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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90화 (91/1,567)

90화. 뭔 개소리야. 내가 제일 세지! (5)

"산세 하고는!"

종서한이 화를 잔뜩 담은 목소리로 짜증을 냈다.

무공을 익힌 그로서도 화산을 오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 험한 산세는 나는 새조차 떨어뜨릴 것 같았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곳에다 도관을 세운 건지 모르겠습니다. 이러니 망하지요."

청명이 들었으면 박수를 칠 소리였다.

하지만 진금룡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무릇 도관이란 속세를 떠나 자연을 닮아 가는 데 그 의미가 있지 않느냐? 도경을 공부하고, 스스로를 갈고 닦는 데 있어서 외인들의 출입이 쉽지 않은 곳을 선택하는 건 당연한 이치다."

"화산이 무슨 도관입니까. 반은 속가인데. 제가 무당이 이런 곳에 있으면 이해라도 하겠습니다."

"하긴. 네 말도 맞다."

그들 이전에 화산을 오르는 이들도 힘겹기는 마찬가지였는지, 중간중간 쉬어 가는 곳이 마련되어 있었다. 지금 종남의 제자들은 그 중 한 곳에 걸터앉아 잠시 쉬는 중이었다.

이대제자들 중 하나가 심드렁하게 입을 연다.

"이 고생을 해서 오르는 곳이면 나름 가는 맛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보나마나 또 풀뿌리나 뜯어 먹고, 다 쓰러져 가는 전각에서 잠을 자야겠지."

"좋은 음식 같은 건 바라지도 않으니까 잠이라도 편히 자면 좋겠다. 나는 저번에는 전각 무너질까 봐 밤새 한숨도 못 잤다니까."

"개방 거지들도 그런 데서는 안 자겠더라. 이건 뭔 도관이라는 곳이 거지 굴보다 못하니."

불만과 비하가 뒤섞여 나온다.

"이제 이 쓸데없는 일도 그만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괜히 저희만 먼 화산까지 와서 고생하고, 화산 놈들만 좋은 일 시켜 주는 것 아닙니까."

진금룡이 난처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다들 불만이 많은 것은 알지만, 조금 진정하는 게 좋겠다. 윗분들이 화산에 대해 가지는 감정을 잘 알지 않느냐?"

"저희는 그것도 이해 못 하겠습니다. 다 망해 자빠진 문파에 왜 그렇게들 집착을 하시는지."

"그러게나 말입니다."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저력 때문이겠지."

"저력이요?"

누군가 코웃음을 쳤다.

"저력이 있었으면 벌써 제자리를 찾아갔겠죠. 백 년이 가깝도록 저 꼴이라는 건 저기가 제자리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전성기가 없었던 문파가 어디 있습니까. 지금이 중요한 거죠."

다들 화산을 무시하는 말을 할 때, 한 사람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화산을 너무 얕보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돌아갔다.

이송백.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고 있었다.

"자칫하다가는 큰 망신을 당할지도 모르니까요."

그러자 종서한이 이죽거리며 말한다.

"사형처럼 말입니까?"

"……."

명백한 도발에도 이송백은 반응하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형. 저희는 사형처럼 화산의 기를 살려 주는 일은 하지 않을 테니까요. 사형이 살려 놓은 기까지 저희가 꺾어 드리겠습니다."

"나는 방심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화산 놈들에게 방심 좀 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나는……."

이송백이 뭔가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고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건 먹히지 않을 것이다.

청명이 은하상단에서 벌인 일 때문에 입장이 가장 곤란해진 사람이 기목승 장로와 이송백이었다.

특히나 비난의 화살은 주로 이송백에게 올 수밖에 없었다. 그도 당연한 것이, 장로를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마음대로 해라. 하지만 방심한다면 그 대가를 치르는 건 너희 자신이 될 것이다."

종서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뭔가 말하려는 순간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틀린 말은 아니지."

모두의 고개가 다시 한쪽으로 돌아간다.

천천히 산을 올라오는 한 사람을 본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아라."

"예."

이들을 이끌고 온 종남의 장로, 사마승(司馬昇)이 모두를 한번 쭉 훑고는 입을 열었다.

"은하상단의 일을 잊었더냐?"

은하상단이라는 말이 나오자 이송백이 움찔한다. 하지만 다른 제자들은 지체 없이 대답했다.

"잊지 않았습니다."

사마승의 눈이 꿈틀댄다.

"다 망해 자빠진 문파 때문에 망신을 당했다. 그 일로 장문인께서 얼마나 노하셨는지 아느냐?"

다들 고개를 살짝 숙인다.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사마승의 목소리에 묻어 나오는 노기를 피하기 위해서다.

"화산에게 망신을 당하는 것은 그 일로 족하다. 더는 이런 치욕을 겪어서는 안 된다. 천하로 웅비하려는 우리 종남이 언제까지 화산 같은 삼류 문파와 드잡이해야 한다는 말이더냐? 장문인께서는 이번 종화지회로 화산과의 관계에 종지부를 찍으려 하신다! 혹여나 일말의 방심이라도 하여 화산의 제자에게 망신을 당하는 이가 있다면 내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차가운 사마승의 목소리에 종남의 문하들이 숨을 죽였다.

"전장에 선 장수는 후환을 남기지 않는 법이고, 사자는 토끼를 잡을 때도 전력을 다하는 법. 이번 종화지회는 단순히 화산을 꺾는 게 아니라 화산의 정기를 짓밟아 버리는 데 그 의의가 있다. 모두 알겠느냐?"

"예! 장로님!"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사마승의 날카로운 눈이 이송백에게 가닿는다.

"다만 방심하지 않는 것과 겁을 집어먹은 것은 다르겠지. 그렇지 않느냐?"

"……예."

"흠."

사마승이 몸을 돌려 화산을 바라보았다.

"다 쉬었으면 이제 일어나거라. 기다리는 놈들의 목이 빠지기 전에 도착해야겠지."

"예."

종남의 제자들이 일제히 사마승을 따라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참 산에 오른 끝에 화산에 거의 도착한 종남의 제자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말을 쏟아냈다.

"끄응. 진짜 산 꼬라지 하고는."

"다음에는 정말 안 와야지."

"저번에 온 대로라면 이쯤이면 이제 산문이 나올 텐데?"

이 가파른 절벽을 오르면 다 쓰러져 가는 산문이 나온다. 그럼 화산에 도착한 것이다. 일전에 화산을 방문했던 이들이 힘차게 절벽을 뛰어 올라갔다.

"어?"

"저거 뭐야?"

그리고 예상치 못한 광경에 당황하고 말았다.

분명 이 년 전만 해도 화산의 산문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낡아 있었다. 문이 문 역할을 하지 못하는 수준이었으니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런데 지금은 그 낡아 빠진 문은 어디로 가고 새로 만든 듯한 커다란 산문이 그들은 반기고 있었다.

'잘못 왔나?'

'설마.'

'이 말도 안 되는 데다가 문파를 세우는 놈들이 화산파 말고 어디 있으려고?'

그들의 시선이 산문을 따라 위로 올라간다.

문은 바뀌었지만 산문에 걸려 있는 현판은 바꾸지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이전에는 낡아 부스러질 것 같다고 느껴졌던 현판이, 새로 지은 거대한 산문과 합쳐지자 고풍스러움으로 변해 버렸다.

용사비등(龍蛇飛騰)한 필체로 써진 화산파라는 글귀를 보자 알 수 없는 압박감이 느껴진다.

"아니, 이게 대체……."

은하상단이 화산에 투자를 한다는 건 웬만한 이들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은하상단의 일은 벌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 만에 화산의 정문을 이렇게 그럴싸하게 새로 지어 올리는 건 은하상단이 아니라 은하상단 할애비가 와도 불가능한 일이다.

"이럴 리가 없는데?"

진금룡이 멍하게 중얼거렸다.

천하제일 거지 문파인 화산이 아닌가? 그 개방조차 화산을 보면 한 수 배우겠다고 달려들 거라는 조롱을 받던 화산이다.

그런데 그 화산이 무슨 돈이 있어서 저런 멋들어진 산문을 만들어 올렸다는 말인가?

"조용."

사마승이 낮게 일갈한다.

"어디에서 돈이라도 좀 구걸한 모양이지. 하지만 산문을 바꿀 수는 있어도 그 근본이 어디에 가지는 않는다. 호들갑 떨 것 없다."

"예!"

"어울리지도 않는 짓을."

사마승이 살짝 기분 나쁜 표정으로 산문으로 성큼성큼 걸어간다.

그때였다.

끼이이익.

거대한 산문이 좌우로 열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안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무각주 현상.

그가 산문으로 다가오는 종남의 제자들을 보고 가볍게 포권 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사마 장로님. 일전에 뵌 적이 있지요. 저는 화산의 장로인 현상이라 합니다."

"사마승이오."

가는 말에 비해 오는 말이 짧다.

하지만 현상은 전혀 기분 나쁜 티를 내지 않고 빙그레 웃었다.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사마 장로님."

"장문인께서는 나오지 않으셨소?"

현상의 눈썹이 꿈틀한다.

"장문인께서는 안에 계십니다."

"그래도 먼 곳에서 손님이 왔는데 얼굴 한번 비추지 않으신다는 말이외까?"

현상이 보이지 않게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사마승은 종남의 장로다.

더없이 높은 신분이기는 하나 화산의 장문인을 오라 가라 할 주제는 아니었다.

사마승도 그걸 모를 사람은 아닌 터, 이리 장문인을 운운한다는 것은 대놓고 화산을 무시하는 처사다.

현상이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꾹꾹 누르며 입을 열었다.

"드시지요. 종남의 제자들을 환영하기 위한 연회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부족하지만 먼 여행의 노고를 잊으시고 즐겨 주시면 좋겠습니다."

"연회라. 화산은 종화지회를 먹고 노는 일 정도로 생각하는 모양이외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무래도 좋소. 앞장서시오. 나는 우선 장문인을 만나야겠소."

현상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도하기가 이를 데가 없구나.'

예전의 종남도 행패를 부려 댔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아마도 작정하고 온 모양이다.

하지만 이미 현종이 그에게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지 않았던가? 울분을 꾹꾹 누른 현상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안쪽을 가리켰다.

"드시지요."

"흠."

사마승이 조금 거친 걸음으로 들어섰다. 그 와중에도 새로 지은 산문이 눈에 거슬렸다.

'후원이라도 받은 모양이지.'

어느 눈먼 놈이 화산에 돈을 때려 박은 모양이다. 그러니 가장 시급한 것들부터 처리했겠지. 남 눈에 가장 먼저 보이는 산문이나 복색 같은 것들.

하지만 내부의 전각들은 어쩔 도리가 없…….

"뭐야?"

산문 안으로 들어선 이들이 자신도 모르게 헉 소리를 내고 말았다.

"저, 전각이?"

"언제?"

산문 안으로 들어서자 청석이 깔린 드넓은 연무장과 함께, 새것임이 분명한 전각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 이걸 다 수리했다고?'

아니, 아예 새로 지은 건가?

화산에 재신이라도 강림했나?

"종남보다 좋은 것 같은데."

등 뒤에서 들린 누군가의 중얼거림이 모두의 심정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이 모습에 비하면 종남은 초라할 정도다.

불과 이 년 전만 해도 다 쓰러져 가는 전작들과 이미 무너져 버린 전각으로 휑하기 그지없었던 화산이건만, 대체 언제 이렇게 바뀌었다는 말인가?

사마승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그가 걸음을 멈추자 현상이 의아한 눈으로 묻는다.

"왜 그러십니까?"

"뭐가 많이 바뀐 것 같소이다?"

현상이 빙그레 웃으며 답한다.

"좋은 일이 있었습니다."

"화산에 아직 후원을 할 이가 남았소? 설마 하니 명문을 자처하는 이들이 도적질을 한 건 아닐 테고."

순간 현상의 얼굴에 노기가 들어찼다.

아무리 장문인이 신신당부를 했다지만 이건 참을 수 없는 발언이다.

"말을 조심……."

그때였다.

"뒈질라고."

옆쪽에서 들려온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한쪽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펼쳐진 광경을 본 사마승이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굳히고 말았다.

'저, 저건 또 뭐 하는 짓거리지?'

그의 눈에 일련의 무리들이 헐레벌떡 달리는 광경이 들어온다. 무복이 흠뻑 젖어 있는 것과,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표정을 보니 달린 지 한참이 된 모양인데, 비틀거리는 다리로 용케도 쓰러지지 않은 채 달리고 있다.

분명 괴이한 광경이다.

하지만 사마승의 시선이 향한 곳은 그들이 아니었다.

말소리가 들려온 곳.

무리의 옆,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말끔한 옷과 평온한 표정을 지은 이가 산보하듯 앞선 이들을 따라 달리고 있다.

작은 아이.

그 아이에게 시선을 고정한 사마승이 스산한 목소리로 일갈했다.

"지금 뭐라고 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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