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뭔 개소리야. 내가 제일 세지! (2)
털썩.
청명은 곤죽이 되어 쓰러진 백천을 보며 개운하게 기지개를 켰다.
"아, 십 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네."
백천은 의식을 완전히 잃었는지 미동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며 청명이 피식 웃는다.
"엄살은."
뒈지게 패기는 했지만, 몸이 다치지 않게 패 버렸으니, 잠시 기절하고 나면 일어날 수 있을 거다. 아픔이야 하루 종일 가겠지만.
"그래, 이렇게 패 버리면 편한 것을!"
괜히 이리저리 머리 굴렸네. 그놈의 화종지회 잘되든 말든 청명과 무슨 상관이라고.
"……아니지."
생각해 보면 또 종남 놈들이 화산에 와서 의기양양한 꼴은 못 보는데?
"흐음. 그러니까 어떻……. 으아아아악! 깜짝이야! 악!"
쪼그리고 앉아 고민하던 청명이 화들짝 놀라 옆으로 나뒹굴었다. 옆에 같이 쪼그려 앉아 청명을 빤히 바라보는 유이설 때문이었다.
"아니, 진짜! 뭔 귀신도 아니고!"
저걸 어떻게든 해야지. 이러다가 화산 되살리기도 전에 심장마비로 먼저 죽을 판이다.
"기척 좀 하라고! 기척!"
"했어!"
"언제!"
"아까 마저 패고 있을 때."
"……."
청명은 여전히 시체처럼 뻗어 있는 백천을 흘끗 보고 다시 유이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난다.
"봤어?"
"응."
"다 봤어?"
"조금 전부터는."
"흐으음."
"살인멸구?"
"아니, 그건 너무 나갔고."
죽이기야 하겠니, 죽이기야.
청명이 유이설의 머리 부분을 유심히 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아니, 적당히 뒤통수를 후리고 패면 잊어버리지 않을까 해서. 기억 상실이라든가."
"……잊었어."
"진짜?"
"응. 다 잊었어."
이게 맹한데 생존 본능은 있네.
청명이 살짝 눈을 가늘게 떴다. 그때 유이설이 조용히 말했다.
"대신 그 검 가르쳐 줘."
이 여자 포기를 모르네. 불꽃처자인가…….
지금까지야 대충 넘겼지만, 이제는 이리 넘기기도 힘들다. 더구나 청명이 백천을 신나게 두들기는 모습을 다 봐 버리지 않았는가? 이제 시치미는 먹히지 않을 것이다.
그럼 전략을 바꿔야지.
청명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그건 왜 배우려고 하는데?"
"……."
예상외의 반격이었는지 유이설이 움찔한다. 그러더니 조금 당황한 기색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게 뭐랄까…….
'얜 남 앞에서 절대 거짓말은 못 하겠네.'
유이설은 잠깐 주저하더니 입을 열었다.
"이유는 말할 수 없지만……."
머뭇거리는 목소리에서 진심이 묻어났다.
"나는 반드시 그 검을 익혀야 해."
청명이 가만히 유이설을 바라본다.
'그냥 매화가 예뻐서 익히고 싶은 건 아닌 모양인데.'
눈빛에 간절함이 어려 있다. 청명이 짐작할 수 없는 무슨 사연이 있는 모양이다.
"배우고 싶어?"
유이설이 고개를 끄덕인다.
"부탁할 것 없어."
"응?"
"그건 원래 화산의 검이니까. 기다리면 자연히 익히게 될 거야."
"……화산에는 이제 없어."
"호오?"
화산에 없다는 걸 안다?
그럼 청명이 펼친 검이 매화검법이라는 걸 알아봤다는 뜻이다. 정확하게는 매화검법의 청명식 변형이지만.
청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 화산에는 없지."
"……."
"하지만 곧 돌아갈 거야. 준비가 되면."
"준비?"
청명이 유이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질문에 대답을 해 주는 대신 청명이 손을 가만히 뻗어 하늘을 가리킨다.
이내 청명의 손이 유려하게 허공을 누빈다.
유이설은 처음에는 청명의 손짓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그의 손이 검로를 그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진중한 눈으로 그 손끝을 바라보았다.
"월녀검이지?"
"그래."
유이설이 천천히 청명의 손짓에 빨려들어 간다.
그건 분명 월녀검이었다.
유이설이 가장 많은 시간을 익히고, 가장 오랫동안 갈고닦아 온.
하지만 청명의 월녀검은 유이설의 것과는 뭔가 달랐다. 단순히 움직임이 다르다기보다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듯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이어진 손짓이 끝나자 유이설이 가만히 탄식을 내뱉었다.
"이해했어?"
유이설이 고개를 젓는다.
"아니. 하나도 모르겠어."
청명이 뭔가 말하려는 순간 유이설이 먼저 말을 잇는다.
"하지만 그걸 알아내는 건 내 역할이겠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아. 일정 수준이 오르지 않으면 익힐 수 없다는 말이지?"
"그렇지."
"지금 있는 것을 갈고닦아 먼저 기초를 다져야 한다."
"잘 아네."
유이설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알겠어."
청명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유이설을 바라보았다.
'마냥 맹한 줄 알았는데, 머리까지 좋네.'
하긴 성격과 머리는 별개의 문제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그래. 대신에 오늘 있었던 일을 다른 데다 이야기하면 절대로 안 가르쳐 줄 거야."
"말 안해."
"착하네."
청명이 고개를 끄덕이자 유이설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네 사고. 너는 내 사질."
"알아, 알아. 그래. 착하다."
"……."
검을 잡은 유이설의 손이 살짝 힘이 들어가는 게 보인다. 청명은 얼른 몸을 돌렸다.
"그럼 다음에 보자고, 사고. 실력이 될 때까지는 찾아오지 마. 귀찮으니까."
"저기……."
유이설이 손을 뻗어 청명을 잡으려 했지만 그는 기다려 주지 않고 터덜터덜 걸어 산을 내려갔다.
"아, 그리고 저 멍청이 좀 방에 던져 주고. 여기다 내버려 두면 입 돌아갈 테니까."
벌써 멀리서 들려오는 청명의 목소리에 유이설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매화.'
청명은 검 끝에서 매화를 피워 낸다.
화산에 와서도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광경이다.
그저…….
유이설이 눈을 감았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검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유려하게 움직이던 검 끝이 흔들리더니 이내 선명한 매화를 가득 피워 내기 시작했다.
매화.
그리고 검 끝.
그리고 검을 잡고 있는 한 남자.
'아버지.'
- 나는 반드시 이 검을 복원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화산으로 돌아가 내 잘못을 빌고 싶구나. 설아, 너도 나와 함께 가자. 화산은 더없이 좋은 곳이란다.
그리고 끝내 그의 검은 완전한 매화를 피워 내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앞에 그러한 매화를 피워 내는 사람이 등장했다.
"배워야 해."
어떻게든 말이다.
* * *
쾅!
청명이 백매관의 문을 박차고 들어섰다.
"히이이익!"
"왔다!"
그리고 뜬금없을 만큼 격앙된 반응을 마주했다.
"뭐야?"
아직 이른 새벽이건만 조걸과 윤종이 일 층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련이 편했던 모양이지. 이 시간에 깨어 있는 걸 보니?"
"그게 아니라, 난리가 났었어!"
"응?"
"백천 사형이 없어졌다고, 사숙들이 백매관에 찾아왔었거든."
거 희한한 놈들이네.
백천이 없어졌는데 왜 백매관에 온단 말인가? 설마 청명이 그를 납치라도 했을…….
아.
그 생각을 못 했네. 살포시 집어 와 팼으면 되는데.
이대제자 중에서도 나름 똑똑한 놈이 있는 모양이다.
"거 쓸데없이 사람 의심하네. 기분 나쁘게."
청명의 말에 윤종이 반색했다.
"너랑 얽힌 건 아니었던 모양이구나! 다행이……."
"맞는데?"
"……."
근데 왜 기분이 나빠, 인마! 기분 나쁠 일이 아니구만!
아니,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백천 사형이랑 있었다고?"
"응."
"서,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지?"
"뭔 생각을 하는데?"
윤종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너도 생각이 있는 사람일 테니 절대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여나 사숙을 때렸다거나 저번에 말한 대로 죽빵을 갈겼다거나……."
"……둘이 뭐가 다른가?"
"안면 타격은 가산점이 붙는 법이지."
조걸이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청명은 손을 허공에 휘휘 저었다.
"에이, 내가 애도 아니고."
"아, 아니지. 그래, 청명아! 이 사형은 믿고 있었다. 네가 아무리 제정신이 아닌 놈이라지만 설마 사숙을 때리지는 않았겠지."
"때린 게 아니고."
"그래!"
"개처럼 두들겨 팼어."
"그래. 개처럼. 백천 사숙이 원래 개 같은 면이……. 뭐?"
윤종의 얼굴이 지진이라도 난 듯이 흔들렸다. 보고 있으니 묘기가 따로 없다.
"팼다고?"
"응."
"누굴? 사숙을?"
"노, 농담이지?"
"설마. 내가 농담이나 하는 사람……."
그 순간 윤종이 청명에게 벼락같이 달려들어 멱살을 움켜잡고는 짤짤짤 흔들었다.
"야 이 미친놈아! 미친 짓도 정도껏 해야지! 사숙을 패면 어떻게 하냐! 기사멸조(欺師蔑祖)가 얼마나 큰 죄인지 몰라서 그러는……."
"에라이!"
청명이 윤종을 그대로 냅다 걷어찼다.
그렇게 가볍게 대사형을 떼어 낸 그는 목을 어루만지며 인상을 찌푸렸다.
"누굴 등신으로 아나. 문제 안 생기게 잘 처리했으니까 걱정하지 마. 나 몰라?"
"……알아서 이런다. 알아서."
윤종이 깊게 한탄했다.
"세상에, 정신이 나가도 유분수지. 어떻게 사숙을 패냐, 사숙을. 사람이 최소한 지켜야 할 법도라는 게 있는데."
"……쟤가 언제는 그런 거 지켰습니까?"
"끄으응."
조걸이 불쑥 내뱉은 진실에 윤종이 나라 잃은 얼굴로 탄식했다. 당장 아침부터 벌어질 일을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릴 지경이다.
"분위기가 왜 이래. 내가 그런 것도 제대로 처리 못 할 것 같아?"
"……그래서 사숙은 뭐라 하시던데?"
"자길 좀 강하게 만들어 달라던데?"
"어?"
예상치 못한 대답에 윤종과 조걸이 동시에 두 눈을 부릅뜨고 청명을 바라본다.
정작 청명은 심드렁하게 귀나 파며 여상하게 말했다.
"뭘 새삼."
"……."
"……."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며 시선을 교환한다.
'말이 되나?'
'아니, 생각해 보면 말이 안 될 것도 없습니다. 우리도 그랬잖습니까?'
'그래도 사숙인데?'
'우린 사형이잖습니까?'
홀아비 기분은 과부가 안다고, 비슷하게 당해 본 이들이라 백천이 어떤 심정으로 그런 말을 꺼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 그래서 뭐라고 했느냐? 한다고 했냐?"
"아니. 그냥 팼는데?"
"……패?"
"응."
"왜?"
청명이 어깨를 으쓱한다.
"이유가 있나. 그냥 기분이 덜 풀렸으니까. 기분 풀릴 때까지 팼지."
"……."
이 순간 윤종은, 청명이 오기 전에 수련을 열심히 하지 않은 것을 죽도록 후회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청명이 오는 그 순간까지 잠 한숨 자지 않고 수련을 할 자신이 있었다.
그래야 저 미친놈의 죽빵을 후려갈겨 버릴 수 있을 테니까.
힘 센 놈이 정신까지 나가면 막을 도리가 없다는 걸 새삼 뼈저리게 실감하는 윤종이었다.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말고 잠이나 자. 일어나 보면 알 테니까."
"……."
"잔다."
청명이 터덜터덜 걸어 위층으로 올라가자 덩그러니 남은 조걸과 윤종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팼을까?"
"제가 청명에 대해 하나 깨달은 게 있습니다."
"그게 뭔데?"
"저놈이 개소리는 해도 거짓말은 안 합니다."
"……좋은 거 알았네."
아주 좋은 거. 이 새끼야.
"그런데 사형."
"응?"
"그럼 백천 사숙마저 청명에게 당했다는 소리 아닙니까?"
"……."
"진짤까요?"
"개소리는 해도 거짓말은 안 한다며."
"아니, 워낙에 믿을 수 없는 소리라. 그래도 그 백천 사형인데."
"그 청명이다."
"……납득은 가네요."
윤종이 고개를 내저으며 청명이 올라간 위층을 바라보았다.
저 괴물 놈이 이제는 백자 배까지 잡아먹는구나.
화산은 어디로 가는가. 화산은…….
어쩐지 울고 싶은 윤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