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저 새끼들한테 지면 다 뒈지는 거야. (2)
사마승은 건너편에 앉은 화산의 장문인 현종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현종이라.'
몰락해 가는 화산을 어떻게든 부여잡아 망하는 것만은 막아 낸 이가 바로 현종이다. 종남의 장문인이 현종을 평가하기를, 이런 시절이 아니었다면 누구보다 훌륭한 장문인이 되었을 사람이라 하였다.
'과대평가시지.'
현종은 단 한 번도 뛰어남을 보여 준 적이 없는 사람이다. 가정을 앞에 붙인다면 훌륭한 평가를 받지 못할 사람은 없다. 한 사람의 훌륭함은 성격이 아니라 업적으로 평가받는 것이다.
사마승이 고개를 슬쩍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현종의 좌우로 무각주와 재경각주를 비롯한 현자 배, 그리고 운암과 운검을 비롯한 운자 배들이 정좌해 있다.
그를 맞이하기 위해 화산의 주요 인사들이 모두 모인 것이다. 이 광경을 처음 보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이전과는 느낌이 조금 다르다.
이전 종화지회 때 보았던 이들은 하나같이 삶에 찌들어 있었고, 어딘지 모르게 억눌려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들에게서는 억눌림은 찾아볼 수 없고, 되레 은근한 여유마저 느껴진다.
'마음에 들지 않는군.'
사마승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이 자신감의 근원이 무엇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게 돈이든 무학이든 아니면 그저 근거 없는 허세이든, 화산이 종남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가졌을 리 없다.
사마승은 그저 화산의 윗배들이 자신감을 가진다는 사실 자체가 못마땅했다.
"차는 마음에 드시는지 모르겠구려."
현종이 넌지시 말을 건네자 사마승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향이 깊습니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오."
사마승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향이 짙은 건 사실이지만, 저는 애초에 매화 향을 그리 즐기지 않습니다."
현종의 눈이 살짝 꿈틀거렸다.
하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은 듯 부드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이유라도 있소이까?"
"숲에서는 여러 가지 향이 나는 법이지요. 흙의 냄새, 나무에서 배어나오는 내음, 그리고 이슬의 향까지. 하지만 매화가 만발한 곳에서는 오로지 매화 향밖에 나지 않습니다. 너무 짙어 주변의 모든 향을 가려 버리지요."
마치 과거의 화산이 그랬듯이 말이다.
"세상은 조화를 이루며 사는 곳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조화를 깨는 매화 향보다는 차라리 은은한 엽차 향을 더 즐기는 편입니다."
현자 배들은 그나마 담담한 신색을 유지했지만, 운자 배들은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일파의 장문인이 권한 차를 혹평한다는 것은 대놓고 시비를 거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현자 배들은 사마승의 말을 조금 다르게 받아들였다.
'패도를 추구했던 과거의 화산이 조화를 거부했다는 뜻인가?'
지금 이 순간에 굳이 저런 말을 꺼내는 건, 종남이 아직도 과거의 원한을 잊지 않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감히 일개 장로가 한 문파의 장문인의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사마승의 말을 지적하지 못했다.
사마승의 말대로 예의라는 것은 지키는 자의 뜻에 달린 것. 무례를 벌하지 못하는 순간 예의라는 것은 그저 허울이 되어 버린다.
몇 마디 되지 않는 말로 분위기를 자신이 원하는 대로 끌어온 사마승이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장문인."
"말씀하시오."
"저희 종남에서는 이번 종화지회를 끝으로 더는 이 행사를 이어 갈 생각이 없습니다."
현종이 미간을 좁혔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소?"
"간단합니다."
사마승이 슬쩍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화산과의 비무가 종남의 발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미 격차가 너무 벌어지지 않았습니까."
현종이 눈을 살짝 감았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기에는 너무도 치욕적인 말이다. 그의 좌우에 정좌한 장로들도 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자가…….'
현영의 수염이 파들파들 떨렸다.
이건 말 그대로 개무시나 다름없다. 어찌 장문인의 앞에서 저런 말을 해 댄다는 말인가?
그때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현종이 천천히 눈을 떴다.
"화종지회는 단순히 비무를 나누는 행사가 아니지 않소. 애초에 화종지회란 화산과 종남의 친교를 위한……."
"허울이지 않습니까."
사마승이 현종의 말을 잘랐다.
"이……."
현영이 막 발작하려는 찰나 현상이 현영의 무릎을 꾹 누른다.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뜻이다.
현상과 장문인을 번갈아 바라본 현영이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도를 넘지 않는가?'
당금의 화산과 종남이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문파라는 걸 모르는 이들이 어디 있겠는가? 심지어 화산의 문하들조차도 그 사실을 뼈저리게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화산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문파다. 비록 지금은 아니지만 백 년 전까지는 구파일방에 당당히 그 이름을 올렸고, 한때는 천하제일검문을 노렸던 곳이다.
심지어 화산이 아닌, 문도가 없는 삼류 문파의 장문이라고 해도 면전에서 이런 식으로 구는 건 예의가 아니다. 그걸 모를 리가 없는 사마승이 지금 대놓고 무례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사마승이 슬쩍 현영을 보더니 비릿하게 웃는다.
그 미소에 담긴 의미를 알면서도 현영은 허벅지를 움켜잡고 참아 낼 수밖에 없었다.
강호는 무정하다.
힘이 없는 이들은 그저 참아 낼 수밖에 없다.
방 안에 모인 이들을 한번 훑어본 사마승이 낮게 말을 이어 갔다.
"종남과 화산은 단 한 번도 사이가 좋은 적이 없습니다. 아니, 그냥 솔직히 말하면 차라리 원수에 가깝다고 해야 맞지 않겠습니까? 여기 계신 분들도 지금 저를 씹어 먹고 싶으시겠지요."
"……그렇게까지야."
"하면, 제게 좋은 감정을 가지신 분이 계십니까? 아니, 종남에 좋은 감정을 가지신 분은 계십니까?"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답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게 거짓임을 누가 모르겠는가? 그들도 알고 사마승도 안다.
"이미 끊어진 실을 다시 이으려고 노력하는 것만큼 부질없는 일도 없습니다."
사마승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이미 모든 것은 결정이 나 있고, 이건 그저 통보에 불과하다는 듯이 말이다.
한 문파의 장로가 이리 단언을 한다는 것은, 이미 장문인과는 이야기가 끝났다는 뜻이다. 그러니 이건 사마승의 뜻이 아니라 종남 전체의 뜻이리라.
나아가 종남은 지금 공식적으로 화산을 자신들의 발밑에 두겠다고 말하고 있다. 앞으로는 화산을 그들의 경쟁 상대로 여기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치욕적인 일이다.
너무도 치욕적인.
아무도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있을 때, 운암이 슬그머니 운을 뗐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 아닙니까?"
"이미 진즉에 그리했어야 할 일이오."
"장로님."
운암이 물러서지 않자 사마승이 슬쩍 그를 깔보듯 바라본다.
"하면 그대는 화산이 종남의 상대로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시오?"
운암이 입을 다물었다. 이 질문에는 대답을 할 수 없다.
사마승이 나직하게 웃고는 다시 말을 이어 간다.
"지금까지 화산을 대접해 준 것만으로 종남은 이미 할 도리를 다 했다고 생각합니다."
"대접이라니요. 말씀이 조금 심하십니다!"
운암이 목소리를 높이자 사마승이 비릿하게 웃는다.
"뭐가 심하다는 말이오?"
"……."
"종남은 과거의 원한을 잊고 꾸준히 화산을 도와 왔소. 사실 종화지회가 계속 화산에서 열린 것도 불공평한 처사가 아니오? 그럼에도 종남은 종화지회가 열릴 때마다 화산에 일정한 재물마저 지원해 오지 않았소. 그런데도 종남을 탓하겠다는 거요?"
그게 아니겠지.
운암이 이를 갈았다.
화종지회가 화산에서만 열렸던 이유는 뻔하다.
직접 와서 몰락해 가는 화산을 비웃고, 나아가 종남이 비무로 승리하는 모습을 화산의 모든 문도에게 보이기 위함이었지.
그리고 지원을 명목으로 건넸던 재물은 화산이 화종지회를 거절하지 못하게 만드는 먹이였을 뿐이고.
"장문인."
사마승이 다른 이들의 말을 눌러 버리며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이해하기 어려우시다면 이해하게끔 해 드리겠습니다. 이번 종화지회의 결과를 보시면 화산에서 먼저 다시는 종화지회를 열지 않겠다는 말을 하게 될 겁니다. 아이들을 망치고 싶지 않다면 생각을 잘 해 보시길 바랍니다."
사마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축객령이 떨어지지 않았음에도 방을 나서려는 듯 성큼성큼 걸어갔다.
모두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를 때 현종이 사마승의 등을 향해 넌지시 묻는다.
"종남은 패도를 걷는 것이오?"
사마승이 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슬쩍 고개를 돌려 현종을 바라보았다.
현종의 얼굴엔 그 어떤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아, 그 의중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건 제가 정할 일이 아니겠지요."
이윽고 사마승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남겨진 이들의 얼굴에 비통함이 가득 차오른다.
"어찌 저리 무도할 수 있다는 말인가?"
현영이 울분을 참지 못하고 다탁을 내리친다. 다탁이 쩌억 갈라지며 바닥으로 차가 쏟아진다. 하지만 아무도 그런 현영을 탓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운검이 무겁게 입을 연다.
"화종지회가 열릴 때마다 저들은 늘 패악을 부려 왔지만, 이번만큼 심한 건 처음입니다."
"맞습니다. 저건 도를 넘었습니다!"
"일개 장로에 불과한 이가 어찌 장문인의 앞에서!"
"종남에 직접 항의를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모두가 노기를 참지 못하고 한마디씩 보태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 현종만이 조금 처연한 얼굴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내버려 두어라."
"하나 장문인!"
"말이란 때로는 허망한 것이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한들 의미가 있겠느냐?"
운암이 고개를 숙였다. 다른 이들 역시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을 푹 숙였다.
현종이 말했다.
"치욕이야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다. 설령 내 얼굴에 침을 뱉는다 해도 나는 아무렇지 않게 웃을 수 있다. 지금 내가 걱정하는 것은 그게 아니다."
"……하면?"
"아이들이 걱정이구나."
"아……."
운암이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저리 직접 말하는 것을 보아, 이번 화종지회의 비무는 더없이 험난해질 것이다. 내가 다치고 모욕당하는 것이야 얼마든지 참아 낼 수 있지만, 아이들이 받을 고통을 어찌해야 좋겠느냐."
현종의 얼굴에 비통함이 어린다. 나약한 문파의 장문인으로서 짊어져야 할 짐이 너무도 무겁다.
"그럼 지금이라도……."
운암이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원래 그가 하고자 했던 말은 '지금이라도 화종지회를 멈추는 게 어떻겠느냐'였다. 하지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게 얼마나 황망한 말인지를 깨달아 버렸다.
무인이 상대가 두려워 승부를 포기한다는 건 죽음보다 더한 치욕이다.
더구나 비무를 치르는 이들은 서로 같은 배분이 아닌가? 같은 배분인 이와 싸워 보지도 않고 항복한다면, 그 오명은 제자들을 평생 쫓아다닐 것이다.
"내 죄가 너무 크구나."
현종이 깊은 탄식을 터뜨린다. 다른 이들 역시 현종을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하고 침묵만을 지킬 뿐이었다.
그때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운검이 입을 열었다.
"장문인. 그리만 생각하실 일은 아닙니다."
현종의 시선이 운검에게로 향했다.
"저들은 이번 비무로 화산과의 확실한 격차를 보여 주고 화산은 더 이상 명문의 자격이 없다는 말을 섬서 전역에 퍼뜨리려 할 것입니다. 이미 위상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본파에는 결정타가 되겠지요. 아마 그게 저들의 노림수가 아니겠습니까?"
"그렇겠지. 그런데 다른 기책이라도 있더냐?"
"기책이랄 것도 없습니다. 비무에서 당해 주지 않으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
"장문인."
그 어이없는 대답에 할 말을 잃어버린 현종을 보며 운검이 살짝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이들을 믿어 보십시오. 어쩌면 좋은 소식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
모두의 의혹에 찬 눈빛을 받으며 운검이 빙그레 웃었다.
'이제 네가 증명을 해야 할 차례다. 청명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