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누가 비무래? 넌 이제 뒈졌다. (2)
"어떠하더냐?"
"……의외로 별다른 반응이 없습니다."
"그래?"
백상이 살짝 백천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예. 무척 열받아하는 기색은 역력한데, 반항하지 않습니다. 문제가 될 만한 말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흠, 그래?"
백천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
'이건 예상과 조금 다른데.'
한창 혈기 넘치는 나이가 아닌가? 조금만 긁어 줘도 바로 발끈할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게 백천이 최종적으로 노리는 상황이었다.
화산은 명문정파다.
그 명문정파에서 가장 죄악시 여겨지는 것이 딱 두 가지다. 하나는 마도(魔道)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하극상이다.
이 두 가지는 어떤 상황에서도 용납하지 않는다. 전자는 정도를 표방하는 화산의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고, 후자는 화산의 역사와 체계를 뒤엎는 일이기 때문이다.
살살 긁어서 삼대제자들을 발끈하게 한 뒤, 적당히 하극상으로 엮어서 다시는 반항할 엄두도 내지 못하게 만들어 버릴 생각이었다만……. 의외로 삼대제자들은 이대제자들의 압박을 잘 참아 내고 있다.
"압박의 강도가 약한 게 아닌가?"
"이 이상은 무리입니다. 더 했다가는 시시비비를 가리는 과정에서 저희 쪽으로도 문제가 불거질 수 있습니다."
"흐음."
백천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낮은 침음을 흘렸다.
'아무 생각 없는 다혈질은 아니라는 말이지?'
식당에서 본 청명을 생각하면 벌써 못 참고 달려들었을 것 같은데, 본인이 자중하는 건 물론이고 다른 삼대제자들도 단속하고 있다라…….
'아니면 윤종이 하는 일인가?'
이유가 어느 쪽이든 백천의 생각대로 풀리지 않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다른 삼대제자들은?"
"한눈에 보기에도 이상한 수련을 하고 있다는 것 말고는 딱히……."
백천이 가만히 손가락으로 자신의 볼을 톡톡 건드렸다.
"그렇단 말이지."
"사형. 시간을 계속 끄는 건 무리입니다. 언제 사숙들이 언짢은 기색을 보일지 모르고, 화종지회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 슬슬 저희도 화종지회를 대비해야 합니다."
"알고 있다."
백천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히 끓여 놨으니 이제는 죽을 퍼 담아야 할 시간이지."
"하면?"
백상의 물음에 백천은 슬쩍 웃으며 운을 뗐다.
"너도 알다시피 청자 배들도 원래는 다들 착한 아이들이다."
"그건 그렇습니다. 저희가 폐관을 떠나기 전에는 다들 순진한 아이들이었지요. 불과 일 년 사이에 저리 변할 줄은……."
"그게 다 질 나쁜 놈과 얽혔기 때문이다. 사실 청자 배 아이들에게 모두 벌줄 필요가 있겠느냐? 문제는 청명 그 아이 하나지."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백상은 백천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삼대제자와 그들을 대표하는 윤종은 다루기가 어려운 아이들이 아니다. 개중 조금 튀는 조걸이 있기는 하지만, 조걸은 굳이 백천이 나서지 않아도 백상의 선에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아이였다.
문제는 그 청명이다.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 하지 않던가.
멀쩡하던 삼대제자들이 그 청명과 어울리더니 다들 이상해졌다.
적어도 그들이 봐 왔던 삼대제자들은 윗사람을 공경할 줄 알았고, 동기의 말보다 사숙들의 말이 중요하다는 건 아는 아이들이었다.
삼대제자들을 저리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청명이다.
그 말인즉슨 청명의 콧대만 꺾어 놓을 수 있다면 다른 삼대제자들은 자연히 과거처럼 고분고분해질 거라는 뜻이었다.
"하면 어쩌실 생각입니까?"
"사제."
"예, 사형."
백천이 빙그레 웃었다.
"별다른 방법이 필요하겠는가? 우리가 지금 하는 일은 그저 화산의 법도를 지키는 일 아닌가?"
"물론입니다. 사형."
"사사로운 감정이 끼어들 여지가 없네. 청명 역시 나의 소중한 사질이 아닌가? 조금 건방지긴 하지만 잘 다독인다면 좋은 재목이 될 걸세. 그러니 아직 어릴 때 엇나간 걸 바로 잡을 뿐이지."
백천이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다만 방법이 문제인데, 될 수 있다면 거친 방법은 쓰고 싶지 않았지만, 시간이 충분치 않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아이를 훈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대화지만, 때로는 매도 필요한 법 아니겠는가?"
백상이 기껍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는 저들도 사형의 깊은 뜻을 알게 될 겁니다."
"그리되겠지. 지금은 조금 아프더라도 말일세."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마주 웃었다.
* * *
끼이이익.
백매관의 문이 살짝 열린다.
빼꼼.
그리고 이내 작은 머리 하나가 밖으로 나온다. 고개만 살짝 내밀어 주변을 이리저리 살핀 이가 살짝 인상을 찌푸린다.
'없지?'
어둠을 틈타 스며드는 밤손님처럼, 청명은 기감을 바짝 세워 주변을 살폈다.
걸리는 것도, 인적도 없다.
청명은 낮게 한숨을 쉬고는 밖으로 나왔다.
"끄으응."
이게 뭐 하는 짓거린가.
터덜터덜 걸어 백매관 밖으로 나온 그는 영혼이 빠져나가 버린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장문사형. 보고 계십니까?"
장문사형이 세상에서 가장 아끼고 어여삐 여기던…….
- 뭐?
아, 여기부터 짜증 내지 말고 일단 마저 듣고 화를 내든가 하십쇼! 거 사람이 인내심이 있어야지! 화산 장문인이라는 양반이!
청명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아무튼 간에 내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애를 피해서 이러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억울함을 가득 담아 말을 해 보았지만, 안타깝게도 청문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뿐이요, 어디? 어린 여자는 뭐 빼먹을 거 없나 사람을 달달 볶아 대고, 어디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놈은 어디서 듣도 보도 못 한 규범을 들고 와서는 사람을 닦달해 대고. 아오, 내가 앓느니 죽지!"
성질 같아서는 진짜 그냥 다 뒤집어엎어 버리고 싶다. 어린놈들이 이 난리를 치는데 대체 네놈은 뭘 했냐고 장문인을 데려다 볼기를 치고 싶은 기분이다.
청명이 화산을 이끌고 천하를 질주할 때는 태어나지도 않았던 것들이 사숙이랍시고 거들먹거리는 꼴을 보고 있자니 거의 해탈할 지경이다.
지금이라면 소림으로 바로 달려가도 불법을 깨달은 귀인이 왔다며 곧장 제자로 받아 줄 거다. 진짜로.
"하!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죄를…… 짓긴 많이 지었지."
솔직히 이건 양심에 찔려서 안 되겠다. 그가 화산의 이대제자, 일대제자였던 시절에 저질렀던 일들 때문에 장문사형이나 장문인들이 속을 얼마나 끓였던가를 생각하면 빈말로라도 지금 힘들다 소리를 할 수가 없다.
"내가 왜 그랬을까."
청명의 두 눈에 습기가 차올랐다.
적당히 할걸.
전생이 업보가 모조리 되돌아오는 느낌이다. 사람 같지도 않은 어린 것들을 어르고 달래서 어떻게든 이끌어 가는 느낌이라니.
아, 이래서 장문사형이 전생에 혼인을 안 했구나. 나 같은 자식 낳을까 봐.
미안해요. 장문사형.
나는 사형이 얼굴이 안돼서 혼인 못 하는 줄…….
한숨을 푹푹 내쉬며 청명이 터덜터덜 걸어 산문을 벗어났다. 예전의 화산이었다면 이 시간에도 문을 지키는 위사가 있었겠지만, 지금의 화산은 방문자가 없는 시간에는 딱히 번을 서지 않고 있었다.
이유야 단순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화산은 거지도 가진 동전을 던져 주고 돌아설 곳이었으니, 딱히 위사가 필요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화산을 사람 살 만한 곳으로 만든 이가 청명이다.
그런데 이 배은망덕한 놈들이! 늙은이가 개고생을 해서 먹고살 만하게 만들어 줬더니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성질 같아서는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 패 버리고 싶지만…….
"끄응. 이것도 못 할 짓이지."
이상한 일이지만, 요즘 자꾸 윤종의 얼굴에 장문사형의 얼굴이 겹쳐 보인다. 산적같이 우락부락한 장문사형의 얼굴과 비교를 한다는 건 윤종에게 굉장히 실례되는 일이겠지만, 얼굴이 아니라 표정이 닮아 가고 있다.
청명이 무슨 일을 벌일 때마다 속이 썩어 문드러진다는 표정을 짓는 윤종을 보면…….
'이상하게 죄책감이 든단 말이야.'
마치 장문사형이 살아 돌아와 끙끙대는 것 같아서 무시하기가 힘이 든다.
"쩝."
입맛을 다신 청명이 고개를 내저었다.
"화종지회인지 뭔지 그거 끝날 때까지만 내가 참는다."
종남 놈들을 뒤집어엎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야 청명도 같으니까. 아무리 저 백자 배 놈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는 하나 종남과 비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백자 배는 엉덩이를 걷어차 주고 싶은 놈들이지만, 종남 놈들은 목을 졸라 버리고 싶은 놈들이니까.
윤종의 말대로 일단은 화종지회가 지날 때까지는 참는 게 맞다.
그게 맞는데…….
"끄응. 이러다 내 성질 못 이겨서 사고 치지."
화종지회가 끝날 때까지는 최대한 백자 배들과 마주치지 않는 게 상책이다.
청명은 평소와 다른 길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제 연화봉엔 절대로 안 가.'
사람이 두 번은 당할 수 있지만, 세 번은 당하면 안 된다. 같은 걸 세 번 당하면 그게 어디 사람인가?
청명이 고개를 돌려 낙안봉(落雁峰)을 바라보았다.
"아이고. 내 팔자야. 이제는 수련도 내 마음대로 못 하네."
앓느니 죽지 앓느니 죽어.
지금 이 순간에도 다른 문파들에서는 백 년 가까이 수련을 한 노괴(老怪)들이 쉴 새 없이 강해지고 있으리라.
그 간격을 좁히기 위해서는 청명도 쉴 시간이 없다. 같은 배분들 사이에서 강하다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
화산이 다시 구파일방으로 우뚝 서기 위해서는…… 아니, 그걸 넘어 과거의 영화를 재현하고 더 나아가 천하제일 검문으로 이름을 떨치기 위해서는 그 노괴들을 제압할 고수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그리고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화산에서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청명밖에 없다.
하긴, 또 모르지.
한 오십 년? 백 년?
그쯤 뒤에 천하제일검문을 노린다면 조걸이나 윤종을 키워 어떻게 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비록 싸가지는 없을지언정 백천도 재능이야 있으니, 엇나간 기초를 어떻게 잘 다스리면 가능성이야 보이겠지.
하지만 문제는 청명이 그 기간을 느긋하게 기다릴 수 있을 만큼 성격이 좋지 못하다는 점에 있었다.
"오십 년은 얼어 죽을."
그 전에 내가 속이 터져 죽지.
터덜터덜 낙안봉에 오른 청명이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더니 슬쩍 주변을 둘러본다.
'없지?'
그 사고인지 나발인지는 그날 이후로 찰거머리처럼 청명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나마 다른 청자 배들과 같이 움직일 때는 자제하는 듯하지만, 청명이 혼자 떨어졌다 싶으면 어떻게든 나타나 잠깐만 이야기를 나누자고 사람을 귀찮게 해 댔다.
기척이라도 잘 느껴지면 미리미리 피해 버리면 그만이지만, 이상하게도 유이설의 기척은 천하의 청명의 감각으로도 포착하기가 쉽지 않았다.
'귀신도 아니고.'
때때로 기감이 약해 존재감이 흐릿한 사람이 없는 건 아니지만, 유이설은 청명도 놀랄 정도로 기감이 흐릿하다.
더구나 눈이나 귀가 아닌 기로써 사람을 느끼는 데 익숙해져 있는 청명은 특히나…….
"청명."
"으아아아악!"
그러니까. 이렇게.
자리에서 거의 뛰어올라 버린 청명이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의 눈에 어정쩡하게 그를 향해 손을 뻗고 있는 유이설의 모습이 들어온다.
"아니! 진짜! 기척 좀 하고 나타나라고!"
청명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유이설이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