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뭔 개소리야. 내가 제일 세지! (3)
윤종은 두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없다.
보이지 않는다.
어제 같았으면 아침부터 슬금슬금 다가와서 그들을 괴롭혔을 이대제자들이 오늘따라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진짠가?'
청명의 말을 신뢰하지 않는 건 아니다.
조걸의 말대로 청명은 개소리는 해도 거짓말은 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문제는 청명이 말하는 '해결'이 평범한 사람이 생각하는 '해결'과는 이역만리 떨어져 있는 경우가 빈번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필시 이번에도 뭔가 사고를 쳤겠거니 싶었는데…….
'의외로 잘 해결한 것 같은데?'
'잘'에는 여전히 의구심이 있지만, '해결'한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사형. 아무래도 청명의 말이 사실인 것 같지 않습니까?"
"……."
넌지시 물어오는 조걸의 말에 윤종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정말 이대로 납득해도 되는 일인가?
'사숙과 문제가 생겼으니 사숙을 패서 해결한다는 게 중원에서 존재할 수 있는 사고방식인가?'
중원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는 저기 서역이라고 해도, 눈을 까뒤집고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겠다고 유학자 빙의할 노릇이 아닌가?
문제는 그 말도 안 되는 해결 방법이 실제로 먹힌다는 것이다.
'화산의 미래는 어디로 가는가?'
딱히 스스로가 꼰대라는 생각은 해 본 적 없는 윤종이지만, 청명을 보고 있으면 꼰대가 그리 나쁜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저런 놈이 설치는 것 보다는 꼰대가 설치는 게 더 아름다운 세상이지 않을까?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화산의 미래와 꼰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
조걸이
'이 양반도 슬슬 맛이 가나?'
라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을 알아챈 윤종은 나직하게 헛기침을 했다.
옆에서 눈치를 살피던 삼대제자들이 슬금슬금 윤종에게 다가와 말을 건넨다.
"오늘 사숙들이 좀 이상합니다, 사형."
"……그렇겠지."
"갑자기 왜 저러는 걸까요? 다른 수작질을 벌이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윤종이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것들도 이제 제정신이 아니군.'
사숙에게 수작질이라는 말을 쓰다니. 청명이 오기 전의 화산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윤종이 그렇고, 조걸도 그러하듯 삼대제자들도 날이 갈수록 청명에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이러다 보면 나중에 화산에 청명 같은 놈들만 가득 찰 수도…….
윤종이 상상도 하기 싫다는 듯 치를 떨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문제는 상상이 아주 가능성이 없는 일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조용하니 더 불안한데요. 슬쩍 가서 찔러볼깝쇼?"
"저 쪼잔한 양반들이 이제와 정신을 차린 건 아닐 테고. 아무래도 뭔가 꾸미는 것 같지 않습니까? 사형?"
오호통재라.
사질간의 믿음과 신뢰는 어디로 가 버렸는가?
"시끄럽다. 어서 수련 준비나 해라!"
"……예."
사제들이
'저건 또 왜 성질이야?'
라는 불량한 눈으로 주섬주섬 검을 챙기는 걸 본 윤종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화산은 하루하루 그가 알던 화산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물론 이게 무조건 나쁜 변화라고는 할 수 없지만…… 청명이 만들어 낼 미래의 화산 같은 건 눈 뜨고 보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사형. 그럼 청명이 정말 백천 사숙을 이긴 겁니까?"
조걸이 다른 이들에게 들리지 않게 작게 말하자 윤종이 눈을 찌푸렸다.
"뭐 뻔한 소리를 하고 있느냐. 그놈이 거짓말을 할 리도 없고, 그게 아니었으면 이런 변화도 생기지 않았겠지."
"……아뇨. 그게 어……."
조걸이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도무지 납득이 안 가서요. 아무리 청명이 입문할 때부터 강했다지만, 그래도 백천 사숙과는 무학을 배운 시간의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막연하게는 붙어 볼 만하다고 생각은 했는데, 일방적으로 패 버렸다니……."
윤종 역시 이 부분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말이나 되는 소린가?'
말이 안 된다. 하지만 그 말이 안 되는 일은 언제나 되게 만드는 사람이 바로 청명 아니던가?
"그럼 사형. 청명이 백천 사숙보다 세다는 거죠?"
"아까부터 왜 자꾸 뻔한 소리를……."
"그럼 종남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윤종이 입을 다물었다.
종남?
이건 윤종도 딱히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다.
"청명이라면 종남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것 아닙니까? 그 백천 사형까지 이겼는데."
"으음."
윤종이 굳은 얼굴로 생각에 빠졌다.
"그럼 이번 화종지회도 청명이 나서 준다면……."
"걸아."
"예. 사형."
"청명이 종남에 이긴다고 해서 달라질 게 뭐가 있더냐?"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윤종이 고개를 저었다.
"문파에서 고수가 나는 것은 축하할 일이다. 하지만 단 한 명의 고수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이 강호다. 명성이야 날릴 수 있겠지. 하지만 청명이 사라지는 순간 화산은 다시 예전처럼 몰락하고 말 것이다."
"……."
"진정으로 화산을 부흥시키고 싶다면, 청명에게 기대는 게 아니라 우리가 강해져야 한다. 화산의 제자를 세상 누구도 무시하지 못하는 때가 와야만 진정으로 부활을 선언할 수 있지 않겠느냐?"
"맞는 말씀입니다."
"다만 네 말대로 나도 화종지회가 궁금하긴 하다. 거기에서 갈리겠지."
"뭐가 말입니까?"
"청명이……."
윤종이 살짝 심호흡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진정으로 화산을 바꿀 영웅이 될지. 아니면 작은 화산에서 군림하며 살아가는 패주가 될지 말이다."
윤종과 조걸이 더없이 진지한 눈으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청명이…….
"아! 진짜! 꺼지라고 좀!"
두 사람의 고개가 천천히 옆으로 돌아간다.
청명이 후다닥 달리며 뒤를 향해 욕지거리를 내뱉고 있었다.
"……."
"저거 유 사고 아닙니까?"
전력으로 질주하는 청명을 유이설이 무표정한 얼굴로 뒤쫓는다.
"가르쳐 줘."
"가르쳐 줄 거 없다잖아! 내가 이제 오지 말라 그랬지! 이 찰거머리야!"
"월녀검!"
"운검 사숙조한테 가서 가르쳐 달라고 하라고!"
"운검 사숙조 남자. 월녀검은 여자 검법. 운검 사숙조 월녀검 조예가 약해."
"나는 여자냐? 어? 나는 여자야?"
"가르쳐 줘."
"아악! 빌어먹을 어쩌다 이런 걸 만나서!"
재빠르게 두 사람의 사이를 스쳐 지나가는 청명과 유이설. 그 두 사람을 보는 윤종과 조걸의 눈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둘이 언제 친해졌지?'
'유 사고가 원래 저렇게 말이 많았나? 화산에 입문한 뒤로 여태껏 들은 말보다 방금 들은 말이 더 많은 것 같은데?'
'아니, 그보다 사고한테 저렇게 막말해도 괜찮나?'
여하튼 상식이 없는 놈이었다.
"……아까 하시던 말씀. 그 영웅인지, 패주인지."
"걸아."
"예, 사형."
"수련이나 하자."
"……네."
백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사형. 정말 저대로 두실 겁니까?"
백상의 불만 어린 말을 들으며 백천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왜 그리 화가 났느냐?"
"저놈들이 지금 방자하지 않습니까! 특히나 청명 저놈은 조금도 반성하는 기색이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벌을 주는 게 맞지 않습니까?"
벌?
네가?
"네까짓 게?"
"예?"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백천이 억지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전신에 안 아픈 곳이 없다.
그의 시선이 유이설을 피해 달아나는 청명에게로 향했다.
'독한 새끼.'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잘근잘근 다져 놓으면서 겉으로는 상처 하나 남지 않게 만들 수가 있는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이없는 놈이었다.
덕분에 남들 앞에서 망신을 당하는 건 피할 수 있었지만, 이 억울함을 호소할 데도 없어졌다. 상처 하나 없이 사질에게 얻어맞았다고 하소연해 봤자 미친놈 취급만 받을 테니까.
아니면 세상 다시없는 찌질이 취급을 받든가.
물론 상처가 있다고 해도 사질과 싸우다 개처럼 얻어맞았다는 소리를 입 밖으로 낼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그래도 못내 뭔가 억울하고 아쉽다.
"갑자기 왜 삼대제자들은 건드리지 말라고 하시는 겁니까?"
"백상아."
"예, 사형. 저는 도무지 사형의 뜻을 모르겠습니다."
뜻은 얼어 죽을.
이제 맞기 싫어서 그러는 건데.
하지만 마음속에 있는 말을 그대로 할 수는 없었다. 백천에게도 사회적 체면이라는 게 있으니까.
"화종지회가 얼마 남지 않았잖느냐?"
"……그건 그렇습니다."
백천이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생각이 짧았다. 삼대제자들을 다스리는 것은 언제든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화종지회는 그렇지 않다. 화종지회는 이 년에 한 번 있는 행사가 아니더냐."
백상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의 표정에 여전히 불만이 남아 있다는 것을 확인한 백천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
"삼대제자들을 다스리는 것은 내부의 일이고, 화종지회는 화산의 명예와 관련된 외부의 일이다. 내부도 중요하지만 외부도 중요하다. 더구나 화종지회라는 상징성을 감안한다면 지금은 만사를 제쳐 두고 화종지회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그렇지 않느냐?"
"……맞습니다."
"지금 우리의 적은 삼대제자가 아니라 종남이다. 우리가 왜 폐관까지 해 가며 수련했는지를 잊은 건 아니겠지?"
백상이 깊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사형의 말이 맞습니다. 제가 잠시 정신이 나갔던 모양입니다."
'정신은 내가 나갔었지.'
그리고 지금도 나가 있다.
어쨌든 둘러댄 말이 먹히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백상이
'아니, 애초에 네가 시작한 건데 왜 이제 와 너만 착한 척이냐?'
고 따져 물었으면 대답할 말이 궁했을 것이다.
"이해해 줘서 고맙구나. 삼대제자의 일은 잠시 미뤄 두도록 하자꾸나. 우선은 화종지회를 치루는 데 만전을 기해야 한다. 사제들에게 마지막으로 무학을 점검하고 폐관에서 얻은 것들을 다시 되새기라고 당부하거라."
"예, 사형!"
백상이 씩씩하게 대답을 하고는 뒤쪽으로 달려갔다.
그 모습을 보며 백천은 살짝 허망한 얼굴로 눈을 내리깔았다.
'화종지회가 끝나면 삼대제자의 버르장머리 같은 건 생각도 안 날 거다.'
말도 안 되는 광경을 보게 될 테니까.
백천이 슬쩍 고개를 돌려 저 멀리 멀어지는 청명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놀라는 건 우리뿐만이 아니겠지.'
아마도 화산이 놀라는 것 이상으로 종남이 놀라게 될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청명에게 얻어맞은 곳의 통증이 조금은 가시는 기분……은 아니고.
더 아프다.
뼛속까지 아프다.
망할 놈, 잘도 패 댔네.
백천이 깊게 한숨을 쉬고 몸을 돌렸다.
'나는 내 할 일을 한다.'
난데없이 등장한 청명 때문에 뭔가 꼬이기는 했지만, 이 년 전부터 그의 목적은 화종지회에서 자신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이번에 화산에 올 이가 누구인지를 생각하면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이번에는 반드시 그의 가치를 증명하고 말 것이다.
다만…….
백천이 얼굴을 확 일그러뜨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저놈이 왜 자꾸 유 사매랑 어울리지?"
기분 나쁘게 말이야.
두 사람을 힐끔힐끔 바라보던 백천이 살짝 불안한 느낌을 억지로 억누르며 수련장으로 향했다.
이제 화종지회가 시작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