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저 새끼들한테 지면 다 뒈지는 거야. (3)
화산의 접객청인 청매관 안이 기묘한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중앙 쪽 의자에 앉은 진금룡이 눈을 가늘게 뜨고 중얼거렸다.
"마음에 안 드는군."
방금 식사를 마치고 온 참이다.
깨끗하게 정리된 식당과 군침이 절로 넘어가는 음식들은 산을 올라오느라 허기진 배를 채우는 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하지만 바로 그 사실이 진금룡의 심기를 긁고 있었다.
"어디 금맥이라도 발견했나?"
화산은 모든 면에서 종남보다 못해야 한다.
아직 화산의 부와 종남의 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걸 안다. 그럼에도 그 격차가 좁혀졌다는 사실이 더없이 진금룡을 불쾌하게 했다.
종서한이 슬쩍 그의 눈치를 보고는 어색하게 웃는다.
평소 진금룡은 더없이 온화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 모습만을 보고 그가 온화한 성향이라고 판단한다면 반드시 낭패를 보게 된다.
종서한이 아는 진금룡은 바다와 같은 사람이다.
바다는 평소에는 잔잔하게 모두를 포용하지만, 화가 나면 거친 격랑이 되어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진금룡이 꼭 그랬다. 평소에는 더없이 부드럽지만, 화가 났을 때는 종남의 그 누구보다 무서운 사람이 된다.
종서한이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화산이 꽤 건방진 건 사실입니다, 대사형."
"음."
"하지만 결국 중요한 건 무학 아니겠습니까? 겉을 번지르르하게 치장한다고 해도, 비단옷을 걸치고, 좋은 것을 먹고 지낸다고 해도 무학이 받쳐 주지 못한다면 빛 좋은 개살구인 법이지요."
"맞는 말이다."
진금룡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모여 있는 사형제들을 돌아보았다.
"하나!"
진금룡이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일갈한다.
"내가 원하는 건 완벽한 승리다!"
모두가 숨을 죽인다.
"명성, 부, 무학, 그 어느 하나도 비견되지 않는 완벽한 압승. 그게 아니면 의미가 없다. 이미 몰락한 화산 따위와 조금이라도 비교가 되는 부분이 있다면 그건 종남의 수치다. 우리는 겨우 이런 곳에서 발목을 잡혀서는 안 된다. 잊었느냐? 우리의 대에서 기필코 종남을 천하제일문파로 만들어야 한다."
종남 이대제자들의 눈에 단호한 결의가 어렸다.
"스스로를 다잡아라. 여행이라도 온 것처럼 마음이 풀어져 있는 너희의 꼴이 나를 화나게 하는구나. 우리가 이곳에 온 목적을 잊지 마라. 종남의 제자다운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놈들은 장로님 이전에 내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사형!"
"결코 방심하지 않겠습니다."
짝짝짝짝.
그때, 문이 활짝 열린다.
그리고 사마승이 박수를 치며 안으로 들어섰다.
"훌륭하다."
"장로님을 뵙습니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하자 사마승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해야 할 말을 금룡이 대신 해 주었구나."
"부끄럽습니다. 장로님이 오고 계신 줄 알았더라면 결코 이런 말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아니. 아니다. 더없이 훌륭한 말이었다. 종남의 제자는 당연히 그러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손을 내린 사마승이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에 더해."
"예, 장로님."
"이번 종화지회는 그저 승리하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 된다. 저들이 감히 종남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도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진금룡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말씀은?"
"비무는 무를 견주는 것. 서로를 해하지 않는 것이 기본이다. 그렇지 않느냐?"
살짝 생각에 잠겼던 진금룡이 미소를 지었다.
"장로님."
"음?"
"화산 제자들의 기세가 굉장히 날카롭습니다. 예전의 그들이 아닌 것 같습니다."
"흐음?"
갑자기 약한 소리를 늘어놓는 진금룡의 태도에 사마승이 슬쩍 표정을 굳혔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그의 표정이 다시 부드럽게 풀렸다.
"비무란 서로를 해하지 않는 것이 기본입니다. 하지만 저들의 기세가 예상보다 날카롭다 보니 사정을 봐주는 것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이쪽이 다치지 않기 위해선 팔다리 하나쯤 부러뜨리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을 듯한데, 괜찮으시겠습니까?"
"허어. 그거 큰일이로구나."
사마승이 고민하는 척 턱에 손을 가져다 댄다.
"안 되지. 안 되지. 그래서는 안 될 일이야. 아무리 비무가 중요하다지만 우리 아이들이 다쳐서는 그 의미가 없는 법이지. 너희는 이번 비무를 최대한 다치지 않는 선에서 끝내도록 해라. 설사……."
사마승이 비릿하게 웃으며 말을 잇는다.
"저들을 상하게 하더라도 말이다."
그 말이면 되었다는 듯 진금룡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제들을 잘 다스려 사고 없이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흠, 좋군."
사마승이 미소를 지으며 진금룡을 바라보았다.
이런 아이가 하나 있으면 세상에 걱정이 없어진다. 훗날 진금룡이 장문인이 되어 이끌 때, 다시없는 종남의 전성기가 시작될 것이다.
물론 지금도 그 역할을 충분히 해 주고 있지만.
"금룡아."
"예, 장로님."
"내 다른 것은 너에게 맡기마. 하지만 네게 하나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다."
"하명하십시오."
"그 건방진 놈을 절대 그대로 놔두지 마라."
"……."
진금룡의 머리에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마 다른 사형제들도 마찬가지로 한 사람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화산과 건방짐을 조합해서 나올 사람은 한 사람밖에는 없으니까.
"그 청명인가 하는 아이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진금룡이 빙그레 웃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아이는 제가 확실히 버릇을 고쳐 두도록 하겠습니다."
"네가 조금 얕게 생각하는구나."
"……예?"
자신도 모르게 반문하고만 진금룡이 무례를 저질렀다는 생각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 아이는 이미 은하상단에서 화산에 큰 공을 세웠다. 모두 알고 있겠지."
"예."
모두가 힘차게 대답하는 와중에 이송백만이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은하상단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작아지는 것을 어찌할 수 없는 이송백이다.
사마승이 그런 그에게 짧게 눈길을 준 다음 말을 이어 갔다.
"내 보아하니 화산에서 그 아이에게 주는 신뢰가 적지 않은 듯하더구나. 그런데도 그런 성격이다. 이게 뭘 의미하는 줄 알겠느냐?"
"제자가 우매하여 짐작이 어렵습니다."
"세상은 능력을 갖춘 자가 치고 올라가는 곳이다. 하지만 때로는 능력이 없는 이가 기세를 타서 말도 안 되는 업적을 만들어 버리는 곳 역시 세상이다. 나는 그 아이가 이대로 자라난다면 종남의 큰 우환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진금룡이 미간을 좁혔다.
'그 정도씩이나?'
"외람된 말씀이지만 아직 아이가 아닙니까?"
"그래서다."
"……."
사마승이 으르렁대듯 말했다.
"이제 겨우 약관도 되지 않은 아이가 내 앞에서 제 할 말을 다 지껄였다. 그런데 저 아이가 성장하면 어떻게 되겠느냐?"
"……으음."
"둘 중 하나겠지. 과하게 성장하거나 아니면 파멸하거나."
"파멸할 가능성이 훨씬 높지 않습니까?"
"나는 그 아이가 성장하여 화산을 키워 낼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 그러니 싹을 잘라 버려야지."
"장로님이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지 이해했습니다."
진금룡이 고개를 돌렸다.
"우량."
"예, 사숙!"
뒤쪽에서 선우량이 재빨리 달려 나왔다.
"장로님의 말씀을 들었겠지?"
"물론입니다, 사숙.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시는 그 방자한 주둥아리를 놀리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부숴 버리겠습니다."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다시는 재기할 수 없게 만들어라. 종남에 대항한 것을 평생토록 후회하도록 말이다."
"예! 사숙!"
진금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우량은 종남의 삼대제자 중 제일가는 기재라 불리는 이다. 삼대제자 중 나이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실력 하나만은 제일이다.
특히나 그 실력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게 지난 종화지회 다음이었기에, 화산은 선우량이 어떤 이인지도 모를 것이다.
청명을 잡기에는 최고의 패라고 할 수 있다.
진금룡이 빙그레 웃으며 사마승을 돌아보았다.
"모든 것은 장로님이 원하시는 대로 될 것입니다. 제가 그리 만들겠습니다."
사마승이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내 너를 믿으마."
더없이 믿음직스럽다.
종남이 열과 성을 다해 키워 낸 아이들이다. 그동안의 모든 노력이 이 아이들을 통해 종남의 전성기를 열어젖힐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사마승이었다.
그리고 이번 종화지회는 그 서막을 알리는 기회가 될 것이다.
'철저하게 짓밟아 주지.'
사마승의 눈에 냉막한 살기가 어렸다.
* * *
"……진짜 하는 건가?"
"심장 떨려 죽겠다."
"저는 오늘 측간에 열두 번 다녀왔습니다."
"아, 더럽게."
삼대제자들이 늦은 밤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내일이면 화종지회가 시작된다. 지금까지는 수련을 버티는 것만으로도 숨이 깔딱깔딱 넘어갈 판이라 화종지회고 나발이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체력을 보존하기 위해 수련을 하루 쉬니 온갖 잡생각이 머리를 지배한다.
"정말 우리 잘할 수 있을까요?"
"청명이 된다고 했잖느냐."
"아니, 걔도 종남 애들이랑 붙어 본 적은 없잖습니까."
"그렇긴 하다만……."
윤종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제들이 불안해하는 것은 알지만 그도 딱히 그들을 진정시킬 말을 찾을 수 없었다.
'당장 내가 불안해 미치겠는데.'
심장이 계속 쿵쿵대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슬쩍 옆을 보니, 천하의 조걸마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니 새벽을 앞둔 늦은 시간에도 아무도 잠에 들지 못하고 이곳에 모여 있는 것이겠지만.
윤종이 머리를 두어 번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청명은?"
"잡니다."
"……그놈은 간을 쇠로 만들었나."
긴장이라는 게 없나? 긴장이라는 게?
당장 내일이 화종지회인데? 아니, 이제 오늘이라고 해야 하나? 자정을 지났으니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쿵쾅대는데.
"아까부터 자던데요."
"대자로 뻗어 있는 걸 봤습니다. 코까지 골던데요."
"……부럽기도 하고, 미친 것 같기도 하고."
둘 다겠지.
윤종이 막 입을 열려는 순간 심드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간이 큰 게 아니라 니들이 간이 콩알만 한 거지."
모두의 고개가 일제히 계단 쪽으로 돌아갔다.
청명이 심드렁한 얼굴로 내려오고 있었다.
"뭐 한다고 이 시간까지 안 자고 옹기종기 모여 있어."
"기, 긴장이 돼서."
"긴자아아앙?"
청명의 고개가 삐딱해진다.
'또 시작이다. 저 새끼!'
'또 무슨 구박을 하려고.'
'뭐긴. 또 지면 뒈진다고 하겠지. 악독한 놈!'
하지만 청명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들의 예상을 조금 비껴갔다.
"왜 긴장하지?"
"……응?"
"긴장이라는 건 준비를 덜 한 사람이 하는 것 아닌가?"
윤종이 대표로 대답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내일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할까 봐……."
"사형."
"응?"
"그럼 시간을 열흘 전으로 돌리면 사형이 더 할 수 있는 건 있어?"
"……."
없지. 아니 생각만 해도 속이 안 좋아질 지경이다. 이 미친 짓을 열흘 동안 다시 해야 한다니.
"할 걸 다 한 사람한테 긴장이라는 건 없는 거야. 지금 사형들은 긴장한 게 아냐. 그냥 스스로를 못 믿는 거지. 그런데 그것도 웃긴 소리지. 약하면 약한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해. 중요한 건 정말 최선을 다했는가야. 사형은 최선을 다했어?"
"……그래."
이건 정말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정말 최선을 다했다.
"그럼 그걸로 됐어."
청명이 손가락을 튕긴다.
"모두가 뭐라 하더라도 나는 사형들이 최선을 다했다는 걸 인정해 줄 거야. 그러니까 쓸데없는 걸로 시간 낭비하지 말고 가서 자. 전날 충분히 자서 몸 상태를 유지하는 것도 실력이고 노력이니까."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올라가."
"……넌 어디 가는데?"
"나는 수련해야지."
"오늘이 화종지회인데?"
"그거 뭐 대단한 거라고. 그딴 거보다 수련이 열 배쯤 중요해."
그 말을 끝으로 청명은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그러자 다들 낮은 탄식을 터뜨린다.
"거 진짜……."
"수련하러 가네."
화종지회 당일까지 평소의 생활을 유지하는 청명을 보고 있자니 지금까지 끙끙거리며 했던 고민이 바보같이 느껴진다.
"자자."
윤종이 낮게 말했다.
"청명의 말이 맞다. 마지막까지 노력했다고 자신 있게 대답하려면, 잠을 청하는 노력까지 해야겠지."
"예, 사형."
모두가 같은 심정이었는지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나둘 자신의 방으로 향하는 사형제들을 지켜보던 윤종이 고개를 슬쩍 돌려 청명이 나간 문을 바라보았다.
'여하튼 이상한 놈이라니까.'
그 몇 마디 안 되는 말로 이 새벽까지 잠을 못 이루던 이들을 나른하게 풀어 버렸다.
화종지회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저 청명이 있는 이상 삼대제자들은 더욱 더 강해질 것이다.
윤종은 그리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