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별것도 아닌 게 깝치고 있어. (4)
그건 살면서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타격음이었다.
화산에 모인 이들은 인간의 주먹과 사람의 얼굴이 만나 이런 소리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새로이 발견하고 말았다.
회전한다.
청명의 주먹을 얻어맞은 선우량이 허공에서 빙글빙글 회전했다.
촤아아아아아악!
그의 코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회전하는 선우량의 몸을 따라 마치 안개처럼 사방에 흩뿌려졌다.
'저거 잘하면 무지개도 생기겠는데?'
피로 만든 무지개라니.
세상에 그런 끔찍한 일이 또 있을까.
상식과 비상식의 경계가 무너지는 느낌이다.
피를 뿜으며 회전하던 선우량은 이내 바닥으로 떨어져 경련했다. 그런 그를 보며 청명이 내뱉는 목소리가 모두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별것도 아닌 게 깝치고 있어."
청명이 바닥에 침을 탁 뱉는다. 그리고 허리춤에 찬 목검을 뽑아 든다.
"일어나. 이 새끼야. 아직 안 끝났어. 내 분노는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아!"
사자처럼 포효하는 청명이지만, 그건 웅장하다기보다는…….
'더럽게 쪼잔한 것 같은데.'
솔직한 윤종의 심정이었다.
"뭐……?"
사마승의 수염이 파르르 떨린다.
'이, 이게 무슨…….'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건만, 아직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청명이 순간 사라진 듯 보이더니 선우량의 앞에 나타나 일격을 날렸다. 그리고 그 일격을 얻어맞은 선우량이 말 그대로 공중에서 팽이처럼 돌다가 바닥에 쓰러졌다.
이게 사마승이 본 일의 전말이다.
문제는 바로 '사라진 듯 보이더니'다.
'내가 저 아이의 움직임을 놓쳤다고?'
아무리 삼대제자끼리의 비무라 딱히 긴장하지 않았다고는 하나, 종남의 장로인 그가 화산 삼대제자의 움직임을 놓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아니,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사마승은 자신이 본 것을 부정해 버렸다. 하지만 이건 그만의 탓이 아니다. 이곳에 사마승이 아닌 다른 이가 서 있었다고 해도 똑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생각하는 상식을 초월하는 일이 벌어지면 부정하고 의심하기 마련이니까.
"저 비겁한 놈이!"
그때, 옆에서 들려온 노한 목소리가 사마승을 일깨웠다.
"대화를 나누는 중에 기습을 하다니! 화산은 예의도 모른단 말인가!"
"저 간악한 놈!"
"……."
이 아이들에게는 그리 보였던 모양이다.
하기야.
무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이대제자들에게 있어서 청명의 움직임을 잠시 놓쳤다는 건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니까.
하지만 사마승은 다르다. 그는 종남의 장로가 아닌가?
사마승이 놀란 심장을 달래며 다시금 비무대 쪽에 집중했다.
"선우량! 일어나라!"
"일어나라! 우량!"
여기저기서 선우량을 응원하는 소리가 울린다. 사마승은 아직 경악이 가시지 않은 눈으로 쓰러진 선우량을 뚫어져라 보았다.
'내가 착각을 한 거겠지.'
그럴 것이다.
아니. 그래야 한다.
"일어나, 인마. 내공도 안 실었는데 뭔 엄살이야."
청명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선우량을 쏘아보았다.
종남 쪽에서 발작적으로 성토를 해 댔지만, 그딴 개소리는 청명의 귀에는 들리지도 않았다.
비무대에 올라왔으면 그 순간부터 비무지. 예의는 뭔 얼어 죽을 예의란 말인가. 전쟁을 치러도 만나서 악수하고 술 한잔한 다음에 싸우기 시작할 놈들 같으니.
"끄으……. 으으윽……."
그 순간 선우량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다.
차지게 두들겨 패긴 했지만 내공을 싣지 않은 주먹이다 보니, 의식이 날아갈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내공 실었으면?
죽었지! 뭘 물어봐.
청명이 일어나는 선우량을 보며 목검으로 자신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다.
"빨리빨리 일어나라. 내가 시간……. 너 괜찮냐?"
짜증 섞인 청명의 목소리가 급속도로 누그러졌다.
"우우……."
콸콸.
콸콸콸.
몸을 일으킨 선우량의 코에서 선지피가 폭포처럼 쏟아진 탓이다.
피가 얼마나 흘러나오는지, 순식간에 앞섶을 다 적시고는 바닥까지 고인다. 천하의 청명도 움찔할 정도였다.
선우량이 휘청이며 몸을 일으키곤 몇 번 헐떡이다가 힘겹게 입을 연다.
"나, 나는 아직 싸울 수 있……."
"죽겠는데?"
아니, 쟤 진짜 죽겠는데?
보통 코가 부러지면 피가 저렇게까지 나나? 내가 내공 없는 주먹으로 사람 얼굴을 쳐 봤어야 알지.
선우량은 달달 떨리는 다리로 몸을 지탱하여 양손으로 코를 틀어막았다.
"피, 피가 안 멈추……."
"죽는다고! 인마!"
그러다 너 진짜 죽어!
아니, 내가 사람 죽이는 데 거리낌이 있는 사람은 아닌데, 이런 식은 아니지!
다시 사는 인생에서 제 일호 살인이 비무 중에 죽빵 갈겨서 과다출혈로 사망이라니. 이게 뭔 개소리야!
식겁한 청명이 살짝 질린 얼굴로 운암을 돌아보며 말했다.
"쟤 치료라도 받게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화산에서 살인 날 판이잖아요.
"그, 그게 규정이, 어……."
운암도 예상 외의 상황에 당황했는지 제대로 딱 잘라 말을 못 한다. 이럴 때 치료를 하고 복귀를 해도 되는가에 대한 규정이 없다. 양쪽의 양해를 구해야 할 것 같은데, 이게 지금 느긋하게 양해를 구할 상황도 아니잖은가?
부우욱! 부우우욱!
그 순간 선우량이 제 옷자락을 찢어 내더니 자신의 코에 쑤셔 넣기 시작했다.
오올?
똑똑한데?
옷자락이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지만 계속 쑤셔 넣다 보니 어찌어찌 피가 흘러나오는 건 막아 낸 모양이다. 그렇게 출혈을 다스린 선우량이 목검을 들고는 청명을 겨누었다.
오, 계속하겠다는 건가?
확실히 종남 애들이 통뼈라 그런지 쉽게 포기를 하지 않는구나. 크으. 문파는 다르지만 기특…….
"이 비겁한 새끼!"
"……응?"
청명의 고개가 살짝 삐딱해졌다.
"부끄러……. 쿨럭! 부끄러운 줄도! 쿨럭! 쿨럭! 모르고 잘도 이런 짓을!"
하나만 해, 인마.
화내려면 화내고. 아파할 거면 아파하고.
"네놈은 갈기갈기 찢어 개밥으로 주겠다!"
청명이 미간을 좁혔다.
일단 기특하다는 말은 취소하자.
"아니, 종남 애들은 일단 욕하는 것부터 배우나? 하나같이 인의예지를 모르네."
- 그게 네가 할 말이냐?
아, 좀! 나올 만할 때 나오쇼! 내가 지금 화산의 명예를 어? 드높이고 어?
청명이 목검을 꼬나 쥐고는 고개를 까딱까딱 꺾었다.
"내가 살짝 미안했는데, 지금 그것도 다 사라지려고 하거든? 그냥 입 털지 말고……."
"지금 와서 머리를 처박고 빈다고 해도 이미 늦었다! 이 개자식아! 네 부모도 알아보지 못하게 박살을 내 주겠다."
"아, 계속 털어. 이제 괜찮아."
미안함이 말끔히 사라졌거든.
청명 역시 목검을 들어 선우량을 겨누었다.
"덤벼."
"……이 개자식이!"
"와 봐. 털끝 하나 스치지 못한다는 게 뭔지 보여 줄 테니까."
"오냐, 지금 당장!"
그때였다!
"선우량!"
선우량의 등 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선우량이 딱딱하게 굳은 진금룡의 얼굴을 보고는 움찔한다.
"흥분하지 마라. 상대를 경시하지도 말고."
선우량이 아차 하는 얼굴로 청명을 돌아보았다.
이대제자들은 모두 한 대도 얻어맞지 않고 상대를 제압했는데, 자신만 올라와 망신을 당했다는 생각에 필요 이상으로 흥분했다.
흥분한 자는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고 자랐건만, 막상 실전에선 그 사실을 잊은 것이다.
선우량은 깊게 심호흡을 해 마음을 다스렸다. 코로 숨을 쉴 수 없어 뭔가 불편한 느낌이 들었지만, 이내 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호흡을 가다듬은 그는 조금 전과는 다른 차가운 눈으로 청명을 노려보며 일갈했다.
"격장지계가 제법이구나!"
"……예. 제가 그랬습죠."
그렇다고 치자. 나도 내가 뭘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제대로 붙는다면 화산의 제자 따위는 절대 종남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려 주마. 특히 너는 각오하는 게 좋을 것이다. 내 손속에 사정을 바라지 마라."
"네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다 하셨으면 덤비시죠. 내가 진짜 스치지도 못하는 게 뭔지 보여 준다니까."
"너야말로 내게 스치지도 못할 것이다!"
"너 벌써 한 대 맞았거든?"
코 안 아프니?
"죽여 버리겠다! 이 망둥이 같은 놈! 타아아아앗!"
선우량이 목검을 휘두르며 청명에게 달려들었다.
그새 침착함을 되찾았는지 검 끝이 날카로운 예기를 발한다. 종남의 삼대제자 중 실력으로는 제일이라는 평이 아깝지 않았다.
화산의 누가 나오더라도 선우량을 상대하는 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설사 삼대제자가 아닌 이대제자가 나왔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선우량에게는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상대가 너무 나빴다.
그의 상대는 다름 아닌 화산의 재앙 청명이니까.
"아니!"
청명이 목검을 뒤로 쭉 뺀다.
그리고는 달려오는 선우량을 향해 오히려 전속으로 달려들었다.
"어?"
뒤로 쭉 뻗어졌던 청명의 검이 벼락같은 속도로 휘둘러져 선우량의 머리를 후려친다.
빠아아아아아아악!
피하고 자시고도 없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검을 무슨 수로 피하라는 말인가.
선우량이 입을 따악 벌리고 눈을 까뒤집는다.
'죽었네.'
'에이. 저 정도면 죽었지.'
'저건 죽어야 예의지.'
선우량의 몸이 스르륵 무너진다. 하지만 청명은 그 정도에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요즘!"
빠아아아악!
쓰러지기 전에 한 방 더.
"애새끼들은!"
빠아아아악!
다시 한 방 더!
"예의가 없어! 예의가!"
바닥에 쓰러지는 선우량의 몸을, 청명의 목검이 말 그대로 후려 팬다.
"나 때는 안 그랬는데에에에!"
하늘 위에서 청문이 들었으면 들고 있던 선장(仙仗)을 집어 던지고 거품을 물 발언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선계는 현세에 관여할 수 없는 법.
"에라이!"
뻐어어어어엉!
마지막으로 선우량의 가랑이를 걷어차 올려 버린 청명이 몸을 빙글 돌렸다.
허공으로 삼 장이나 치솟았던 선우량이 바닥으로 추락한다.
쿠우우웅!
청명이 혀를 찼다.
"욕만 안 했어도 살살 해 주려고 했는데. 여하튼 요즘 것들은. 에잉!"
양심이라고는 개미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말을 들으며 삼대제자 전원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저놈에게 욕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아, 맞다."
청명이 몸을 다시 돌리더니 바닥에 대자로 뻗어 경련하는 선우량에게로 다가갔다.
그러더니 손을 뻗어 그의 코를 막고 있는 옷자락을 잡아 뽑는다.
막혀 있던 피가 다시 줄줄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어때. 스치지도 못했지?"
방식은 조금 다르지만 말이야.
청명이 고개를 돌려 종남 쪽을 바라본다.
사마승도 진금룡도, 그리고 다른 종남의 제자들도 아무도 쩍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저 경악과 당혹이 뒤섞인 시선으로 멍하니 청명을 바라볼 뿐이다.
"놀라기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놀라면 쓰나.
청명이 그들을 일별하고는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간다.
그 뒷모습을 보며 사마승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게 대체 무슨 일……."
하지만 이건 그저 시작에 불과하다는 걸 이곳에 있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오직 하나, 청명을 제외하고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