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89화 (90/1,567)

89화. 뭔 개소리야. 내가 제일 세지! (4)

"장문인."

현종은 말없이 찻잔에 차를 따랐다. 향긋한 차향이 방 안으로 퍼져나간다.

마음에 화가 찾아들 때마다 현종은 이렇듯 차를 끓여 마셨다. 심신을 안정시키는 데는 이만한 것이 없다.

"오늘 종남의 문하들이 도착할 것입니다."

"준비는 다 끝났느냐?"

"예, 장문인. 종남인들을 맞이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다행이로구나."

현종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는 적어도 부끄러운 꼴은 보이지 않을 수 있겠군.'

무학에 뒤지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지만, 현종을 가장 창피하게 했던 것은 종남의 제자들을 제대로 대접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 쓰러져 가는 전각과 부실한 식사, 그리고 황폐해진 연무장을 가장 보여 주고 싶지 않은 이들에게 적나라하게 보여 줄 수밖에 없다는 게 어떤 심정이었겠는가?

특히나 화산의 장문인인 현종에게 있어서 이건 민감한 문제였다.

살짝 조롱하듯 그를 바라보는 종남 문하들의 시선을 견디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전까진 그저 입술을 깨물고 조롱의 시선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청명 그 아이가 큰일을 해 주었구나."

운암이 고소를 머금는다.

현종이 청명을 과하게 아낀다는 말이 화산 내부에서도 왕왕 나오는 형편이지만, 운암은 현종의 마음을 십분 이해했다. 현종이나 운암의 입장에서 보자면 청명은 뱃속에 들어차 있는 무거운 돌을 부숴 꺼내 준 은인이나 다름없다.

단순히 먹고사는 문제가 아니다.

오랜 역사를 이어 온 전통의 문파인 화산이다. 적어도 다른 이들에게 그럴싸한 모습은 보여야 한다. 비록 겉모습은 허례에 불과하다고 가르치기는 하나, 사람은 보이는 것으로 상대를 평가하기 마련이니까.

거지꼴로 도를 논해 봐야 사람들은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청명은 화산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했을 뿐 아니라, 화산의 체면을 되찾아 준 아이다. 그러니 어찌 아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웃음 짓는 운암의 시선이 살짝 무안했던지, 현종이 낮게 헛기침을 하고는 그에게 차를 권했다.

"마셔라."

"예, 장문인."

찻잔을 들어 가볍게 한 모금 음미한 운암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어떠냐?"

"향이 더 짙어진 것 같습니다. 말린 지 오래되어 이제는 향이 조금 옅어질 만도 하건만."

"그렇지."

현종이 기껍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말린 매화 잎은 오히려 향이 짙어지기도 하더구나. 매화를 말린 지 수십 년 만에야 깨달은 일이지."

현종이 가만히 찻잔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화산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그저 버티기만 했을 뿐이다. 과거의 영화를 재현하겠다고 했지만, 사실은 그저 하루하루를 버티는 게 버거웠단다."

"……장문인."

살짝 우려가 섞인 운암의 목소리를 들은 현종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빙그레 웃는다.

"한데 그저 버티고 버텼더니 이런 날이 오는구나. 때로는 어떤 계책이나 노림수보다 그저 기다리는 것이 답일 때도 있는 법이지."

묘한 현기가 담긴 말이었다.

운암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현종을 바라본다.

'나아가고 있는 것은 우리만이 아니구나.'

때때로 장문인은 이미 완성되어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사람이란 죽는 그 날까지 나아가는 것. 도인의 길을 걷는 현종이라면 숨이 끊어지는 그 날까지 스스로를 갈고 닦는걸 멈추지 않을 것이다.

어찌 믿음직하지 않겠는가?

"화산은 장문인의 대에 과거의 영화를 되찾을 것입니다."

"그러면 좋겠지만, 그리된다 해도 내 공은 아니다. 그저 제자들이 노력해 준 덕분이겠지."

"어찌 장문인의 공이 아니라 하십니까?"

"운암아."

"예, 장문인."

"나는 내 부족함을 아는 사람이란다. 화산이 이리 무너지지 않았더라면 내 어찌 장문인이 될 수 있었겠느냐? 내 사형들이 화산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저 도경이나 외우며 세월을 보냈을 거란다."

운암이 진중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들은 화산을 떠난 것으로 스스로 장문인의 자격이 없음을 증명했습니다. 장문인께서는 온당한 화산의 장문이십니다."

현종은 대답 없이 빙그레 웃었다.

조금은 무안한 이야기다. 그러니 대화를 돌릴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대제자들은 어떻더냐?"

"이제는 수련을 끝내고 심신을 안정시키고 있습니다."

이대제자라는 말이 나오자 운암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장문인."

"말하거라."

"솔직히 저는 조금 겁이 납니다."

"겁이라……. 어째서더냐?"

운암이 낮게 한숨을 쉬고는 말을 이었다.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지금 화산은 기세가 이를 데 없이 좋습니다. 하지만 이번 화종지회의 결과에 따라서는 그 기세가 꺾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이대제자들이 종남의 문하들을 감당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느냐?"

"저 역시 아이들을 믿고 싶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운암은 굳이 뒷말을 잇지 않았다.

화산과 종남의 차이가 비할 바 없이 벌어졌다는 것은 그도 알고 현종도 안다.

화산은 역사상 가장 깊은 암흑기를 이제 겨우 헤쳐 나가는 수준이지만, 종남은 유래 없는 전성기를 맞이하는 중이다. 당연히 제자들의 수준에서도 큰 차이가 난다.

이대제자들이 아무리 노력했다고는 하나, 종남의 제자들을 이긴다는 건 요원한 일이다.

운암은 이제야 희망을 가지기 시작한 제자들이 다시 패배의식에 사로잡힐까 봐 걱정이었다.

"삼대제자들은 어떠하더냐?"

"……예?"

"삼대제자들 역시 화종지회에 나서지 않느냐? 그 아이들은 잘 준비하고 있느냐?"

뜬금없이 현종이 말을 돌리자 살짝 의아한 운암이었지만, 장문인에 질문에 대답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준비는…… 과할 정도로 착실하게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만."

과하지.

엄청 과하지.

오다가다 몇 번 삼대제자들이 수련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 운암이다 보니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의 수련은 전적으로 운검에게 맡긴 터라 이래라저래라 간섭할 수는 없었지만, 운암이 보기에는 영 정상적이지 않은 수련법으로 보였다.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들이라……."

현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운암의 우려는 현종도 충분히 이해했다.

"운암아."

"예, 장문인."

"눈앞에 산이 있다면 어쩌겠느냐?"

"그야……."

운암은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그래. 넘어가는 수밖에 없단다. 길이 있다면 돌아갈 것이고, 시간이 있다면 쉬어 가겠지만, 둘 다 없다면 넘는 수밖에는 없지 않겠느냐?"

"저는 넘지 못할까 우려됩니다."

"그렇다 해도 경험은 얻겠지. 다음에는 좀 더 수월하게 산을 넘을 수 있지 않겠느냐?"

운암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장문인의 말이 모두 납득이 된 것은 아니지만, 더 물어 봐야 나올 것이 없다. 장문인이라 해서 딱히 방법이 있을 리는 없으니까.

운암의 표정이 펴지지 않자 현종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화종지회는 기본적으로 교류의 장이다."

"……예."

"승패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저 교류를 발판 삼아 누가 더 발전할 수 있느냐가 중요한 것 아니겠느냐?"

"장문인의 말씀이 옳습니다."

"먼 곳에서 오시는 손님들이다. 소홀함이 없도록 만전을 기하거라."

"명심하겠습니다."

운암이 깊이 읍을 했다.

"은하상단의 황 대인도 도움을 주기로 했으니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황 대인께서……. 그래. 내 한번 황 대인을 찾아뵙는다는 것이."

"워낙 장문인께서 공사다망하지 않으십니까. 황 대인께서도 이해하실 겁니다."

"그래. 그래 주시면 감사하지."

그날 이후로 황대인과 은하상단은 말 그대로 화산에 황금을 쏟아붓는 중이었다. 투자하는 규모를 보고 있으면 화음을 제 이의 항주나 소주로 만들려는 생각이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다.

"종남에서 이 일을 걸고넘어지지 않겠습니까?"

"모든 것은 순리대로 흐를 것이다."

평소와 같이 침착한 말이었다.

운암이 깊이 고개를 숙이고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그럼 마지막으로 점검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네가 고생이 많구나."

"별말씀을. 그럼."

운암이 뒷걸음으로 물러난다.

그가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가자 현종이 시선을 내려 운암의 앞에 놓였던 찻잔을 바라보았다.

반도 비워지지 않고 모락모락 김을 피워 내는 찻잔이 지금 운암의 심정을 말해 주는 것 같다.

"승부는 중요하지 않다라……."

현종이 작게 뇌까렸다.

"도인이 되어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을 입에 담는구나."

승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은 현종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화종지회는 이길 수 없는 승부다. 그리고 그 이길 수 없는 승부에 제자들을 밀어 넣어야 한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이길 수 없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서야…….

현종이 무거운 마음을 억누르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 * *

"여긴 여전히 작은 곳이군요."

화음을 둘러보는 종남의 제자들이 미묘한 비웃음을 입가에 담았다.

이 년 전에 이미 한번 와 본 곳이지만, 화음은 정말 작은 도시였다. 그들이 주로 가는 서안에 비한다면 시골이나 다름없다.

"사형. 정말 화산이 과거에는 구파일방이었습니까?"

"물론이다."

"하지만 구파일방에 든 문파가 자리한 곳치고는 무척이나 작고 초라하지 않습니까?"

진금룡(秦金龍)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거꾸로다. 이곳에 화산이 있었기에 이만한 마을이라도 생긴 것이지. 단순히 화산에 오가는 이들이 거하는 곳을 마을로 발전시킬 만큼 과거의 화산은 그 위세가 강했었다."

"과연."

종서한(宗恕恨)이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지금은 더없이 몰락하지 않았습니까?"

"그도 맞는 말이지."

진금룡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종서한이 슬쩍 주변을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저는 솔직히 이 의미 없는 행사를 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수준이 뻔한 화산과 검을 나누는 데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 시간에 차라리 검이나 한 번 더 휘두르는 게 낫지요."

"사문의 어른들이 생각이 있어서 하시는 일이다. 입을 조심하도록 해라."

"그렇긴 하지만……."

종서한이 고개를 슬쩍 뒤로 돌렸다.

뒤쪽에 따라오고 있는 한 사람을 확인한 종서한이 미묘한 미소를 입에 담는다.

"하기야. 이번 종화지회는 나름 의미가 있긴 합니다. 망신을 당한 이의 복수를 대신 해 주는 것도 보람찬 일이지요."

살짝 도발을 섞어 한 말이다.

하지만 도발의 당사자인 이송백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묵묵히 걷기만 했다.

'재미없게.'

종서한이 미간을 좁혔다.

황 대인 일을 청명이 해결해 버린 덕에 은하상단이 종남 대신 화산과 거래를 텄다는 건, 이제 종남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은하상단의 소단주가 보는 앞에서 청명을 때려눕혀 그 빌미를 준 이송백을 보는 시선은 당연히 고울 리가 없다.

'반응이 없으니, 놀리는 맛도 없고.'

그 일 이후로 이송백은 사람이 변해 버렸다. 예전에도 꽤 진중한 면이 있었지만, 지금은 진중함을 넘어 과묵하기까지 하다.

"백 년 만에 화산에 망신을 당했으니 갚아 주어야지요, 대사형."

"그리될 것이다."

진금룡과 종서한이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며 걷는 와중에도 이송백은 그 대화에 끼는 일 없이 걷기만 했다.

그의 시선이 화음을 넘어 우뚝 솟아 있는 화산으로 향한다.

'화산인가?'

과거 이곳에 방문했을 때는 그도 무척이나 가벼운 마음이었다. 하지만 지금 화산에는 한 사람의 그림자가 겹쳐 보일 수밖에 없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호굴(虎窟)로 들어가는 건지도 모른다.'

이송백의 눈에 웃고 있는 청명의 얼굴이 보이는 듯했다.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