (5)
"……."
현영이 멍한 눈으로 비무장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지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그는 재경각주다.
워낙 셈이 빠르고, 이해득실에 민감하다 보니 입문했을 때부터 재경각을 이끌 인재로 평가받은 사람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무학에는 전념할 수 없게 되었다.
덕분에 지금에 와서는 현자 배 중에서 가장 무위가 떨어지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현영은 지금 그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이 뭘 의미하는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청명이 종남의 삼대제자를 이겼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이게 대체 어느 정도의 사건인가?
"아니, 장문인 저게……."
때문에 장문인의 말을 듣고자 했던 현영은 현종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움찔하고 말았다.
현종이 수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부릅떠진 눈, 그리고 지나가던 새가 잠시 쉬어갈 수 있을 만큼 크게 벌린 입. 심지어는 현종뿐만 아니라 그 옆에 있는 현상도 똑같은 얼굴이었다.
'나도 놀라야 하나?'
끼지 못하니 뭔가 서운한 기분이 조금…….
"어……."
"어?"
"어어……."
"어어?"
현종의 눈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떨리더니 이내 혼이 빠진 듯한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이, 이게…… 아니, 이게……. 이게 이럴 리가, 이……."
넋이 나간 듯한 중얼거림이 연신 이어졌다. 보다 못한 현영이 살짝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장문인. 외인들이 보고 있습니다. 정신 차리십시오."
그제야 현종이 입을 닫는다. 억지로 닫는 입에서 우두둑 소리가 나는 것으로 보아 정말 제대로 놀란 모양이었다.
"아니, 저 아이가……."
현종은 가까스로 체면을 되찾았지만, 현상은 그러지 못했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청명을 가리키며 중얼거렸다.
"저, 저렇게 세면 안 되는데……. 이게 말이……. 이게 말이 안 되는데. 져야 하는데?"
결국 현영이 짜증을 내고 말았다.
"사문의 아이가 선전을 했건만 그게 무슨 악담입니까! 지라고 고사를 지내지!"
"……말이 안 되니 그러지 않나. 말이 안 되니까."
현상이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마구 부비더니, 여전히 얼이 빠진 얼굴로 물었다.
"저 아이가 입문한 지가 얼마인가?"
"6개월도 안 됐습니다."
"그 6개월 만에 종남의 제자를 때려잡았다는 말인가? 그것도 저리 일방적으로?"
"……."
아…….
그렇게 생각하니 말이 안 되기는 하네.
"운검! 운검은 어디 있느냐?"
"여기 있습니다, 장문인."
다른 이들과는 달리 비교적 태연한 기색을 유지하고 있던 운검이 예를 표했다.
"저 아이가 화산에 입문했을 때, 다른 무학을 익힌 게 있었느냐?"
"아닙니다. 청명에게는 무학을 익힌 흔적이 없었습니다."
"그럼 정말 고작 반년 만에 저 수준을 이뤘다는 말이냐?"
"예."
현종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운검을 돌아보았다.
"천재로구나……."
운검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어쩌면 그런 표현도 어울리지 않는 아이일지 모릅니다. 워낙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아이라, 저도 정확한 무위는 아직까지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허어."
현종이 감탄을 터뜨리자 현상이 혼자 중얼거렸다.
"천재니 신룡이니 어쩌고 하는 놈들은 남의 문파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이게 뭔 말도 안 되는……. 창고 뒤져 보다 갑자기 쌀자루 안에서 금송아지가 나온 격인데."
현종 역시 충격이 큰 모양이었다.
"그냥 복덩인 줄 알았더니만……."
그의 중얼거림이 지켜보는 모든 이들의 심정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지금까지 청명이 화산에서 한 일이 오죽 많은가? 굳이 무학에 대한 재능이 있을 필요도 없다고 여겼다. 청명도 사람일진대, 더 바라는 것은 양심이 있는 이로서 할 짓이 아니니까.
그런데 무에 대한 재능까지 출중하단 말인가? 그것도 종남의 삼대제자를 가지고 놀만큼?
모두가 경악을 거두지 못할 때, 현영만이 빠르게 셈을 마쳤다.
"어쨌거나 일 승은 챙겼습니다. 체면치레는 한 것 아니겠습니까?"
"……."
"……."
현종과 현상이 멍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이윽고 노기와 황당함이 뒤섞인 얼굴로 현영을 노려본다.
괜히 뻘쭘해진 현영이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일단 그렇다는 겁니다. 일단."
"거참……."
"이래서 재경각이고 뭐고 무학을 제대로 익혀야 한다는 말입니다. 혼자서 딴소리하고 있잖습니까."
현상의 면박에 현영이 한없이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현종은 그저 가볍게 웃고는 저 멀리 청명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체면치레라.'
이걸 단순히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오늘 화종지회의 결과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을지도 모른다. 지금 화산은 앞으로 백 년을 책임질 인재를 손에 넣은 걸 수도 있으니까.
"……화산의 아이가 이긴 것 같습니다만."
"으음, 그렇습니다. 그렇긴 한데."
"……많이 일방적이었지 않습니까?"
"허어, 예상하지 못했던 일인데."
황문약은 느긋하게 주변에서 들리는 반응을 즐기고 있었다.
'당연히 저 정도는 해 줘야지!'
황문약은 청명의 무위가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한다. 그는 은하상단의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의식을 찾지 못했으니까.
듣자 하니 이송백에게 일격을 얻어맞고 피까지 토했다지만, 그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 청명이 그럴 리가 없다. 당연히 흉수를 잡아내기 위한 연기가 아니었겠는가?
황문약에게 있어서 청명의 무위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느긋하게 비무를 지켜볼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다.
'저 소도장이 지는 싸움을 할 리가 없지.'
청명을 아주 잘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는 사람 보는 눈 하나로 은하상단을 섬서십대상단으로 만든 사람이다. 그게 보기에 청명이 저리 자신 있게 나섰다는 건 필승의 확신이 섰다는 뜻이다.
물론 황문약의 예상보다 더 과격하고, 더 압도적이었지만.
'그렇지. 지는 싸움은 하지 않는다, 이 말이렷다.'
그렇다면 이 화종지회 역시 청명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싸움인 걸까? 만약 청명이 그리 생각하고 있다면, 결과도 모두의 예상과는 다를지도 모른다.
"화산에도 인재가 있군요."
"나이를 생각해 보면 훌륭합니다. 아니, 아니지요. 훌륭하다는 말로는 모자랍니다."
"우연으로 종남의 제자를 이길 수 없습니다. 거기에 한눈에 보아도 차이가 크게 나지 않았습니까? 이런 비무에서 선봉으로 나설 정도라면 저 아이도 분명 종남 삼대제자 중에서는 뛰어난 인재일 텐데, 이리 일방적일 수가."
유지들의 대화가 황문약의 귀에는 아름다운 노랫소리처럼 들린다.
하지만 황문약은 태연한 듯 말하는 유지들의 목소리에 기이한 열기가 담겨 있다는 걸 놓치지 않았다. 종남의 눈치가 보여 크게 칭찬하긴 어렵지만, 청명이 대어라는 걸 눈치채지 못한 사람은 없을 테니까.
'꿈도 꾸지 마라. 내가 낚은 고기다.'
이 한 번의 비무만으로 청명은 진금룡보다 더 큰 주목을 받는 데 성공했다. 화종지회가 어떻게 끝나든 청명의 이름은 한동안 섬서 전역에 회자될 것이다.
황문약이 미소를 지으며 자리로 돌아가는 청명의 뒷모습을 힐끔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제 겨우 한 번 이긴 것에 불과합니다. 다른 삼대제자들이 모조리 패한다면 그저 저 아이가 뛰어났다로 끝날 일이지요."
"그건 확실히 그렇다고 봐야지요."
황문약도 이건 흥미가 간다는 듯 청명을 환영하는 삼대제자들을 보며 눈을 좁힌다.
'자, 보여 주시게. 청명 도장!'
과연.
한 번의 이변으로 끝날 것인가?
아니면 화산의 반격이 시작될 것인가?
청명은 배부르게 먹고 따뜻한 햇볕 아래 드러누운 고양이 같은 표정으로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짜증으로 터질 듯 보였던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모든 불만이 풀렸다는 듯 개운한 표정이었다.
'사람을 패고 저토록 개운해하다니!'
'악귀도 저러지는 않겠다.'
하지만 흐뭇한 것은 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속에 담긴 말이 터져 나온다.
"청명아! 잘했다!"
"더 밟아 버리지 그랬냐!"
"십 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네!"
윤종은 환호하는 사제들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이것들도 도사라고.'
청명이 오기 전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면 손속이 과한 것이 아니냐, 도를 닦는 이가 사람을 그렇게까지 패도 되냐는 등 온갖 말이 나왔으리라.
하지만 이제는 이놈들도 청명에게 물들어 버렸는지 아주 축제를 벌일 기세다.
심지어 윤종조차도 자꾸만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를 어쩔 수 없었다.
"청명아, 수고 많았다."
"뭐 그냥 잠깐 놀다 온 거지."
재수 없는 말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마저도 당당하고 정당해 보인다.
'이놈이 강한 줄은 알았지만…….'
설마 종남의 제자를 손도 발도 못 쓰게 털어 버릴 정도일 줄이야.
종남의 제자가 불쌍하다고 느낀 건 이번이 처음이다. 화산은 언제나 동정을 받는 입장이었지, 저들을 동정하는 입장이 아니었다.
청명과 얽힌 이는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동정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새삼 뼈저리게 실감한 윤종이었다.
"청명아, 수고했다!"
"정말 대단했다! 훌륭하다!"
심지어는 청명과 사이가 끔찍하다고 해도 무리가 아닌 이대제자들조차도 주변에 몰려들어 환호를 보내고 있다.
하기야.
지금 가장 기쁜 이들은 삼대제자도 장문인도 아니고 이대제자들일 것이다. 그들이 당한 망신을 청명이 톡톡히 갚아 주었으니까.
패배도 패배지만, 비무 도중 내내 이어진 종남의 조롱에 울화병이 생길 지경이었다. 그런 와중에 청명이 종남의 제자를 한여름 날 쏟아지는 얼음물처럼 시원하게 패 주었으니 어찌 이 어린 사질이 귀엽지 않겠는가?
개인적인 감정도 감정이지만, 일단 앞선 비무에서 추락해 버렸던 화산의 명예를 청명이 조금이나마 되찾아 왔다는 것이 더욱 기쁜 그들이었다.
'건방질 만해.'
'실력이 있으면 건방져도 되지.'
'알고 보면 착한 놈일지도 몰라.'
그렇게 모두의 환호를 받으며 어깨가 으쓱해진 청명이 윤종을 돌아본다.
"사형!"
단호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담긴 뜻을 짐작한 윤종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차례로군.'
청명은 제 역할을 충분히…… 아니, 과할 정도로 해냈다. 그럼 이제 윤종과 다른 사형제들이 그 역할을 이어받아야 한다.
나는 각오가 되어…….
"뭘 어리바리하게 보고 있어. 빨리 나가."
"……."
아니, 이 새끼는 잘 나가다가 꼭!
"……그래."
말해 뭣 하니. 속만 썩지.
그래도 할 말이 남아 있기는 하다.
"혹시 조언이라든가 그런 건 없냐? 종남 무학의 특징이라든가?"
"말해 주면 써먹을 수는 있고?"
"……."
"그냥 나가. 대충 대가리 보이면 후려 패면 돼."
"……일단은 알았다."
윤종이 얼떨떨한 눈으로 비무장으로 향한다. 그에게 모이는 주변의 시선을 보며 윤종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분위기가 바뀌었어.'
초상집이 따로 없었던 화산이다. 하지만 청명이 완벽한 압승을 보여 준 덕에 분위기가 확연하게 바뀌어 버렸다.
혹시 삼대제자는 다를지도 모른다는 기대.
그 기대를 현실로 만드는 것이 윤종이 해야 할 일이다.
"후우."
긴장하지 않으려는데 뜻대로 되질 않는다. 차라리 기대를 받지 않으면 모를까, 청명의 활약으로 그에게도 혹시나 하는 기대가 쏠리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윤종이 패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그때였다.
"사형!"
등 뒤에서 청명이 윤종을 부른다. 윤종이 굳은 얼굴로 돌아보았다.
그래, 너도 양심이 있을 텐데 격려의 말 한마디 정도는…….
"지면 뒈지는 거여."
"……."
아. 내가 저놈이 청명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었구나.
내 탓이지. 내 탓이야.
깊게 한숨을 쉰 윤종이 다시금 얼굴을 냉정하게 굳혔다. 그리고 이내 검을 뽑아 들고 자세를 잡는다. 시선은 종남의 제자들이 모인 곳을 정확하게 응시한다.
그리고 검을 들어 종남을 겨눴다.
"대 화산의 삼대제자 윤종이 종남에 비무를 요청합니다!"
바람이 화산을 향해 불어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