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저 새끼들한테 지면 다 뒈지는 거야. (4)
청명은 산을 오르며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없지?'
혹시나 유이설이 또 따라붙을까 봐 바짝 긴장했던 청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세상 무서울 것이 없던 청명이다. 과거 매화검존으로 불리던 시기에는 그를 무서워하는 이는 있었어도 그가 무서워하는 이는 없었다.
심지어 소림의 장문인도 그를 만나기를 꺼려 하지 않았던가?
그런 청명이 이제는 어린 여자아이가 껄끄러워 피해 다니는 처지가 되다니.
"뭔 말이 통해야 상대를 하지."
생각 같아서는 대가리를 깨서 동아줄로 칭칭 감은 뒤 절벽에 던져 버리고 싶지만, 그래도 사고인데 팰 수는 없잖은가?
응?
백천은 뭐냐고?
"그 새끼는 지가 먼저 덤볐고."
시비를 거는 사숙과 귀찮게 하는 사고가 어찌 같을쏘냐?
여하튼 덕분에 생전 처음으로……. 아니 한 번 죽고 나서도 처음으로 사람을 피해 다니는 청명이었다.
"이 새벽에 사람을 피해 다니다니, 내가 어쩌다가."
한숨을 푹푹 내쉰 청명이 막 산으로 질주를 하려는 순간이었다.
'응?'
뭔가 인기척이 느껴진다.
"이봐! 이봐!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귀신을 속여라 나를 속이……. 어?"
청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느껴지는 기감이 유이설의 그것과는 다르다. 유이설은 천하의 청명이 기감을 세워도 흐릿하게 느껴지는, 환상적인 무존재감을 자랑한다.
그러니 청명도 몇 번이나 그녀의 기척을 놓친 것이다.
하지만 지금 느껴지는 감각은 유이설의 것이라기에는 너무도 강하고 선명하다. 그리고…….
"두 명?"
심지어 한 명도 아니다.
살짝 미간을 좁힌 청명이 조심스레 기감이 느껴지는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 새벽에 두 사람이 이 깊은 산속에서 따로 만난다니. 이거이거 음모의 향기가 솔솔 풍긴다.
'무슨 수작질인지 확인해야지.'
청명의 두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쇄애애액.
그의 발이 바람을 가르며 힘차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기감이 느껴지는 곳에 거의 도달한 청명이 기척을 죽이고 가만히 주변과 자신을 동화시켰다.
그리고 슬금슬금 앞으로가 고개를 살짝 내민다.
'어?'
청명이 눈을 끔뻑였다. 하지만 아무리 다시 봐도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한 명은 청명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백천.
백천이 이곳에 있는 건 이상하지 않다. 어쨌든 여기는 화산의 영역이니까.
하지만 백천의 반대편에 선 사람이 여기에 있는 건 이상해도 너무나 이상했다.
'니가 거기서 왜 나와?'
진금룡.
종남의 이대제자 중 대사형인 진금룡이 기이한 표정으로 백천과 대립하듯 서 있다.
'얘들 둘이 왜 이 시간에 따로 만나지?'
뭔가 음모의 냄새가 폴폴 난다.
청명이 슬쩍 앞쪽으로 더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잘 지내는 것 같아 보이는구나."
진금룡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백천에게 말을 건넨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백천의 얼굴은 불쾌함을 감추지 못하며 일그러졌다.
"여유로워 보이는군."
"그러질 이유가 없지 않느냐? 동룡아."
"풉!"
진금룡과 백천의 시선이 동시에 한쪽으로 돌아간다.
'아 씨.'
청명이 필사적으로 숨을 죽였다.
동룡이라는 말의 어감이 청명을 참지 못하게 만들었다.
두 사람이 고개를 갸웃하고는 다시 서로를 마주 본다. 아마 짐승 소리 정도로 생각한 모양이다.
백천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나를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라. 나는 백천이다."
"부모가 주신 이름을 함부로 버리는 게 아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너는 진동룡(秦銅龍)이다."
'끄으으으으.'
청명이 바닥을 움켜잡았다.
'아이고. 나 죽는다. 동룡이래. 백천이 원래 이름이 동룡이구나. 아 배 찢어지겠네.'
청명의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백천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붉어졌다.
"백천이라니까!"
"알았다, 동룡아."
와, 저 새끼 진짜 제대로 먹이네.
저리 싫다고 얼굴까지 시뻘겋게 붉히는데, 면전에 대고 계속 동룡이질이네. 성격 진짜 나쁘구만.
그런 청명의 평가를 아는지 모르는지 진금룡은 살짝 미소 띤 얼굴로 대화를 이어 갔다.
"화산에서 살아가는 게 나쁘지는 않은 모양이지? 얼굴이 꽤 괜찮구나?"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그저 보고 싶었다."
진금룡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진다.
"이 형을 꺾겠다고 가출해 화산에 들어간 못난 동생 놈이 어떤 꼴로 살고 있는지 말이다."
"이 년 전에도 확인했을 텐데?"
"나는 패배한 개를 걷어차 주는 건 몇 번을 해도 지겹지 않은 사람이라 말이다."
백천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진금룡은 원래 저런 사람이다. 자신보다 약하다고 생각하는 이에게는 더없이 가차 없는 사람. 평소에는 온화함으로 자신을 위장하지만 그 안에는 썩어 문드러진 속이 감춰져 있다.
예전부터 저 진금룡에게 얼마나 괴롭힘을 당했던가?
"어떠냐? 네가 지금이라도 엎드려 빈다면 너를 종남에 받아 줄 수도 있다."
"개소리 하지 마."
백천이 진금룡을 똑바로 보고 말한다.
"나는 화산의 이대제자이자, 대사형인 백천이다. 이제 내 꿈은 화산을 종남 이상의 문파로 만드는 거야. 그러니 다시는 내 앞에서 그런 말 따윈 꺼내지 마."
'오?'
청명이 반짝거리는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어디 보자.
정리하자면 저 두 사람이 형제라는 건가? 하나는 금룡이 하나는 동룡이.
'……애비가 누군지 꼭 보고 싶다.'
이 찢어지는 배 근육의 원수는 반드시 갚고야 말겠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애들 이름을 저따위로 지었나! 그러니 애가 가출을 하지!
백천이 으르렁대듯 말했다.
"그리고 어차피 내가 빈다고 해도 너는 웃으며 이 말은 없던 것으로 해 버리겠지. 너는 원래 그런 놈이니까."
"하하. 형제라는 건 기이하군. 그리 오래 떨어져 살았는데도 나를 그리 잘 안다니."
한참 웃던 진금룡이 갑자기 정색을 하고는 차갑기 그지없는 눈으로 백천을 바라보았다.
"너는 잘못된 선택을 했다."
"……."
"나를 꺾고 싶었다면 종남에 입문했어야지. 그래야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었을 거다. 그런데 종남이 아니라 화산? 이 다 쓰러져 가는 문파에 입문해 나를 꺾겠다고? 하하하. 개가 웃겠구나!"
백천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화산을 무시하지 마."
"호오?"
"그래. 네 말이 맞아. 내가 처음에 화산에 적을 둔 이유는 그 치기 때문이지. 나를 무시하고 괄시했던 형을,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화산을 이끌고 꺾겠다는 생각이었지."
"치기라고 하기에도 너무 멍청한 생각이구나. 너답다고 해야 하나."
지속적으로 쏟아지는 이죽거림을 무시하며 백천이 단호하게 말했다.
"처음에는 분명 어린 치기였지. 하지만 지금의 나는 진짜 화산이 좋아. 화산의 이대제자이자 대사형인 백천으로 살아가는 게 더없이 보람차단 말이다."
'호오오?'
청명이 기특해 죽겠다는 눈으로 백천을 바라보았다.
'그런 사정이 있었군.'
반드시 강해져야 한다더니 나름대로의 이유는 있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청명은 백천의 발언에 은근히 감동받고 있었다.
'아, 다 쓰러져…….'
"이 다 쓰러져 가는 문파의 이대제자로 살아가는 것에 보람을 느낀다고? 이 망한 문파에? 정신이 어떻게 되어 버린 거 아니냐?"
저 새끼가?
아니, 그거 원래 청명이 하려던 말이지만, 저 새끼가 말하는 걸 들으니 또 빡치네?
확 주둥아리를 그냥!
"그래."
백천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상해 보일지 모르지. 하지만 나도 이곳에 와서 알게 됐어. 좋은 문파에서, 좋은 음식에, 좋은 옷을 입고 떵떵거린다고 해서 행복한 게 아니야. 적어도 이곳은 나를 필요로 해 주고, 나도 이곳을 반드시 남부럽지 않게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울 수 있었으니까. 화산은 내게 목표를 준 곳이고 나아가 이런 나를 애정으로 감싸 준 곳이야!"
"애정?"
진금룡이 학을 떼듯 말했다.
"그런 말랑한 소리를 지껄이다니, 아직 현실을 덜 본 모양이구나. 내가 말해 주지. 너는 이미 끝났다. 이 한심한 선택을 한 대가로 너는 평생을 삼류 무사로서 굴욕만 당하며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내가 종남의 장문인이 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되겠지."
"그게 뭐 어쨌다는 건데. 나는 내 인생을 살 뿐이야."
"쓰레기 같은 인생을 살게 되겠지. 뭐 그것도 나름 지켜보는 재미가 있겠지만."
진금룡이 비릿하게 웃으며 말한다.
"하지만 오래도록 지켜보는 것도 성미에는 맞지 않군. 기다릴 것 없이 당장 내일 네게 알려 주겠다. 종남이 아닌 화산을 선택한 게 얼마나 멍청한 짓이었는지 말이다."
그리고 뭔가 살짝 고민하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 진금룡이 비웃음을 입에 걸었다.
"아니, 아니지. 어쩌면 좋은 선택이었을지도 모르지. 몰락한 문파와 멍청한 놈이라니 이보다 잘 어울리는 조합이 있을까?"
"나를 모욕하는 건 상관없다. 하지만 그 입으로 화산을 들먹이지 마. 입을 찢어 버릴 테니까."
"……네까짓 놈이?"
진금룡이 백천을 노려보았다. 치솟는 살기에 백천이 움찔한다.
그렇게 한동안 백천을 쏘아보던 진금룡이 돌연 살기를 거두고 피식 웃었다.
"급할 것 없겠지. 날이 밝으면 알게 될 테니까. 너도 화산도 내일이 지나면 더 이상 강호에 얼굴을 들이밀지 못하게 될 것이다. 바로 내가 그렇게 만들어 주지."
진금룡이 백천을 일별하고는 몸을 돌렸다. 그러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산을 내려갔다.
그런 진금룡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백천이 깊은 한숨을 내쉰다.
'해낼 수 있을까?'
진금룡은 한다면 하는 사람이다. 인성과는 별개로 실력은 백천이 감히 따를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니까.
백천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흔들리지 마.'
나는 화산의 백천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화산의 장문인이 되어서 화산의 영화를 다시 꽃피울 사람이다.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중얼거리던 백천이 단호하게 몸을 돌리려는 순간.
"크으, 기특한 거 보소."
"와! 씨바! 깜짝이야!"
기겁을 한 백천이 저도 모르게 쌍욕을 퍼부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얼마나 놀랐는지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지경이다.
겨우겨우 정신을 차려 고개를 들어 보니 청명이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너, 너……. 네가 왜 여기에?"
"동료……. 끄윽. 도, 도, 동룡아."
청명이 새어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아 가며 말하자 백천의 얼굴이 한껏 일그러졌다.
"……다 들었느냐?"
"크으, 동룡아. 이 사질은 감탄했다. 화산을 생각하는 그 갸륵한 마음이라니."
청명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자 백천이 한숨을 내쉰다.
"귀신 같은 놈.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뭐 당연한 거지."
"……잘못한 것은 없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말아다오. 좋게 생각하지 않는 이들도 있을 테니까."
"걱정 마십시오, 사숙. 이 청명! 입이 무겁기로는 천하에서 마지막이라면 서러운 사람입니다."
"……."
그거 입이 미친 듯이 싸다는 소리 아닌가?
걸려도 하필 이놈에게 걸렸다는 생각에 백천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 일은 장문인을 비롯한 몇몇 장로 말고는 아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흐음. 그래서 사숙이 진금룡의 동생이라는 거지?"
"동생이라고는 해도 그리 친근한 관계는 아니다. 애초에 어머니도 다르고……."
백천이 한숨을 내쉬고 뭔가 말을 이어 가려 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아아, 됐어."
"응?"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안 들어도 돼. 뭐 뻔하겠지. 서자거나 막내로 태어나서 재능 있는 형한테 치여 대접도 잘 못 받고 어쩌고 해서 가출하고 화산으로 왔다. 아냐?"
"……남의 인생을 그렇게 간단하게 줄이지 마라."
하지만 맞는 말이다.
"잘했어."
"그래. 그러니……. 응?"
백천이 고개를 번쩍 든다.
"잘했다고. 화산으로 오길."
청명이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표정을 지었다. 항상 사람의 성질을 긁어 놓던 그 미소가 아니다. 정말 부드러워 보이는 미소였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무거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출신이 어떻든, 사연이 어떻든 제 발로 화산을 찾은 이상 사숙은 화산의 제자야. 그리고 종남을 버리고 화산을 선택한 게 결코 잘못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 주지."
백천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 어린놈이 할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편안하게 가라앉는다.
"증명이라니. 언제쯤?"
"언제는 언제야?"
청명이 씨익 웃는다.
"오늘이지."
청명이 고개를 돌렸다.
이제 조금 있으면 화종지회를 알리는 해가 뜰 것이다.
"어디 한번 날뛰어 보자고. 사숙."
청명의 눈에 귀기가 어렸다.
이제 저 종남 놈들의 코를 뭉개 버릴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