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뭔 개소리야. 내가 제일 세지! (1)
"으……."
정신이 듦과 동시에 끔찍한 고통이 밀려왔다. 머리가 깨어질 것 같은 고통에 신음하던 백천이 겨우겨우 눈을 뜬다.
'내가 얼마나 기절해 있었던 거지?'
시간 개념이 잡히지 않는다. 굉장히 오래된 것 같기도 하고, 금방 눈을 뜬 것 같기도 하다. 눈을 뜨자마자 들어오는 어두운 하늘을 보니 다행히도 반나절 이상 뻗어 있었던 건 아닌 모양이다.
"끄으으응."
고개를 살짝 돌려 보니 조금 떨어진 곳에서 느릿하게 검을 휘두르는 유이설의 모습이 들어왔다.
'시간이 많이 지난 건 아닌 모양인데.'
물론 무아에 빠진 이는 때때로, 하루는 물론이고 사나흘까지도 현실로 돌아오지 못하기도 하니 그녀의 모습만으로 시간을 추론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바닥을 짚고 겨우겨우 몸을 일으킨 백천의 귓가에, 낯익다면 낯익고, 낯설다면 낯선 목소리가 들려온다.
"일어났어?"
"……."
고개가 획 돌아간다.
어깨에 목검을 걸치고 쪼그려 앉은 청명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움찔.
백천의 몸이, 머리가 반응하기도 전에 경련을 일으키며 화들짝 뒤로 물러난다.
"놀라기는."
청명이 히죽 웃는다.
백천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아, 하고 탄식을 토했다.
'졌구나.'
아니, 진 게 아니다.
조금 전의 싸움은 차마 승패를 논하기도 부끄러울 정도였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결론은 하나다.
그는 완벽하게 패했다.
백천이 손을 들어 머리를 꾹꾹 눌렀다. 청명에게 얻어맞은 머리가 아직도 종처럼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엄살을 부릴 만한 상황이 아니다. 지금 자신을 때려눕힌 사질 놈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하나 물어도 되나?"
"얼마든지요."
"……넌 어떻게 그렇게 강할 수 있지?"
"호오?"
청명이 새삼스럽다는 눈으로 백천을 바라보았다.
'신기하네.'
보통 이런 말도 안 되는 경우를 겪은 이들은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눈앞에서 뻔히 벌어진 일임에도 믿지 못하겠다느니, 인정 못 하겠다느니 지껄이며 길길이 날뛰기 마련이다.
특히나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이들은 나불대는 주둥아리에 주먹을 틀어박아 버리기 전까지는 죽어도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하지만 백천은 누가 봐도 자존심으로 먹고사는 사람 같은데도 지금의 상황을 빠르게 인정하고 있다.
그거 하나는 장점으로 쳐줄 만하지만…….
"내가 강한 게 아니라 사숙이 약한 거지."
"내가?"
"응."
백천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
"내가 약하다고?"
"응."
백천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죽일 듯한 눈으로 청명을 노려보았다.
"나를 무시하지 마라. 나는 백천이다. 백자 배의 대사형이자 최고수고 언젠가 화산 장문인이 되어 화산을 이끌 사람이다."
"어, 맞지."
청명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백천의 말 중에서는 틀린 부분이 없었다.
다만 한 가지.
"그런데 그게 약하지 않다는 근거는 아니잖아?"
"……."
백천이 뭔가 반박하려는 찰나 청명이 손가락을 들어 그를 가리킨다.
"우물 안 개구리."
"……."
"그게 지금 딱 사숙에게 적절한 말이지. 우물, 그것도 좁아 터져서 지나가던 다른 개구리들이 들어올 생각조차 하지 않는 우물. 그 안에서 배나 한껏 부풀리고 있는 개구리."
백천의 얼굴이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진다.
"내가 개구리라고?"
"네."
"내가?"
인정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반문하는 백천을 향해 청명이 피식 웃었다.
"저기요, 사숙."
"……."
"사숙도 화산이 망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지 않나요?"
"……그야 물론이다."
망했다는 말은 심하지만, 몰락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 몰락한 화산을 다시 부활시키는 것이 바로 백천의 역할이었다. 백천은 지금까지 그리 믿고 살아왔다.
"하지만 그렇기에 나는 노력해 왔다. 어떻게든 화산을……."
"사숙이?"
청명이 황당하다는 눈으로 백천을 바라본다.
"언제?"
"……."
청명의 반응에 백천도 일순 할 말을 잃었다.
"내가 보기에는 전혀 그런 것 같지 않던데? 애들이랑 폐관한답시고 소꿉장난이나 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시원하게 술 한잔 걸쳐 주고, 그 화종지회인지 뭔지가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사질들이나 괴롭히는 사숙이 노력? 노오오려어어억?"
백천이 입을 다물었다.
스스로 노력이 부족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청명이 짚은 부분에 대해선 할 말이 없었다.
"사숙은 노력이 뭔지 모르는 것 같은데,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남는 시간을 투자하는 걸 노력이라 하는 게 아니야. 내 하고 싶은 일을 줄여 가며 하는 게 노력이지."
"……."
"사숙은 노력한 게 아냐. 그냥 화산이라는 작은 왕국에서 왕처럼 군림하고 싶었던 거지. 딱히 경쟁할 대상도 없고, 딱히 잔소리하는 윗사람도 없고. 편했지?"
백천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아니, 아니. 그런 얼굴 할 것 없어. 사숙에게 뭐라고 하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남들과 비교당하는 걸 거부하고 그 안에서 왕처럼 살기를 원했다면, 적어도 노력했다는 말은 하지 말아야지. 그리고 강하다는 착각도 버려야 하고."
청명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누구와 제대로 싸워 본 적 있어?"
"……."
"기껏해야 종남이었겠지. 사숙. 종남이 여기서는 저승사자 취급 받지만 강호 전체로 보면 종남도 기껏해야 열 손가락 안에 겨우 드는 것에 불과해. 다른 구파일방의 이대제자들은 지금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는데, 조금 뛸 줄 안다고 강해? 강하다고? 사숙이?"
청명의 얼굴에 명백한 비웃음이 내걸렸다.
"착각하지 마, 이 개구리야. 내가 강한 게 아니라. 너희가 약한 거야."
백천의 머릿속에서 커다란 경종이 울렸다.
'내가 약하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따져 보면 청명의 말에 틀린 구석이 조금도 없었다.
화산은 종남 하나도 버거워하고 있다. 실제로 그가 만약 이번 화종지회에서 활약을 하여 종남을 꺾어 낸다고 해도, 세상에는 종남 이상 가는 문파들이 분명 존재한다.
"……그럼 타문파에는 너보다 강한 놈이 얼마든지 있다는 거냐?"
"뭔 개소리야. 내가 제일 세지!"
"……."
말이 앞뒤가 안 맞잖아, 이 새끼야!
"다만 사숙이 당한 게 내가 강해서는 아니라고. 지금의 사숙은 종남도 못 이겨. 당연히 소림이나 무당 혹은 남궁세가 같은, 기재가 바닥에 굴러다니는 곳의 제자들과는 비교조차 안 되겠지."
백천이 입술을 질끈 깨문다.
하지만 청명은 인정사정없이 백천의 명치에 돌덩어리를 집어 던졌다.
"그러니까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사숙을 때려눕히는 건 딱히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거지. 이해해?"
이해는 했다.
하지만 이해하고 싶지 않다.
세상 누가 '너는 세상에 널린 모래알 중에 하나에 불과하다'라는 말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싶어 하겠는가?
하지만 백천은 반발하는 대신 이를 악물었다.
"그런 건 알고 있다."
"……."
"화산의 제자가 그런 것도 모를 것 같으냐? 안다. 알고 있다. 하지만 별수 없잖아. 내가 무당이나 남궁의 제자가 아닌 이상은 가진 것을 가지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지 않느냐!"
"그 노력을 안 했다고요, 이 사람아."
청명이 심드렁한 얼굴로 부연한다.
"노력도 제대로 안 했고, 그 노력의 방향도 잘못됐어. 그냥 열심히만 한다고 다 고수가 될 것 같아? 그럼 차라리 저기 가서 허수아비나 패. 한 오백 년 패다 보면 검강 정도는 쓸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같은 말을 해도 사람 기분 나쁘게 하는 법을 아는 청명이다.
백천이 한껏 얼굴을 구기며 물었다.
"그럼 너는 올바른 방향을 안다는 거냐?"
"적어도 사숙보다는 잘 아는 것 같은데."
청명이 씨익 웃었다.
그런 그의 반응에 백천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
'도깨비 같은 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놈이다. 어떻게 저리 강한지, 어떻게 저리 당당한지. 그리고 대체 어떻게 저리 여유로운지. 백천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니 건방질 수밖에.'
청명의 눈에 백자 배는 실력도 없으면서 배분이 높다고 거들먹거리는 것들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입장 바꿔 백천이라고 해도 청명보다 더 심했으면 심했지 덜하진 않았을 거다.
확실한 건 단 하나.
청명은 백천이 상상하는 이상으로 강하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운자 배보다 청명이 더 강할 수도 있다.
백천이 운암이나 운검과 비무를 한다고 해도 조금 전처럼 일방적으로 아무것도 해 보지 못하고 얻어맞지는 않을 테니까.
백천은 잠깐의 고민 끝에 단호한 결의를 두 눈에 담고 청명을 바라본다.
"그럼 너는 나를 강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는 말이냐?"
"호오?"
백천의 말에 청명이 눈을 가늘게 떴다.
'확실히 이놈 좀 이상한데.'
자존심이 지나치게 강하다. 하지만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다. 보통은 한 가지가 어그러지면 다른 쪽도 같이 어그러지기 마련인데 말이다.
그러니 나쁘게 말하자면, 이 사숙 놈은 자신의 상황을 뻔히 알면서도 자존심을 내세우는 사람이다.
인간으로서는 끔찍하지 않은가.
다만 무인으로서는 나쁘지 않다. 결국 무인은 자신이 가장 강하다. 혹은 자신이 가장 강해질 거라는 자부심 하나를 먹고 사는 족속이니까.
"물론 가능하지."
백천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그러더니 양손을 앞으로 내밀어 포권을 한다.
"어?"
그리고 더없이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나를 강하게 만들어 다오. 네가 하라는 것은 뭐든 다 하겠다."
"……."
백천이 살짝 고개를 든다.
"강해질 수만 있다면 사질에게 배우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다. 사숙과 사질의 관계가 부담이 된다면 나는 너를 사질로 대하지 않으마. 형님으로 모시라면 형님으로 모시고……."
"싫은데."
"스승으로……. 어?"
청명이 심드렁하게 대답한다.
"싫다고."
"……왜?"
백천의 눈이 흔들린다.
아니, 지금까지 그런 이야기를 한 건 결국 백천에게 길을 알려 주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내가 왜? 귀찮게."
"……."
"그리고 착각하는 모양인데, 사숙."
"응?"
"아직 안 끝났어."
청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목검을 들어 올려 빙글빙글 돌린다.
"사람이라는 게 참 이상한 면이 있다니까. 지가 한 짓은 생각도 안 하고 적당한 데서 혼자 타협을 해 버리지. 이 정도면 죗값은 충분히 치렀겠지 하고."
"……."
"그래. 뭐 그렇지, 그렇지. 죗값이야 치렀지. 삼대제자들을 괴롭힌 꼰대 짓은 그 정도면 충분히 갚았지. 하지만!"
청명의 두 눈이 불타올랐다.
"내 분노는 그 정도로 끝나지 않아!"
아니, 미친놈아.
백천이 기겁을 하려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청명은 마치 저승사자처럼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느긋하게 백천에게로 다가섰다.
"아직 납득이 안 될 거야. 그치?"
"아냐. 납득했다! 이미 충분히 납득했다!"
"아냐, 아냐. 사숙은 아직 이해가 덜 됐어. 지금도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리송한 게 분명해."
왜 네가 내 상태를 정하지?
내가 납득했다는데!
"걱정하지 마. 밤은 기니까. 내가 오늘 확실하게 납득시켜 줄게. 왜 사숙이 약한지, 왜 사숙의 검이 잘못됐는지. 그리고……."
청명의 눈이 희번덕거린다.
"왜 나를 건드리면 안 되는지."
"……."
"이히히힛! 간다아아아!"
"히이이익!"
낙안봉에서 흘러나온 비명은 안타깝게도 화산의 본산까지는 닿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