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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83화 (84/1,567)

83화. 누가 비무래? 넌 이제 뒈졌다. (3)

"내가 네 사고. 너는 내 사질."

"그래서?"

"사고에게 예의."

'사고는 얼어 죽을. 귀신 같은 게.'

청명이 짜증을 한껏 담아 한숨을 내쉬었다.

기척이 없는 것까지는 그렇다 치자, 이 넓은 중원 천지에 저런 특이체질 하나 있다고 해서 이상한 건 아니니까.

사실 청명이 워낙에 기감으로 사람을 느끼는데 특화가 되어 있어서 그렇지, 마음먹고 오감을 활용하면 인기척을 느끼지 못할 정도는 아니니까.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아니, 왜 이렇게 따라다녀!"

"다녀?"

"……요."

청명은 매우 깊은 슬픔을 느꼈다.

'사형들이 지금 내 꼴을 보면 피눈물…… 아니지. 배를 잡고 웃다가 숨이 넘어가겠지.'

손이 부러질 때까지 박수를 칠지도 모른다. 그러고도 남을 양반들이니까.

손녀뻘도 안 되는 어린 후예에게 존대까지 붙이려니 인생무상이 절로 찾아온다. 세상의 허무함을 직격으로 처맞고 깨달음을 얻어 우화등선할 기세다.

선계에서 청명을 받아 주느냐의 문제는 둘째 치고 말이다.

- 안 받는다, 이놈아.

아, 좀!

청명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유이설을 바라보았다.

"또 왜! 왜 자꾸 사람을 이렇게 따라다녀!"

"다녀?"

"……다녀요."

유이설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눈썹을 치켜세웠다.

살짝 화난 얼굴을 해서 겁을 주려는 모양인데, 보고 있으니 귀엽다.

'그냥 내가 늙은이라 귀여운 건 아닌 것 같고.'

조걸을 비롯해 나머지 삼대제자들이 모두 입을 모았듯, 확실히 예쁘긴 예쁘다. 표정이 다채롭고 인상이 부드러웠더라면 지금보다 몇 배로 사람의 눈길을 끌 만한 얼굴이다.

그래 봐야 가죽 껍데기지만.

하지만 사람이란 그 가죽에 연연하는 법. 청명도 과거에 수려한 외모로 득을 크게 보지 않았던가…….

아, 알았어요! 안다고!

"그 검."

유이설이 청명을 보며 말했다.

"매화를 피우는 검."

"뭔 말 하는지 나는 저어어언혀 모르겠네에."

청명이 시치미를 뗐다.

설명하려면 설명하지 못할 것도 없지만, 굳이 그래야 할 이유도 없다. 귀찮은 건 딱 질색이니 그냥 잡아떼는 게 상책이다.

"뭘 잘못 본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그런 거 모르니까 헛수고하지 마시고……."

"가르쳐 줘."

"가세……. 어?"

청명이 눈을 살짝 크게 떴다.

"뭐라고요?"

"가르쳐 줘."

청명이 미간을 좁힌다.

'따라 다닌 이유가 이거였나?'

보나 마나 어디서 화산의 것이 아닌 무학을 익혔냐느니, 사술을 익혔다느니 하면서 사람을 귀찮게 굴 것이라 생각했는데 저런 말이 나올 거라곤 예상도 못 했다.

그러자 새삼 궁금해졌다.

"그게 뭔지 알……. 아니지. 저는 그런 거 모른다니까요."

유이설이 입술을 살짝 깨문다.

"사숙들에게 말할 거야."

"말씀하시든가. 그쪽에서 믿어 준다면."

"장문인께도 말씀드릴 거야."

"네네. 마음대로 하세요. 마음대로."

청명이 콧방귀를 끼며 손을 휘휘 내젓는다.

'믿을 걸 믿으라고 해라.'

화산에 들어온 지 반년도 안 된 새파란 놈이 검을 떨쳐 연화봉 가득 매화를 피워 냈다?

장문인이

'허허. 우리 이설이가 폐관 수련을 하느라 많이 힘들었던 모양이구나. 헛것이 다 보이고. 내 좋은 의원을 알아봐 주마.'

라며 묶어서 의가에 집어던져 버리지 않으면 다행일 거다.

"말 안 할 테니 가르쳐 줘."

"말씀하시라니까. 나는 상관없다니까요."

청명이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남의 수련 방해하지 말고 좀 가세요. 사고 때문에 매번 수련도 못 하잖아요."

가라, 응?

좀 가라! 이 찰거머리 같은 것아!

청명이 뭔가 더 쏘아붙이려는데, 유이설이 청명을 빤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안 가르쳐 줘?"

"저기요. 사고."

"응?"

"그쪽이 사고고 내가 사질인데, 내가 사고에게 뭘 가르쳐요, 가르치긴? 오히려 배우면 내가 배워야지."

"……."

유이설이 움찔했다.

'오, 이거 통한다.'

처음 만났을 때도 자신이 사고라는 것을 강조하던 유이설이다. 그러니 이 말이 통하겠…….

"배움에는 위아래가 없어."

"……."

아니, 이것들은 대체 어디서 유가 사상을 배워 와서는! 백자 배는 단체로 유교로 전향이라도 했나? 어디 신성한 도관에서 유교질이여! 태상노군이 아시면 거품을 무시겠네!

"그러니 가르쳐 줘."

"아니, 내가 가르쳐 줄 게 없다니까 그러네!"

청명이 딱 잘라 말했다.

"사고가 뭘 본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거 그냥 꿈이에요. 아니면 환상이거나. 그게 아니면 힘들어서 헛것이라도 봤겠죠. 나는 사고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거든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하고 좀 가세요."

청명이 단호하게 자르자 유이설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잘못 봤을 리가 없어."

"아니, 그냥 헛것을……."

"전에도 본 적이 있으니까."

"그야 전에……."

청명의 눈이 번쩍 떠졌다.

"뭐?"

청명의 기세가 일변했다. 그리고 날카로운 눈으로 유이설을 노려본다.

매화를 피워 내는 검.

매화검법.

화산에는 매화를 본뜬 수많은 검법이 있다.

하지만 단순히 매화의 형상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매화를 피워 낼 수 있는 검은 몇 되지 않는다.

그중 단 하나를 제외하고는 일반 제자들에게 전해지지 않는다. 최소한 장로는 되어야 익힐 수 있다. 그것도 비급이 아니라 오로지 구결로만 전수된다.

그날, 십만대산의 정상에서 화산의 모든 장로가 죽었다. 아무도 전멸을 생각하지 못했기에 구결조차 남기지 못했다.

그 말인즉슨.

누군가 검으로 매화를 피워 냈다면, 그건 결국 이십사수매화검법을 익혔다는 뜻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검법이 지금 전해진 곳은…….

"종남파와는 무슨 관계지?"

청명이 살짝 으르렁대듯 말하자 유이설이 고개를 갸웃한다.

"종남?"

"……."

"웬 종남?"

아닌가?

청명이 유이설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아무리 뜯어봐도 전혀 모르겠다는 기색만이 가득하다. 만약 이게 연기라면 빨리 검을 때려치우고 경극 배우로 전향하는 게 좋다. 황제 앞에서도 공연을 할 수 있게 될 테니까.

하지만 맹한 구석이 있는 유이설이 표정까지 완벽하게 연기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고.

청명의 기세가 맥없이 풀린다.

'하기야.'

종남에서 비급을 봤다고 해도 매화검법을 제대로 익힐 수 있을 리 없다. 매화검법은 화산의 내공과 함께할 때 그 의미가 있는 검법이니까.

……근데 이 새끼들 설마 화산의 내공까지 훔쳐간 건 아니겠지?

설마?

실실 웃는 얼굴로 돌아간 청명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묻는다.

"전에도 봤다니 그게 무슨 소리죠?"

유이설의 얼굴이 조금 멍해진다.

"아주 오래전에."

뭔가 오래전 기억을 떠올리는 듯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던 유이설이 다시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가르쳐 줘."

"진짜 모른다니까 그러시네."

"그래?"

유이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포기했나?'

그럼 다행…….

"그럼 어쩔 수 없지."

"그래요. 이제 이해를 한 모양……."

스르르릉.

유이설의 허리춤에서 검이 뽑혀 나온다. 청명이 식겁한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아, 아니 검은 왜 갑자기!"

"안 가르쳐 준다 이거지?"

이거 미친년인가?

검술 하나 안 가르쳐 준다고 검을 뽑네? 대체 윗놈들은 뭘 했기에 이런 걸 제자로 받아서 키우고 있었지?

"안 가르쳐 준다는데 검은 왜 뽑아요?"

"네 말이 맞으니까."

"네?"

"나는 사고, 너는 사질."

"……."

"그럼 내가 가르쳐 줘야지."

유이설이 검을 들어 청명을 겨눈다.

그 광경을 보며 청명은 흐뭇하게 웃었다.

'어쩐지 백자 배들이 얘랑 안 친하더라.'

당연히 그렇겠지. 제정신이 아니니까.

'매화검법에 집착하는 것도 꽃 달라고 그러는 거 아닌가?'

머리에 매화 한 송이 올려놓으면 식별하기도 편해 서로 좋을 것 같기는 하다. 광년이는 피해야지. 아암.

"간다."

"뭘 와! 오지 마요!"

하지만 미친 사람이 청명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유이설이 검을 일직선으로 겨눈 채 청명을 향해 쾌속하게 달려든다.

"에이!"

청명은 얼른 목검으로 날아드는 유이설의 검을 쳐 내며 재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아니! 뭔 사고가 사질한테 진검 들고 덤비냐고!"

"네가 나보다 더 강하니까."

어? 그건 맞는 말인데?

아니,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가 뭐지?

사고 과정은 분명 틀렸을 텐데, 정답을 맞혀서 구박할 수 없는 이상한 경우다.

팟! 파아앗! 파앗!

전에 잠깐 보았던 것처럼 유이설의 검은 경쾌했다. 그리고 더없이 유려했다.

날카롭게 찔러 들어왔다가 부드럽게 휘어진다. 환상처럼 흔들렸다가 다시 가볍게 찔러 들어온다.

화산의 검.

화산으로 돌아온 이후 청명은 수많은 검을 보았다. 같은 청자 배는 물론 운검의 검을 보았고, 때때로 장로들의 검들도 견식 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앞에 펼쳐지는 이 검은 그 누구의 검보다 화산의 근원에 맞닿아 있다.

보고 있으면 조금 아련해질 정도로 말이다.

어째서일까?

그녀의 성향이 화산의 그것과 닮아 있기 때문에? 아니면…….

"빈틈!"

그 순간 유이설의 검이 빛살 같은 속도로 청명의 얼굴을 찔러 들어 온다.

청명이 고개를 획 돌려 그녀의 검을 피해 냈다.

스슷.

앞 머리카락이 몇 가닥 잘려 나간다.

"히이이이익!"

아니, 이 미친년이 진짜 찌르네?

"미쳤어요? 못 피하면 죽었잖아!"

"네가 못 피할 리가 없어."

"네가 왜 나한테 자신감을 갖는 건데!"

진짜 머리가 어떻게 됐나? 사고방식이 왜 정상적이지가 않아?

어쩐지 얼굴은 예쁜데 친구 없더라.

하지만 따지고 들 틈이 없다.

청명을 노리고 들어오는 유이설의 검이 점점 날카로워진다. 뭐 여유롭게 상대해 줄 정도는 되겠지.

어……. 공격만 할 수 있다면 말이다.

검 한번 잘못 휘둘렀다가는 사고 두드려 팬 패륜아가 된다. 그러니 다치지 않게 막기만 하면서 제압해야 한단 건데.

쇄애애애액!

"살초 쓰지 말라고, 이 여자야!"

"사고야!"

"어느 사고가 사질한테 살초를 쓰냐! 진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아이고, 선인들이시여. 화산이 여기까지 왔습니다!

속으로 한탄하던 청명의 미간이 일순간 슬쩍 찌푸려졌다.

마음껏 살초를 뿌려 가며 공격을 할 수 있어서인지, 유이설이 점점 검에 취하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 예로 눈이 조금씩 몽롱해지고 검이 정해진 검로를 이탈한다.

'호?'

대련 도중에 깨달음에 든다?

'조걸은 가져다 대지도 못하겠네.'

검에 대한 재능으로 따지자면 화산제일일지도 모른다.

'아니지.'

청명이 목검을 슬쩍 뻗어 엉뚱한 검로로 가려는 검을 슬쩍 밀어 제 검로로 올려놓는다.

무아지경에 들어 자신의 검로를 찾아가는 단계. 평범한 이들이라면 감히 개입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물러나기 급급했을 것이다. 어설프게 잘못 건드렸다가는 깨달음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릴 수도 있고, 까딱했다가는 주화입마에 드는 최악의 경우가 벌어질 수도 있다.

청명쯤 되니까 이 모든 검로를 예상하고 파악해, 올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이다.

'거기 아니고. 그렇지, 여기. 아니, 아니. 여기라니까.'

톡. 톡. 톡.

청명이 검을 뻗어 유이설의 검을 톡톡 건드려 올바른 검로로 이끈다. 순간순간 살초가 날아오는 상황에서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청명…….

"지금 뭐 하는 짓거리냐! 이노오오오옴!"

느닷없는 개입에 청명이 고개를 획 돌렸다.

분노로 이성을 잃은 듯한 백천이 그를 향해 미친 듯한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아……. 네가 거기서 왜 나와 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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