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누가 비무래? 넌 이제 뒈졌다. (5)
'저놈이 미쳤나?'
백천은 황당함을 금할 수 없었다.
청명이 고개를 옆으로 우득우득 꺾어 대며 걸어오고 있다. 그 모습이 흡사 뒷골목 무뢰배가 양민들을 위협하는 모양새다.
백천이 당황한 이유는 딱 두 가지였다.
하나는 청명의 무뢰배처럼 구는 모습이 너무 잘 어울린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지금 청명이 위협하고 있는 사람이 다름 아닌 백천이라는 사실이었다.
'정신이 나가 버리지 않고서야?'
백천은 청명의 사숙이다.
물론 이 비무에 있어서만큼은 배분이고 뭐고 없는 걸로 하겠다, 백천의 입으로 직접 말했으니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백천과 청명이 한 배분이 차이가 난다는 점이었다.
백천은 지금 청명의 나이보다 더 어렸을 때 화산에 입문했다. 다시 말하자면 무학을 익혀 온 세월이 이미 십오 년은 깔끔하게 넘었다는 뜻이다.
반면 청명은?
'입문한 지 이제 겨우 반년.'
설사 엄마 배 속에서부터 무학을 익혔다고 해도 백천보다 오랜 세월 무학을 익혔을 수는 없다. 다시 말해, 청명의 재능이 저 달마대사나 삼봉진인에 버금간다고 해도 지금 백천을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재능도 최소한 발현될 시간이 있어야 하는 법.
재능 하나만으로 시간의 벽을 깔끔하게 뛰어넘을 수 있다면 누가 노력하여 무학을 배우려 하겠는가?
'그런데 저 반응은 대체 뭐지?'
하지만 청명은 자신이 백천을 이기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굴고 있다. 황당해서 말도 나오지 않는다.
"……네가 정말 미쳐 버렸구나."
"에이, 아니지. 미친 건 너지."
"뭐?"
"미치지 않고서야 나한테 시비를 걸겠어?"
과거 청명과 얽혔던 이들이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면 다들 오와 열을 맞춰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종남에서는 화산에서 내린 악귀, 무당에서는 도가 사상 유일무이한 개차반이라 불리던 청명이다. 청명의 명성은 하늘을 찔렀지만, 그의 악명은 대지를 뒤덮었다.
'뒈질라고.'
청명이 손을 풀었다.
놀랍게도, 애초에 청명은 폭력을 그리 선호하지 않는다.
응?
지금까지 한 건 다 뭐냐고?
그야 안 패면 말을 들어먹질 않으니까.
청명에게 있어서 폭력은 수단일 뿐이다. 그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굳이 손을 대지 않고, 윽박지르지 않아도 다들 알아서 잘하는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왜 굳이 힘을 빼 가며 폭력을 쓰겠는가? 그게 잘 안 되니까 문제지.
하지만 지금 청명은 간만에 폭력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활용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중이다.
"네 방자함은 끝을 모르는구나. 내 손속이 독하다 원망치……."
"계속해 봐."
"……지금 뭐라 했느냐?"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원래 평소에는 싸우기 전에 말을 많이 하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 너는 들어 준다. 어차피 조금 지나면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될 테니까."
"이놈이 끝까지!"
백천이 검을 움켜잡았다.
그 역시 더는 시간 끌 생각이 없었다.
'요절을 내 버리겠다.'
백천은 이를 갈았다. 아무리 비무가 아니라지만 사제를 검으로 벨 수는 없다. 하지만 검면으로 패 버릴 수는 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앞으로는 눈만 마주쳐도 오줌을 찔끔 지리도록 아주 다져 버릴 생각이었다.
백천이 검을 꽉 움켜잡고는 청명을 향해 달려들었다.
백천의 검이 쾌속하게 청명에게로 날아든다. 유이설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른 검. 얼핏 보면 닮아 보일지 모르나, 그녀의 검보다 훨씬 더 무겁고 강맹했다.
어찌 보면 정도(正道) 그 자체.
화산 검의 기본인 다채로운 변화를 최소로 줄이고, 강맹한 맛을 살린 검이다. 단 일 초의 검식만으로 청명은 백천의 검이 어떤 성향을 가졌는지 파악했다.
'기묘하네.'
종남은 자신들의 검을 버리고 화산의 화려함을 닮으려 했다. 그런데 백천은 오히려 반대로 화산의 화려함을 줄이고, 종남의 정직함을 자신의 검에 담고 있었다.
'하기야.'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검이란 언제나 변한다. 그리고 그 변화의 방향은 좀 더 발전된 경지. 더 나아 보이는 경지를 목표로 할 수밖에 없다.
화산의 전성기, 청명에게 짓눌렸던 종남은 화산의 화려함이 정답이라 여겼을 것이다.
반면 종남의 전성기에 짓눌린 화산, 특히나 화종지회를 통해 격차를 절절히 실감한 화산의 이대제자들은 종남의 검을 정답으로 여겼을 것이다.
서로 닮으려 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하나!
'한심한 것들.'
청명이 미간을 좁혔다.
어디 처배울 게 없어서 종남의 검을 배운다는 말인가? 여하튼 이 새끼는 사사건건 마음에 안 든다.
'제 가진 것도 소화하기 벅찬 놈이 남의 것을 탐내?'
아무래도 알려 줘야겠다. 화산이 무엇을 가졌는지.
그때 백천이 달려들며 일갈한다.
"오늘 네 버릇을 고쳐 주겠다."
그리고 청명은 달려드는 백천을 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내!"
오른발을 한 발 뒤로 뺀다.
"버릇은!"
허리가 뒤로 뒤틀린다.
"지금껏!"
그리고 한껏 뒤로 당겨진 주먹이 앞으로 튕기듯 뻗어진다.
"고친 사람이 없다, 이 새끼야!"
자랑이다.
청명의 권이 백천의 검이 만들어 낸 검명의 변화를 뚫고 들어간다. 변화와 변화의 사이를 노려 정확한 각도와 적절한 속도로 뻗어지는 일 권.
백천은 자신의 검영을 뚫고 들어오는 청명의 주먹을 보며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말은 쉽지. 닿기만 해도 팔이 잘려 나가는 검기의 변화 속에 주먹을 쑤셔 넣는다는 게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백천의 입장에서는 귀신의 손이 검기 사이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것과 다를 바 없이 느껴졌다.
하지만 놀랄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퍼어어억!
백천의 턱이 그대로 돌아간다.
뚜두두둑.
목 뒤에서 뭔가 어긋나는 소리가 들린다. 순간 의식이 아득하게 날아갔다가 돌아온다.
정신을 차려 보니 그의 몸이 저만치 뒤로 튕겨 나가고 있었다.
'뭐?'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현실감이 사라진다. 튕겨 나가는 와중에도 백천은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멀어졌던 현실감이 순간적으로 그를 덮친다.
쿠웅!
"끅!"
몸이 바닥에 처박히는 순간,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 전신을 뒤덮었다.
"끄으으윽."
처박힌 등은 오히려 괜찮다. 진짜 고통은 턱에서부터 퍼져 나간다.
백천이 턱을 부여잡고 신음했다.
무학을 익힌다는 것은 고통에 익숙해진다는 말과 그리 다르지 않다. 육체를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고통은 물론이고, 대련과 비무로 부상을 입는 경우 또한 빈번하니까.
하지만 이건 지금까지 그가 겪어 왔던 그 어떤 고통과도 달랐다. 그야말로 고통의 신세계가 열리는 느낌이다.
"일어나, 인마."
청명이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백천에게 다가온다.
그 모습을 본 백천이 비척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청명이 의외라는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호오? 일어나네?"
네가 일어나라며?
턱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버텨 내는 와중이라, 백천은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가진 심력이 모조리 빨려 나가는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파들거리는 다리를 필사적으로 진정시키며 검을 들어 올렸다.
입 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진다.
"어, 어떻게?"
백천은 바보가 아니다.
조금 전 있었던 일격의 교환은 절대 우연이 아니다. 요행을 바라고 검기 속으로 자신의 팔을 밀어 넣을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자면 청명의 눈에는 백천의 검이 빤히 보였다는 뜻이다.
"어떻게는 얼어 죽을."
청명이 한심하다는 듯이 백천을 바라보았다.
"원래 변화를 전제하고 만들어진 검식을 네 멋대로 고쳐 변화를 줄여 버렸는데, 허점이 없을 것 같냐? 이것들은 하나를 알고 둘을 모르네. 당연히 빈틈이 숭숭 생기지!"
백천의 눈에 핏발이 섰다.
"누, 누구도 그런 빈틈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야 네가 상대하는 놈들도 고만고만하니까. 당장 장로급만 되었어도 금세 알아챘을걸?"
아닌가?
어……. 지금 장로들 수준이? 어?
넘어가자.
"내 검이 잘못되었다는 거냐?"
"어."
청명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말했다.
"지금이야 네가 그걸 바탕으로 남들보다 조금 앞서 나갈 수야 있겠지.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네 사제들이 너를 앞지르기 시작할걸?"
"네가 그런 걸 어떻게 안다는 말이더냐! 이제 겨우 입문한 놈이! 난 믿을 수 없다."
"아. 뭐 그러시든가."
청명이 피식 웃었다.
종남이 저지른 잘못을 화산의 제자가 똑같이 저지르고 있다. 그리고 청명은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이해했다.
'지금이 이상한 게 아니야.'
아마 청명이 살던 시대에도 이와 같은 일은 수도 없이 벌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청명은 그런 변화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알지 못했을 뿐이다.
수많은 경험을 하고 드높은 경지를 경험했기에 검이 어떻게 발전해 나갈지 파악할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되었다. 그 눈으로 이제 막 검을 만들어 나가는 이들을 보니, 예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네가 화산의 제자라는 것에 감사해라."
"뭐?"
청명이 목검을 들어 올렸다.
생각 같아서는 주먹으로 뒈지게 패 버리고 싶지만, 그래도 귀여운 화산의 제자가 아닌가? 패더라도 기왕이면 발전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걱정하지 마. 주먹 말고 검으로 패 줄 테니까. 크으, 내가 이렇게 자상하다니까."
"……."
미친놈인가?
아니, 미친놈 맞는 것 같은데?
황당해하는 백천을 보며 청명이 깊게 숨을 내쉬었다.
"혹자들은 화산의 검이 매화를 닮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건 화산의 검을 잘 모르는 이들이 하는 말이야. 화산의 검은 매화를 흉내 내는 게 아니다. 화산의 검이 목표로 하는……."
진지하게 말하던 청명이 돌연 인상을 썼다.
"아, 모르겠다. 네가 듣는다고 알겠냐. 몸으로 처맞으면 이해가 쉽다. 간다!"
"어, 어어?"
백천이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 발 물러났다.
하지만 청명이 달려드는 속도가 그보다 배는 빨랐다.
백천이 검을 휘둘러 달려드는 청명을 후려친다. 검수로서 그가 만들어 낸 본능이 그의 머리보다 빠르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백천은 보았다.
청명의 손끝이 살짝 흔들린다 싶더니 그의 목검이 수십 개로 불어나며 자신의 시야를 가득 메워 버리는 모습을 말이다.
'이, 이게 뭐……?'
"하체!"
따아아아악!
목검이 백천의 정강이를 후려친다. 말 그대로 눈물이 찔끔 나는 고통에 백천이 입을 따악 벌렸다.
하지만 끝난 게 아니다.
"손목!"
따아아아악!
청명의 검이 정확하게 검을 잡고 있는 백천의 손목을 후려쳤다. 손목부터 손까지 거의 사라져 버린 듯한 느낌에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했다.
'버, 버티…….'
그때 백천의 귀로 차마 듣고 싶지 않은 소리가 파고든다.
"대가리! 대가리! 대가리! 대가리! 대가리!"
왜 한 번이 아닌데, 인마?
쾅! 쾅! 쾅! 쾅! 쾅! 쾅!
머리를 터뜨려 버릴 것 같은 연격을 얻어맞은 백천이 입을 딱 벌리고 모로 넘어갔다.
쓰러지는 그 순간까지도 백천의 머리를 지배한 생각이 있었다.
'왜 다섯 번 말하고 여섯 번 때리지?'
의식이 날아가는 그 순간까지도 풀지 못한 의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