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누가 비무래? 넌 이제 뒈졌다. (1)
"본산에서 걸어 다닐 때 무릎 펴고 걸으라더라."
"나한테는 물 먹으러 갈 때도 허락 맡고 가라던데."
"아, 씨바. 진짜 쪼잔하고 더러워서."
이대제자들은 정말이지 갖은 방법으로 그들을 괴롭혔다.
수련할 때마다 사소한 것들까지 일일이 지적을 해 대는 것은 물론이고, 일상생활에서도 온갖 트집을 잡아 댄다.
오늘은 하다못해 백매관의 외관이 더러우니 먼지 한 톨 없도록 청소해 두라는 지시까지 떨어졌다.
"차라리 패든가!"
조걸이 이를 뿌득뿌득 갈아붙였다.
주먹으로 괴롭히는 데에는 익숙하지만, 이런 식의 괴롭힘에는 도무지 적응할 수 없었다.
"나는 사숙들이 그런 사람들인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존경했는데!"
"이게 무슨 동네 왈패도 아니고, 이래도 되는 거야?"
윤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안 될 건 없지.'
이대제자들이 그들을 괴롭히기 위해 이런 일을 벌인다는 데엔 의심의 여지조차 없다. 말끝에 묻어 있는 악의와 비웃음이 너무 생생하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들의 행위가 잘못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애초에 이대제자들이 요구하는 것은 전부 화산의 규범으로 정해져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그게 왜 문제냐고?
'그 규범이 적어도 이백 년 전에 정해진 것들이니까.'
본디 낡은 규범들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고쳐지는 법이다.
하지만 화산의 규범은 그러지 못했다.
따라서 지금까진 그 괴리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시대에 맞지 않는 규범을 암묵적인 합의 하에 무시하는 쪽을 택해 왔다.
그런데 이대제자들이 이 규범을 들고 나와 삼대제자들을 단속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 떠나서 이 고릿적 규범이라는 것들이 하나같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게 제일 큰 문제였다.
"아니, 화산의 제자들은 손에서 검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어떻게 씻을 때나 볼일 볼 때도 검을 들고 있어야 한다는 소리냐고!"
"……밥 먹을 때도 손에 들고 먹으라던데."
"잘 때도 잡고 자라잖아!"
"그게 전부면 말도 안 하지. 화산의 제자들은 언제나 선인들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는 것이 어떻게 화산의 역사를 모조리 외워야 한다는 의미가 되냐고!"
"……지들도 모르면서."
"내 말이!"
삼대제자들이 으득으득 이를 갈았다.
너나없이 이 기묘한 문파 부조리(?) 앞에 신경이 갈려 나가고 있었다. 이대제자들이 슬그머니 다가와 슬쩍슬쩍 훑어볼 때마다 수명이 줄어드는 느낌이었다.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심심하면 집합이지. 한 명이 잘못했다고 다 불러서 욕을 해 대지를 않나."
"대명천지에 이게 무슨 짓거리냐고!"
"대사형! 어떻게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윤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뭘 어떻게 하자는 거냐?"
"이건 좀 심하잖습니까! 솔직히 대놓고 괴롭히겠다는 게 눈에 뻔히 보이는데, 당해 주는 것도 정도껏이죠."
"맞습니다! 다른 건 다 참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수련을 방해하는 것만큼은 더 못 참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여기가 무파인데 수련은 방해하지 말아야죠!"
삼대제자들이 눈에 핏발을 세웠다.
사실 그동안 삼대제자들과 이대제자들은 딱히 부딪칠 만한 일이 없었다. 이대제자들은 제 수련만 하기에도 바빴고, 삼대제자들을 가르치는 것은 백매관의 역할이다 보니 서로 소 닭 보듯 지내 왔다.
그래도 삼대제자들은 나름 이대제자들에게 어떤 동경 비슷한 것을 느껴왔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이들이 저리 치졸하게 나오니 그 배신감이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윤종이 슬쩍 고개를 돌려 이 모든 일의 원흉을 바라보았다.
심드렁하게 의자에 기대 있는 청명의 눈치를 보던 윤종이 조심스레 입을 연다.
"청명아."
"응?"
"……어떻게 좀 해 봐야 하지 않겠니?"
"뭘?"
"사숙들 말이다, 사숙들."
윤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들 대놓고 말은 하지 않을 뿐, 이 일이 왜 벌어지고 있는지 모를 사람들은 없다.
지금 이대제자들은 삼대제자들, 그중에서도 특히 청명이 그들에게 고개를 굽히고 들어오길 원하는 것이다.
'너무 졸렬한 방식이긴 하지만.'
윤종은 나름 그들의 입장을 이해했다.
사실 이건 백자 배가 잘못되었다기보다는 청명이 잘못된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청명의 행동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에 문제가 있다.
윤종이 백자 배라고 해도 아래 배분에 청명 같은 망둥이가 있는 건 참아 내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까지 일대제자나 장로들과의 관계에는 별문제가 없었다. 청명이 그들을 대할 때는 절대 선을 넘지 않기 때문이다. 내심이야 어떻든 겉으로는 사문의 어른으로 존중하는 것이 확실히 보인다.
하지만 백자 배에겐 다르다.
윤종은 이미 청명이 백자 배를 대하는 것을 보지 않았던가?
"……저쪽에서 원하는 건 뻔하지 않으냐?"
"뻔해?"
윤종이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네 성격을 익히 아니 굽히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그냥 살짝 비위만 맞춰 주면 내가 어떻게든 해결을 해 볼……."
"비위이이?"
청명의 목소리에 윤종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
아차, 단어를 잘못 선택했…….
하지만 윤종의 예상과는 달리 청명은 발작하지 않았다. 오히려 초롱초롱하기 짝이 없는 눈으로 윤종을 바라보며 더없이 쾌활하게 말했을 뿐이다.
"사형, 사형!"
"으응?"
"내가 그거 말고 더 좋은 해결책을 알 것 같아! 이거면 진짜 다 해결할 수 있어!"
신이 나서 활짝 웃는 청명의 얼굴을 보니 들어 보기도 전에 덜컥 불안해지지만, 대사형으로서 묻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무슨 방법인데?"
"뭐긴, 뭐야. 저 사숙 놈들을 다 처 패 버리는 거지!"
청명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화들짝 놀란 윤종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잡아! 저거 잡아! 못 잡으면 우리 다 죽는 거야! 잡아아아!"
윤종처럼 불안함을 느꼈던 건지, 미리 대비하고 있던 사형제들이 일제히 몸을 날렸다. 그들이 청명의 팔다리를 잡고 늘어진 동안 조걸이 힘껏 뛰어올라 청명의 몸을 바닥으로 짓눌렀다.
"으아아아아!"
"놓지 마! 절대 놓지 마!"
"놔! 이거 안 놔?"
개떼처럼 달라붙은 삼대제자들이 필사적으로 청명을 잡고 늘어졌다. 그들의 필사적인 눈빛에선 '절대 이 미친개를 백매관 밖에 풀어놓지 않겠다'는 결사의 의지가 묻어났다.
"청명아! 진정해라, 청명아!"
"우리 다 박살난다!"
"하극상도 정도가 있지! 사숙 패면 진짜 파문당한다니까!"
청명의 두 눈이 희번덕거렸다.
"알았어, 안 팰게! 안 팬다고! 그냥 죽빵 한 대만 갈길게! 내가 딱 한 대만 친다니까!"
"그게 패는 거지, 이 미친놈아! 야야! 거기 똑바로 잡아!"
"아니, 뭔 놈의 힘이 이렇게 세!"
"끄으으응!"
청명이 꿈틀대며 이를 갈았다.
"저 또라이 같은 놈들이 백 년 전에도 안 하던 짓을 하네! 내가 승질이 뻗쳐서 그냥!"
도가는 기본적으로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곳이다. 다시 말하자면 사회가 만들어 낸 규범과 계급에 얽매이지 않는 곳이 도가다.
과거 공자가 노자에게 인사를 드리러 왔을 때, 노자가 그런 짓 좀 하지 말라고 학을 뗐다는 일화야 워낙에 유명하지 않은가?
그런데 도가의 제자라는 놈들이 유가에서도 하지 않을 꼰대 짓을 하고 있었다.
"진정해라, 청명아! 사숙들 패면 진짜 큰일 난다."
"지금까지 세운 공이 다 날아갈 수도 있어!"
"가만히 좀 있으라고! 가만히 좀!"
"놔! 안 놔? 확 마!"
삼대제자들은 숫제 거대한 인간 탑을 쌓아 청명을 내리눌렀다. 하지만 청명이 한번 꿈틀할 때마다 거대한 탑이 휘청거렸다.
윤종이 그 광경을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아니, 이게 말이나 되는 상황인가?'
백천은 이대제자 중 가장 강하다.
청명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화산제일기재의 자리는 당연하게 백천의 차지였고, 모두가 언젠가는 그가 화산제일고수가 될 거라는 사실에 한 치의 의심도 품지 않았다.
조걸 역시 재능은 남부럽지 않지만, 결국 무학이란 시간을 들여 쌓아 나가는 것. 이미 조걸보다 십여 년 일찍 검을 익힌 백천을 조걸이 따라잡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설사 가능하더라도 수십 년 뒤의 이야기겠지.
배분이란 그런 것이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다고 해도 쌓아 올린 시간이 다르고, 배우는 무학이 다르다. 그렇기에 쉽사리 넘을 수 없는 것이 배분의 차이였다.
하지만 지금 윤종의 눈앞에 펼쳐진 상황이 대체 무엇인가.
화산에 가장 마지막으로 들어온 청자 배의 막내가 백자 배 대사형을 패 버리겠다는 허무맹랑한 말을 지껄이고 있다.
'진짜 문제는 여기 있는 그 누구도 그게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지.'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잘 모르겠다.
아무리 청명이 강하다고 해도 백천과 승부가 될 것 같지는 않다. 청명이 걸음마를 떼기 전부터 무학을 익혔다고 해도, 백천은 그 이상의 기간 동안 검을 잡아 왔을 테니까.
더구나 백천은 재능이 부족한 사람도 아니다.
웬만한 재능의 차이로는 세월의 차이를 뛰어 넘는 게 불가능하다. 그게 가능한 이를 천재라고 부르지만 제아무리 대단한 천재라고 해도 십여 년의 차이를 뛰어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이성적으로, 정말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청명이 백천을 이기는 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이상하게 막상 붙으면 백천 사숙이 얻어맞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게 문제지.'
애초에 눈앞의 이 인간에겐 상식이나 이성 따위가 통용되지 않으니까. 이놈이 지금까지 벌인 일 중에 상식적인 일이 뭐가 있던가?
"청명아."
윤종이 깊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네 기분은 알겠지만, 지금은 절대로 안 된다."
"왜?"
"화종지회가 얼마 남지 않았잖아."
"그게 왜?"
"……백천 사형은 화종지회에서 이대제자의 대표가 되어야 할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너한테 맞아서 화종지회에 출전하지 못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할 셈이냐?"
"에이. 내가 설마 그렇게 패려고. 아프게, 하지만 안 다치게 패는 게 내 특기잖아. 몰라?"
"알지."
아주 잘 알지. 수도 없이 맞아 봤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안 된다. 백천 사형이 사질에게 얻어맞아 봐라. 자신감이 남아나겠냐?"
"……."
"우리가 조금만 더 참자. 우리가 백천 사형에게 당하는 게 종남 놈들에게 무시당하는 것보다는 낫잖아."
청명이 오만상을 찌푸린다.
"그냥 속 시원하게 날려 버리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이번 한 번만 내 얼굴을 봐서라도 넘어가다오. 화종지회는 그만큼 큰일이다. 부탁한다."
"흐으음."
청명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조금 날이 무뎌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비켜."
사형제들이 윤종의 눈치를 본다. 윤종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슬그머니 청명을 놓고 슬금슬금 옆으로 물러났다. 그러면서도 청명이 튀어나가면 언제든지 다시 잡을 수 있게끔 거리를 유지했다.
"그럼 딱 화종지회가 끝날 때까지만 참으면 된다 이거지?"
"……꼭 그때까지만 참아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뭐가 이렇게 흐리멍덩해! 확실하게!"
윤종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일단 급한 불부터 끄는 심정으로 말했다.
"그래! 화종지회까지만이다!"
"알았어."
청명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도 대사형이 그동안 고생한 게 있는데, 내가 그 정도는 들어줘야지."
"……눈물 나게 고맙다."
"왜 울어?"
"아니. 아니다."
이건 눈물이 아니다. 마음의 땀이다, 이 새끼야.
"그런데 저쪽에서 싸움 걸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그럴 일이 있겠냐?"
"혹시라도 걸면."
윤종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네가 알아서 해라. 나도 더는 모르니까."
"그래?"
청명이 입꼬리를 씨익 말아 올린다. 그 웃음을 본 윤종은 마음이 한없이 불안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