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누가 비무래? 넌 이제 뒈졌다. (4)
"이노오오옴! 뭐 하는 짓이냐아아아아!"
백천이 미친 듯한 속도로 달려오는 것을 본 청명이 혼이 빠진 듯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
아이고, 내 팔자야.
백천이 일말의 주저 없이 청명에게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다.
아니, 이 새끼도 진검이네?
백자 배 놈들은 무슨 진검에 한이 맺혔나? 뭔 일만 있으면 진검 뽑고 난리네?
잠깐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백천의 검이 청명을 향해 위협적으로 날아든다. 기가 잔뜩 실린 검은 새파란 기운을 발하며 청명의 어깨를 노려 왔다.
눈이 완전 돌아간 와중에도 급소가 아닌 곳을 노린 건 합격.
다만.
"검기 실어 버리면 어차피 뒈지잖아! 이 미친놈아!"
청명이 날아드는 검을 발로 걷어찼다.
카앙!
검기가 실린 검과 발이 맞부딪혔는데 어이없게도 쇳소리가 터져 나온다. 역으로 실린 힘을 감당하지 못한 백천이 뒤로 나뒹굴었다.
"허?"
몸을 벌떡 일으킨 백천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청명과 자신의 검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어떻게 튕겨 나왔는지도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다.
"쯔읏."
청명이 길게 혀를 차고는 재빨리 유이설의 상태를 살폈다. 무아에 든 와중에 옆에서 폭음이 터졌으니 분명히…….
"괜찮네?"
보통은 이 정도 폭음이 터졌으면 벗어날 만도 한데, 유이설은 여전히 무아지경에 들어 있었다.
얘 둔하네.
너무 둔해.
하지만 지금은 그 둔함 덕분에 이득을 봤다. 사람이 검을 휘두르다 무아지경에 빠지는 경험은 그리 흔한 게 아니다.
불가에서는 자신을 잊고, 껍데기를 벗어던져 새로운 경지를 연다는 의미로 따로 '탈각(脫殼)'이라 지칭하기도 할 정도다. 무인에게 있어서는 더없이 중요한 순간이라 할 수 있다.
만약 이 충돌로 무아에서 깨어났다면 평생을 아쉬워했을 것이다.
"이놈! 뭐 하는 짓이냐! 무아(無我)가 무인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순간인지를 모르는 거냐?"
그걸 아는 놈이 그래?
청명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백천을 바라보았다.
왜 열이 받았나 했더니.
"무아지경에 든 사람을 건드리다니! 아무리 상식이 없다고 해도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있는 법이다! 이 무도한 놈 같으니!"
백천이 눈에 살기까지 띄고 청명을 노려보았다.
"내가 너를 좋게 보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설마 무아에 든 사고를 건드릴 정도로 빌어먹을 놈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건만! 진즉에 네 버릇을 고쳐 놓았어야 하는데!"
청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니, 인마. 건드린 게 아니라 도와준 거라고.
하기야 네가 그걸 어떻게 알겠냐. 다 내 죄지. 내가 잘난 죄지.
납득은 하지만 말이 좋게는 안 나간다.
"그걸 아는 사람이 검 뽑고 덤벼요?"
"뭐라 했느냐?"
"그러다가 그 소중한 사고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네가 반격만 안 했으면……!"
"죽으라고?"
"……."
청명이 뚱하게 대꾸하자 백천은 당황한 듯 어버버 했다.
'백자 배는 다 미친놈들만 모아 놨나.'
세상은 보통 멀쩡한 이들이 주를 이루고, 간간이 미친놈들이 섞여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백자 배 놈들은 그 미친놈과 정상인의 비율이 거꾸로 되어 있는 것 같다.
일단 지금까지 청명이 말을 나눠 본 백자 배 중에서는 정상인이 없다.
윤종이 들었으면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 나무란다고 학을 뗐겠지만, 뭐 어떤가 여기 없는데.
"내가 너를 죽일 리가 있겠느냐?"
"살기 실렸던데."
"……그건 워낙 급박하니."
"검기도 뽑았던데."
"……그, 그건."
청명의 말을 들으며 움찔움찔하던 백천의 얼굴이 일순간 멍해진다.
아니 잠깐만.
청명의 말대로다. 살기도 싣고, 검기도 뽑았다. 그런데 저놈은 어떻게 상처 하나 없이 저리 멀쩡한 거지?
다른 이도 아니고 백천이 힘을 실은 일격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쳤다는 건가?
"사매에게서 물러나라!"
백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그리고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네가 뭘 하고 있었는지는 더 이상 묻지 않겠다. 하지만 지금 당장 검을 내려놓고 뒤로 물러나라. 그러지 않는다면 너는 오늘 사숙이 아닌 무인으로서의 나를 겪어야 할 것이다."
좋은데?
청명이 반색했다.
"어, 진짜요?"
"……."
와, 그거 진짜 바라던 건데.
"끝까지 이놈이……."
백천이 이를 뿌드득 갈았다.
사람에게는 역지사지(易地思之)가 필요하다. 입장 바꿔 생각해 보면 지금 백천이 화를 내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의 상식으로 봤을 땐 벌어져서는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으니까.
그러니 원래는 여기서 물러나 주는 것이 맞았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청명이 입맛을 다시며 슬쩍 고개를 돌렸다.
'이거 조금만 더 손보면 엄청 큰 게 나올 것 같은데.'
유이설은 지금 일생 다시없을 깨달음에 들어 있다. 뜬금없기는 하지만 애초에 깨달음이라는 게 느닷없이 찾아오곤 한다.
누군가는 평생을 면벽하며 고련해도 단 한 번의 깨달음조차 얻지 못하는 반면, 누군가는 그냥 밥을 먹다가도 깨달음이 찾아온다. 노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고자 해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하늘에 달린 일일 뿐이다.
그리고 유이설이 얻은 가장 큰 기적은 무아에 든 게 아니다. 무아에 드는 시점에 청명이 옆에 있었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무아지경에 든 이는 자신을 잊고 오로지 검에 빠져들기 마련이다. 그 와중에 자신이 알고 있던 검을 벗어나 새로운 검을 펼치기도 하고, 더 높은 경지를 견식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누구도 무아에 든 이를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 자칫 괴리를 벗어난 검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할 경우에는 큰 사고가 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명이 누구인가.
그는 화산의 모든 검을 이해하고, 누구도 오르지 못한 경지에 발을 들였던 대종사(大宗師)다. 아직 이 몸으로 구현하지 못할 뿐, 화산 검술에 대한 이해도는 화산의 역사를 다 따져 봐도 청명을 넘는 이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니 유이설의 무아에 개입하여 그녀의 검을 더 높은 곳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건데…….
'저 새끼는 왜 나타나선!'
남이 보는 앞에선 이끌어 주기가 애매하다. 잘못했다가는 일이 끝도 없이 커져 버릴 수가 있으니까.
청명이 유이설을 슬쩍 보고는 입맛을 다셨다.
'어쩌겠냐? 네 복이지.'
화산을 끌고 가기 위해서는 한 명의 고수가 아쉬운 상황이지만, 청명은 이미 떠나 버린 배에는 미련을 두지 않는다. 하지만…….
'배를 놓치게 만든 놈을 패는 건 다른 일이지.'
유이설에게서 두어 발짝 멀어진 청명이 백천을 노려보았다.
"됐어요?"
"더."
"쯧."
청명이 다시 유이설에게서 두 발짝 더 떨어졌다.
"됐죠?"
"……지금 나와 장난하자는 거냐? 제대로 떨어져라. 네놈이 사매에게 해를 끼치게 둘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해를 끼치긴 누가 해를 끼쳐요. 해는 그쪽이 끼치고 있구만."
"그쪽?"
노기가 묻어나는 백천의 반문에 청명은 그만 할 말을 잃은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얘들은 존댓말에 한이 맺혔나.'
유이설도 그러더니 백천도 말이 조금만 짧으면 금세 발끈한다. 공자님이 살아 돌아오시면 당장 제자로 들일 인재들이네, 아주 그냥.
"네, 사숙. 지금 문제는 사숙인 것 같은데요."
백천이 차가운 눈으로 청명을 노려본다.
"나는 네 방자함을 어떻게든 이해하려 했다."
얼씨구?
온갖 트집은 다 잡아서 문제를 키우려고 난리를 치시더니, 이제 와서 군자……. 아, 이것도 그쪽인가. 여하튼 도관에 왜 저런 게 들어와서는.
"하지만 내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다. 그리고 세상에는 말이 통하지 않는 놈도 있는 법이지."
"와……."
청명이 탄성을 흘리자 백천이 미간을 찌푸린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아뇨, 아뇨. 그냥 신기해서요."
"뭐가?"
"말해도 모를 거예요."
백 년이 지났는데 어떻게 사형제들이 하던 거랑 똑같은 말이 나오지?
- 저놈에겐 말을 해 봐야 소용이 없다.
- 사형에게 도를 논하느니, 차라리 소나 닭에게 도경을 읊는 쪽이 빠를 겁니다.
- 싸움이나 못하면 말도 안 하지.
사람이란 다 비슷비슷한 모양이다.
그게 아니면 청명이 백 년이 지나도록 바뀐 게 없거나.
신기해하며 히죽거리는 청명에게 백천이 날카롭게 말했다.
"검을 들어라. 내가 오늘 너에게 버릇이 뭔지를 가르쳐 주겠다."
"괜찮겠어요?"
"이놈이!"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거, 성질만 급해서는."
청명이 너스레를 떨자 백천이 미간을 좁힌다.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아뇨. 걱정돼서 그러죠. 그래도 사숙인데 사질과 싸움박질했다고 하면 체면이 상하시지 않을까 싶어서요."
백천이 피식 웃는다.
"여기까지 와서 체면을 찾을 성싶으냐? 사숙들이나 장로님들이 너를 보호해 줄 거라 생각하면 틀렸다. 나중에는 몰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분들도 너를 비호할 수 없으니까. 벌이야 나중에 받으면 그만이지."
"그거 참 간만에 듣는 사내다운 말이네요."
청명이 흠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근데 저한테 더 좋은 방법이 있는데 들어 보실래요?"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아뇨. 그게 아니라 우리끼리 맹세를 하는 거죠. 여기에서 벌어진 싸움박질을 세상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다고요."
"뭐?"
청명이 씨익 웃는다.
"제가 얻어맞아도 사숙조들에게 이르지 않겠다는 소리죠. 남자가 쪼잔하게 싸움에 졌다고 달려가서 일러 댈 수는 없잖아요. 안 그래요?"
백천이 묘한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이놈이 무슨 생각이지?'
살짝 그의 표정을 확인한 백천이 정색하며 말했다.
"이 상황을 모면해 보려는 모양인데, 이제 와 그런다고 내가 봐줄 것 같으냐? 너는……."
"아니, 그게 아니고."
청명이 답답함을 못 이겨 한숨을 내쉬었다.
"사숙이니 사질이니, 문파니 그런 것들 다 벗어던지고 그냥 깔끔하게 가자고요. 뒤끝 없이. 그게 서로 낫지 않아요?"
"……."
"서로 약속만 하면 제가 무슨 꼴을 당해도 윗분들께 말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만약 말을 하면 하라는 건 뭐든 다 하죠. 물론 사숙도 마찬가지고요. 어때요?"
백천이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사내다운 면은 있구나. 좋다. 네가 원한다면 맹세해 주지. 이곳에서 벌어진 일은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겠다."
백천의 입장에서는 저 제안을 받지 않을 이유가 없다.
청명을 후려 패는 데 있어서 가장 껄끄럽던 부분이 바로 운자 배와 현자 배니까. 그들의 비호를 받는 청명이 백천에게 얻어맞았다고 쪼르르 달려가서 이르면 뒷수습이 귀찮아질 게 불 보듯 빤하지 않은가?
그런데 그 찝찝한 부분을 스스로 없애 주겠다니. 백천이 마다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뭔가 찜찜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럼 맹세한 거예요."
"그렇다. 너 역시 마찬가지겠지."
"네. 저도 맹세하죠."
"그럼 이걸로 뒤끝은 사라졌군."
백천이 검을 슬쩍 들어 올려 청명을 겨눴다.
"그래도 사내다운 면이 있다는 건 인정해 주마. 이 비무에서 나는 네 사숙이 아니고, 너는 내 사질이 아니다. 그리곤 나는 이 비무로 네게 가졌던 악감정을 모두 정리하겠다. 너 역시……."
"비무?"
그 순간 삐딱한 청명의 목소리가 백천의 말을 끊어 버린다.
백천이 의아한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어?'
그리고 백천은 보고 말았다.
청명이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사악한 얼굴로 웃고 있는 것을.
"누가 비무래? 넌 이제 뒈졌다, 이 새끼야."
청명이 콧김을 뿜으며 백천을 향해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