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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91화 (92/1,567)

91화. 저 새끼들한테 지면 다 뒈지는 거야. (1)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달리던 화산의 제자들이 그 자리에 황급히 멈춰 섰다. 하지만 운이 나쁘게도 하필 종남 문하들의 지척에 도달한 시점이었다.

힘겹게 숨을 몰아쉬는 삼대제자들 옆에서 청명이 사마승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그 얼굴을 본 사마승이 두 눈에 노화를 담았다.

"지금 뭐라 했느냐는 말이다."

"아, 그거요."

하지만 청명은 대답 대신 자신의 옆에서 비틀대고 있는 조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악!"

"뒈질라고! 똑바로 안 뛰어?"

"내가 사형이야, 인마!"

"아, 잠깐 잊었다."

청명이 머리를 벅벅 긁고는 사마승을 보며 히죽히죽 웃었다.

"들렸나 보네요. 민망하게."

"……."

사마승이 죽일 듯한 눈으로 청명을 노려보았다.

그 말이 누굴 향한 것인지 모를 사마승이 아니다. 이런 눈 가리고 아웅에 속아 줄 이유가 없다.

"이……."

그때 누군가 사마승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겼다. 이에 일갈을 하려다 멈춘 그가 슬쩍 뒤를 돌아본다.

진금룡이 작게 속삭였다.

"장로님. 아이와 드잡이하여 좋을 게 없습니다."

"으음."

사마승이 침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화가 났다지만 그는 종남의 장로. 저만한 아이와 말을 섞기에는 신분의 차이가 너무 크다. 화산의 삼대제자와 종남의 장로가 말다툼을 했다는 소문이라도 퍼지면 그런 망신이 따로 없으리라.

진금룡이 사마승의 가려운 곳을 긁어 주겠다는 듯이 앞으로 한 발 나선다.

"소도장은 누구인가?"

"저요? 들으면 아세요?"

"……."

진금룡이 멍한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그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의 말에 이딴 식으로 반문하는 사람을 만나 보지 못했다. 기분이 나쁜 걸 넘어 뭔가 개안(開眼)하는 느낌까지 난다.

허, 하고 웃어 버린 진금룡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재차 너그러이 말했다.

"혹여 내가 알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니 한번 말해 주지 않겠는가?"

"뭐 어려울 것 없죠. 저는 청명이라고 해요."

"청명?"

내내 부드럽던 진금룡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익숙한 이름이다.

분명 은하상단에서 종남에게 망신을 준 화산의 제자 이름이 청명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진금룡이 눈을 가늘게 뜨고 청명을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더 어리군.'

보고 있자니 어이가 없다.

은하상단에서 청명이 황 대인을 치료해 버린 덕분에 은하상단은 종남과의 거래를 거의 끊어 버리고 화산과 거래를 텄다.

섬서 십대 상단과의 거래를 다 망해 버린 화산에 빼앗겼다는 건 종남의 입장에서는 입에도 담기 싫은 수치였다.

덕분에 장문인은 분노했고 장로들은 뒤집어지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 수치를 준 사람이 아직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았을 것 같은 이런 어린아이라니.

"그렇군. 청명 도장이로군.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청명도장이 영 예의를 배우지 못한 것 같은데."

노골적으로 태도를 꾸짖는 말이었건만, 청명은 귀를 두어 번 후비적거리고는 입으로 훅 불었다.

"죄송하지만 잘 안 들려서 그러는데 이리 가까이 와서 큰 소리로 말해 주실래요?"

"……지금 뭐라 했는가?"

"가는귀먹으셨나? 이리 와서 말하라구요. 안 들리세요?"

진금룡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대체 이놈은 뭘 믿고 이러는 거지?'

이송백과의 비무에서 일격에 피를 뿌리고 날아갔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결코 무위가 높지는 않을 텐데. 무얼 믿고 감히 자신의 앞에서 저리도 목을 뻣뻣이 세우고 헛소리를 늘어놓는단 말인가?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고서야.

생각 같아서는 당장 검을 뽑아 눈앞의 이 방자한 놈을 베어 버리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이곳은 종남이 아닌 화산. 함부로 일을 키울 수는 없다. 그건 진금룡의 역할이 아니다.

진금룡이 살짝 이를 갈고는 나직하게 말했다.

"자네는 화산의 삼대제자 아닌가?"

"맞는데요?"

"화산과 종남은 과거부터 서로 배분을 공유하지. 그렇다면 나는 자네의 사숙뻘 되는 사람인데, 사숙뻘 되는 이를 오라 가라 하는 것보다 자네가 가까이 오는 게 맞지 않겠나? 자네가 예의를 조금이라도 아는 이라면 말일세."

"아, 그래요?"

청명이 씨익 웃는다.

"그럼 그 말을 종남의 장로님께 해드리는 건 어떨까요? 제가 사숙을 오라 가라 하는 게, 종남의 장로님이 저희 장문인을 오라 가라 하는 것보다는 예의 바른 것 같은데? 아닌가요?"

아차 한 진금룡이 급히 입을 다물었다.

분명 청명을 꾸짖으려 했건만, 사마승의 잘못을 지적한 것과 같아져 버렸다.

'내가 이런 실수를.'

아니, 실수가 아니다.

저 어린놈이 대화가 이렇게 흐르도록 유도한 것이다. 제 입으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면서 진금룡이 스스로 넘어지도록.

"이……."

그때 상황을 지켜보던 사마승이 입을 열었다.

"어린놈이 입이 보통이 아니구나."

"장로님."

"물러나라."

입술을 질끈 깨문 진금룡은 청명을 한번 노려본 뒤 두말없이 물러났다.

사마승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장문인을 생각한 네 마음이 갸륵하여 이번만은 책임을 묻지 않겠다."

"네, 감사하네요."

"하지만 하나 기억해 두는 게 좋을 거다. 너의 무례와 나의 무례는 같을 수 없다. 그 이유를 알고 있느냐?"

"……글쎄요?"

"바로 힘이다."

사마승이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무례는 누군가가 지적을 할 때에야 비로소 무례가 되는 법이다. 누구도 지적하지 않는다면 그저 지나갈 뿐이지. 그리고 지적을 할 수 있는 권한은 힘에서 나온다. 힘이 없는 너의 무례는 무례이나, 힘이 있는 나의 무례는 무례가 아닌 법이다."

청명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예의 이전에 말을 좀 쉽게 하는 법을 배우셔야 할 것 같은데."

"……그냥 미친놈이로군."

사마승이 몸을 돌려 현상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조금 전의 무례를 사과드리겠소."

"아, 아닙니다. 장로님, 왜 이러십니까?"

"저 아이가 저의 예의를 지적했으니, 그건 이제 무례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사과를 드려야죠."

현상이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잘못을 저지른 이가 사과를 하는데, 사과를 받는 이가 더욱 불편해 하는 상황.

그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은 사마승이 청명을 돌아보며 말했다.

"어린 객기는 용서받기 쉬운 법이지. 하지만 그 객기가 언젠가는 네 목을 칠 것이다. 내 말 기억해 두거라."

그 말을 끝으로 사마승이 몸을 돌렸다.

"가시지요."

"예, 장로님."

현상의 안내를 받으며 그는 제자들을 이끌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이송백이 청명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청명이 짧은 고갯짓으로 인사를 받아 주자 그는 옅은 미소를 짓고는 이내 멀어져 간다.

종남의 제자들이 멀어지자 조걸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미쳤어? 대체 뭘 어쩌려고 그래?"

"뭐가?"

"저 사람 종남의 장로라고! 종남이야! 종남!"

"에라!"

청명이 조걸의 정강이를 다시 걷어찼다. 아까 찼던 그곳이다. 조걸이 정강이를 부여잡고 바닥을 나뒹군다.

"아아악!"

"화산의 제자라는 놈들이 말이야, 엉? 웬 거적때기 같은 놈이 장문인을 모욕하는데 참으라고 해?"

"우리라고 좋아서 참겠느냐."

윤종이 굳은 얼굴로 나섰다.

"화는 나지만 저자의 말이 맞다. 힘이 없는 이는 상대의 무례를 지적할 자격도 없는 법이다."

"누가 힘이 없대?"

"……으응?"

청명이 고개를 획 돌려 멀어지는 종남의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저 새끼들이 감히.'

도둑놈들이 제 발로 화산에 걸어 들어온 것도 짜증 나는데, 감히 장문인을 모욕해?

아무리 청명에게 있어 현 장문인이 진짜 장문인이 될 수 없다지만, 그렇다고 해도 현종은 화산의 대표이다. 그러니 청명이 지켜야 할 사람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장문인을 모욕한다는 건 곧 화산을 모욕한다는 뜻이다.

청명의 두 눈이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좋게좋게 해 보려고 했더니. 이 새끼들이 초장부터 뒤집어엎고 시작하네. 오냐. 그렇게 나왔다 이거지?"

"……아니, 진정 좀 하고……."

"청명아. 제발 부탁이다. 제발 생각부터 먼저 하고 움직이자."

삼대제자들이 기겁을 하여 청명을 붙잡았다. 이놈이 한번 눈이 돌아가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건 그들이 가장 잘 안다.

그때 청명이 고개를 획 돌렸다.

"사형들 잘 봤지?"

"……뭘?"

"저 새끼들 하는 짓거리 말이야. 화산을 무시해도 유분수가 있지. 사형들 저거 보고 참을 거야?"

"……아니, 우리도 참기 싫지. 그런데 뭘 어떻게……."

"잘 들어, 사형들."

청명의 눈에 귀화가 불타오른다.

"저 새끼들한테 지면 다 뒈지는 거야."

"……."

윤종을 비롯한 삼대제자들의 얼굴이 일제히 썩어 갔다.

청명의 두 눈은 분노로 희번덕거렸다.

"다른 데는 다 져도 돼. 어디 가서 맞고 다녀도 그러려니 해 준다. 하지만 종남한테만은 지는 꼴 죽어도 못 봐! 내가 못 볼 꼴 보게 한 사람은 진짜 각오해야 할 거야. 남의 눈에 피눈물 흘리게 한 사람은 본인도 피눈물 흘릴 날이 오는 거지!"

그거 그럴 때 쓰는 말 아냐, 인마!

그거 반대로 쓰는 거야!

네가 지금 우리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하고 있잖아.

"왜 대답이 없어?"

청명이 광기가 일렁이는 눈으로 입술을 핥는다. 보고 있자니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다.

"아, 아니. 우리도 그러고 싶지. 그런데 자신이……."

"뭐? 자신?"

청명이 희번덕거리는 눈알을 부라리며 삼대제자들에게 다가온다.

"이길 자신은 없어?"

"그, 그렇다기보다……."

"뒈질 자신은 있나 보지?"

"……."

"어디 한번 져 봐. 어디 한번. 좋지, 그래. 다 같이 뒈지는 거야. 너도 죽고. 나도 죽고."

"……."

화종지회.

화산과 종남의 친교를 다지기 위한 행사.

하지만 그 화종지회가 지금 한 사람의 분노 앞에 핏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저 어린놈이……."

종서한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그에 진금룡이 걸어가며 나지막이 물었다.

"신경 쓰이더냐?"

그러자 종서한이 앞서 가는 현상의 귀에 들리지 않게 작게 속삭였다.

"신경이 쓰인다기보다는 어이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어디 주제도 모르고."

"내버려 둬라."

진금룡이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제를 모르고 날뛰는 건 약한 자의 특권이지.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망아지만이 천방지축이 될 수 있는 법이다."

"그건 그렇지만……."

"아쉬워할 것 없다. 저리 방자하게 굴었으니 당연히 화종지회에 나오겠지. 저놈을 징벌할 기회는 앞으로도 있다."

"주둥아리를 찢어 놓아도 저리 지껄일 수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군요."

진금룡이 빙그레 웃었다.

"정파인이 할 소리는 아니로군."

"먼저 시비를 건 건 저쪽입니다."

"그래. 그렇지."

정확하게 말하면 시비를 건 건 이쪽이지만 진금룡은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신경 쓸 것 없다."

그때 현상을 앞으로 먼저 보낸 사마승이 낮게 말했다.

"결국 무인은 검으로 말하는 법이다. 주둥아리로 아무리 나불거려 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

"예. 장로님."

"힘이 강호의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힘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곳 또한 강호다. 너희는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사마승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번 종화지회는 아주 재미있겠군. 저리 방자하게 나오는 것을 보면 저놈들도 믿는 구석이 있을 것이다. 그 믿는 구석을 철저하게 짓밟아 줘라. 알겠느냐?"

"예! 장로님."

사마승이 피식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재미있는 놈이로군.'

그래도 나름 기특한 면은 있다. 화산의 장로조차 두려움에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하는데 저 어린놈이 겁도 없이 나서선…….

사마승이 그 자리에 멈춰서 획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뒤를 따르던 제자들이 놀라 일제히 멈춰 선다.

"장로님?"

"왜 그러십니까?"

무시무시한 눈으로 뒤를 노려보던 사마승이 이내 표정을 풀고는 고개를 내젓는다.

"아니, 아니다. 아무것도."

그리고 가볍게 손을 내저으며 다시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짐짓 심각하게 굳어졌다.

청명은 분명 사마승의 잘못을 지적했다. 그가 장문인에게 무례했다는 점을 말이다.

'그럼 그 거리에서 내가 하는 말을 들었다는 건가?'

사마승조차 청명의 존재를 파악하지 못한 거리에서?

'아니겠지.'

뭔가 착오가 있었을 것이다.

'내가 아무래도 긴장한 모양이군. 이런 황당한 생각을 다 하다니.'

낮게 웃어 버린 사마승은 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그의 걸음은 이전과는 달리 조금 무거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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