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저 새끼들한테 지면 다 뒈지는 거야. (5)
화종지회의 날이 밝았다.
현종은 가만히 그의 앞에 도열해 있는 이대제자와 삼대제자들을 바라보았다.
비장하다.
이 아이들의 얼굴이 더없이 굳어 있다는 사실이 현종을 가슴 아프게 했다. 지금 그의 앞에 도열한 아이들도 자신들이 얼마나 큰 짐을 지고 화종지회에 나서는지를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가슴이 아프다.
언제부터 이리 변질되어 버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짐은 본디 장문인을 비롯한 사문의 어른들이 져야 할 짐이었다. 하지만 화종지회가 고착된 어느 순간부터 문파의 힘을 증명하여 그 명예를 떨치는 일이 아이들에게로 넘어가 버린 것이다.
이대제자라고 한들 그 짐을 지기에는 너무 어리다.
삼대제자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그 무거운 짐에 불평 한마디 없이 이리 나서 주는 아이들이 한없이 고맙고 그래서 더 미안하다.
"장문인."
현영이 슬쩍 눈치를 주차 현종이 살짝 고개를 들었다.
감상에 빠져 아이들을 너무 오래 세워 두었다.
현종은 낮은 헛기침으로 분위기를 환기하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들 긴장한 얼굴들이구나."
천천히 아이들을 돌아본 현종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리 딱딱하게 굳어 있을 것 없다. 이기고 지고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이 화종지회를 너희의 밑거름으로 삼으면 될 일이다."
현종이 모두와 눈을 맞추고는 다짐하듯 말한다.
"어떤 결과를 가져오더라도 너희는 여전히 화산의 자랑스러운 제자다. 그 사실만 기억하면 된다."
투박한 말이었다.
비무를 치르러 나가는 이들의 사기를 북돋지도 못했고, 화산의 명예를 등에 지겠다는 각오를 만들어 주지도 못하는 말.
하지만 그 말은 큰 짐을 지고 긴장하던 제자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풀어 주었다.
모두의 표정이 조금 온화해지자 현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지켜보고 있으마. 다녀오거라."
그 말을 끝으로 현종이 몸을 돌려 먼저 걸어갔다. 현영이 빠르게 옆으로 따라 붙는다.
"함께 가지 않으십니까?"
"아무리 비무라고는 하나 승부에 나서는 이들과 지켜보는 이들이 함께 갈 수는 없는 법이지. 저들끼리 할 말이 있을 것이다. 아이들끼리만 있도록 해 주거라."
"예, 장문인."
현영이 눈짓하자 다른 화산의 장로들과 운자 배들도 재빠르게 현종의 뒤를 따랐다.
남겨진 이대제자와 삼대제자들이 낮은 호흡으로 긴장을 풀고 있을 때,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백천.
그가 모두의 앞에 단호한 얼굴로 섰다.
"오늘 우리는 종남과 싸운다."
백천의 시선이 슬쩍 청명에게로 향했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장문인께서 말씀하셨듯, 패한다 해서 부끄러운 것은 아니다. 부끄러운 것은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다. 승부에 임할 때 너희가 화산의 제자라는 자긍심을 품어라."
"예! 사형!"
"가자!"
백천이 굳은 얼굴로 이대제자들을 이끌고 비무장으로 향했다. 그 뒤를 따르는 이대제자들의 얼굴에 단호한 결의가 엿보인다. 가장 마지막에 서 걸어가는 유이설의 얼굴에조차 평소와는 다른 비장함이 보일 정도였다.
"크흠."
이대제자들이 멀어지자 윤종이 슬그머니 앞으로 나왔다.
그러자 삼대제자들이 열렬히 윤종을 환영해 주었다.
"뭐. 대사형도 무슨 말씀 하시게?"
"거 일절만 합시다, 일절만. 이러나 날 새우겠네."
"하. 진짜 감투라는 게 사람 미치게 만든다더니."
이 새끼들이…….
"니들이 나를 백천 사숙 반만 대접해 줘 봐라!"
"알았으니 빨리 합시다. 다리 아픕니다."
"거 이럴 거면 다 한마디씩 합시다. 조걸 사형. 미리 뒤에 가서 서 계슈. 시간 아끼게."
"끙."
윤종이 한숨을 푹 내쉰다.
'예전에는 다들 착했던 놈들인데.'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 버렸는가?
윤종이 고개를 돌려 이 모든 일의 원흉을 바라보았다.
화종지회라는 커다란 행사가 눈앞에 있음에도 귀찮아 죽겠다는 얼굴로 축 늘어져 있는 청명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온다.
"청명아."
"응?"
"할 말 없느냐?"
청명이 피식 웃는다.
"뭐 대단한 일 한다고."
청명이 슬쩍 고개를 돌려 비무장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빨리 끝내고 밥 먹어야 하니까. 가자고."
윤종이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오냐, 이놈아."
다른 건 몰라도 하나는 확신할 수 있다.
평소에는 지랄 맞기 짝이 없는 놈이지만, 이럴 때만은 든든하기 한이 없다.
"가자!"
윤종이 선두에 서서 모두를 이끌고 비무장으로 향했다.
그 뒤를 따라나서는 청명이 가만히 눈을 빛냈다.
* * *
화종지회는 기본적으로 화산과 종남의 교류를 위해 만들어진 행사다.
물론 속으로야 화산은 화산대로, 종남은 종남대로 다른 속셈이 있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비무를 중심으로 한 교류에 그 목적을 두고 있다.
그렇기에 화종지회는 따로 방문자를 받지 않는다.
지금까지는 오로지 화산과 종남의 문도들만이 모여서 서로를 이기기 위해 비무만 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이번 화종지회 역시 특별히 다를 것은 없다.
비무장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웅성웅성.
"……."
현종이 눈을 크게 뜨고 연무장을 바라보았다.
화산의 산문을 지나면 바로 대연무장이 나온다. 비무라는 특성상 넓은 자리가 필요하다. 그렇기에 화종지회는 예외 없이 이 이곳에서 치러졌다.
지금까진 이 너른 연무장을 중심으로 좌우에 화산과 종남의 제자들이 도열하는 게 전부였다만, 오늘은 다소 이상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이, 이분들은 대체……?"
화종지회가 벌어질 연무장 주변으로 정체불명의 인파가 모여 있었다.
심지어 그게 다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산문으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고 있다.
더 기이한 것은, 지금 들어오고 있는 이들의 손에는 하나같이 집기들이 들려 있단 점이다. 그들은 저마다 의자나 탁자 같은 것들을 연무장 주변으로 나르는 중이었다.
현종은 난데없는 사태에 당황하여 잠시간 말을 잃고 말았다. 그때 운암이 다급한 얼굴로 다가왔다.
"장문인."
"이게 다 무슨 일이더냐?"
"산문에 몰려온 이들이 화종지회를 자신들의 눈으로 보겠다고, 다짜고짜 출입을 요구했습니다. 워낙 많은 이들이 몰려온 통에 무턱대고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으으음."
현종이 침음을 흘렸다.
"종남에서 부른 것인가?"
그렇다면 목적이야 뻔하다.
화산이 그들에게 패하는 모습을 저들에게 적나라하게 보여 주겠다는 것이겠지.
처음에 볼 때는 몰랐지만, 다시 보니 중인들의 복색이 꽤 화려하다. 개중 현종도 아는 얼굴이 몇몇 보이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섬서의 유지들을 초청한 모양이었다.
알아본 이들만 해도 섬서십대상단주에 지역의 명사들이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는 심지어 관복을 입은 이들까지 보인다.
저들이 섬서에 끼치는 영향력을 감안한다면, 오늘 화종지회에서 보고 들은 일들은 순식간에 섬서 전역으로 퍼져 나갈 것이다.
'치졸한!'
그 사특한 생각에 살짝 열이 오른 현종이 평소보다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일갈한다.
"외인을 허락 없이 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모르느냐?"
"하나, 장문인."
"저들의 뜻이 뻔한 것을 어찌 당해 주었단 말이더냐?"
"그, 그게 아니옵고……."
"응?"
그때 현종의 귀에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장문인. 이건 사전에 조율되지 않은 일 같습니다만?"
현종이 고개를 돌렸다.
종남의 장로인 사마승이 살짝 당황한 얼굴로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현종은 사마승의 '당황'에 주목했다.
'종남이 벌인 일이 아니라는 말인가?'
사마승이 저들을 불렀다면 저리 당황한 얼굴로 저런 질문을 할 이유가 없다. 되레 느긋하게 걸어와 이죽거렸겠지.
현종이 슬쩍 운암을 돌아보았다.
"어찌 된 일이냐?"
"일단 막아 보려 했습니다만, 저분들을 모셔 오신 분이……."
"접니다, 장문인."
현종과 사마승의 시선이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돌아갔다. 퍽 낯익은 사람이 미소를 지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황 대인이 아니시오."
"황 대인?"
은하상단의 황문약이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격조했습니다."
황 대인이 가만히 포권 한다. 두 사람은 일단 황 대인의 인사를 받았다. 하지만 여전히 얼굴에 의문이 가득하다.
손을 푼 황 대인이 빙그레 미소를 짓는다.
"화종지회가 열리는데 관객이 없으면 흥이 살지 않을 것 같아, 제가 사람들을 조금 모셔 봤습니다."
"으음."
현종이 미간을 찌푸리며 막 한마디 하려는 순간, 사마승이 선수를 쳤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요. 하기야 마지막으로 열리는 종화지회이니 섬서의 축제가 되어도 괜찮겠지요."
그러면서도 은근히 종화지회라는 말에 힘을 주는 사마승이었다.
현종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황 대인이 사람을 초청하고 종남에서 동의를 해 버린 이상 그가 나서서 반대하기는 어렵다. 이 험난한 화산을 올라온 이들에게 그냥 돌아가라고 말을 한다?
'안 될 일이지.'
화산의 각박함을 성토하는 말이 섬서 전역으로 돌 것이다. 저들의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말이다.
'어렵구나.'
이들을 문전박대하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현종은 내심으로 탄식을 내뱉고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시지요. 이왕 오신 것 편히 즐기다 가십시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장문인. 그럼."
황 대인이 빙그레 미소를 짓고는 몸을 돌린다. 무영개도 실실 웃으며 황 대인과 함께 만들어지고 있는 관객석으로 향했다.
앞장서 걸어가던 황 대인이 슬쩍 고개를 들려 청명을 바라본다.
'됐소이까?'
청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눈빛을 교환하며, 황 대인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소도장은 항상 나를 놀라게 하는군. 이번에는 또 무슨 짓을 벌이려는 건가.'
황 대인에게 섬서의 유지들을 모아 오라 시킨 이는 다름 아닌 청명이다. 화음에 있는 소단주를 은밀히 방문해 황 대인에게 말을 전한 것이다.
- 일단은 좀 유명하다 싶은 사람들은 다 끌고 오세요.
'일단 시키는 대로는 했소. 뒷일은 나도 모르오, 소도장.'
황문약의 눈빛을 받으며 청명이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판은 키워야 제맛이지!'
아무도 없는 곳에서 화산이랑 종남끼리 서로 치고받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결과를 낸다고 해도 종남이 입을 닫아 버리고 화산이 떠들어 대서는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모두가 이 화종지회의 결과를 그 두 눈으로 보게 만들어야 한다.
"그럼 준비는 이걸로 끝이고."
"응?"
"아냐, 아무것도."
내가 말해 준들 니들이 알겠냐?
뱁새가 황새의 뜻을 어찌 알리……. 어? 이거 뱁새랑 황새 아닌가?
여하튼!
장문사형! 제가 이렇게 머리를 굴립니다, 제가! 예전에 저보고 멍청하다고 했던 것 취소하십시오!
- 잔머리는 원래 잘 돌아갔지.
"거 진짜! 칭찬 한마디 해 주면 어디 덧나나?"
조걸이 눈을 찌푸리며 청명을 돌아본다.
"아까부터 왜 자꾸 혼잣말이야. 긴장했냐?"
"……."
청명이 한숨을 내쉬는 동안 대충 준비가 끝났다.
의자가 탁자의 배치가 완료되었고 연무장으로부터 거리를 조금 두고 관객들이 착석했다. 집기를 가져온 하인들이 그 뒤로 우르르 도열한다.
"시작하는 모양이다."
누군가의 긴장된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뒤 운암이 연무장 한가운데로 가만히 걸어 나온다. 연무장의 중앙에 선 그는 주변을 한번 둘러보고는 양손을 모아 관객들에게 포권 한다.
그러더니 이윽고 가슴을 쭉 펴고 심호흡을 했다. 근엄하고도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럼 지금부터 금년의 화종지회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