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구르는 사람에겐 이끼가 끼지 않아! (5)
"들거라."
"예. 장문인."
운검이 손을 뻗어 찻잔을 잡았다.
매화 꽃잎을 말려 만든 매화차는 현종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것 중 하나다. 그 차를 내어 온다는 것은 오늘 할 말이 꽤 많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떻더냐?"
그의 질문에, 운검이 답하기 전에 운암을 흘끗 바라보았다. 누군가 들어도 괜찮겠냐는 뜻이다. 그러자 현종이 차를 들며 짧게 말했다.
"괜찮다."
"예, 그럼."
운검이 입을 연다.
"장문인께서 말씀하신 대로 개입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그랬더니?"
"문제가 좀 생기고 있습니다."
"으음."
현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현영 사숙께서 오지 않으셨다면 분위기가 더 급박해졌을 겁니다. 장문인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대제자들과 삼대제자들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흐릅니다."
"그렇겠지."
현종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그들의 선택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너무 마음이 급했어.'
운자 배와 백자 배의 간격은 너무 멀고, 백자 배와 청자 배의 간격은 너무 가깝다. 그러다 보니 백자 배의 막내인 유이설의 나이는 청자 배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윤종과 거의 차이가 없다.
보통 입문을 잠시간 막아 어느 정도 차이를 두는 것이 관례인 것을 감안한다면, 터질 문제가 터졌다고 봐야 한다.
'어쩔 수 없는 문제였지.'
삼대제자들을 받을 당시의 화산은 새로이 제자를 들일 여력이 없었다. 동시에 문파의 재정은 점점 곤궁해져만 갔다. 입문을 막아야 마땅한 상황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계속 제자를 받는 대신에 그들의 가문으로부터 후원을 받자는 말을 꺼냈다. 그게 문제의 시작이었다.
바스러진 지푸라기라도 어떻게든 이어 붙여서 부여잡아야 했던 화산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해서라도 당장 돈을 마련해야 하지 않았겠는가?
다 죽어 가도 명문이라고, 나름 제자들을 골라 받던 화산이었다. 하지만 그때만큼은 후원을 하는 집안의 자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제자로 들였다.
덕분에 청자 배는 무학의 재능이라는 측면에 있어서는 다소 처진다는 평가를 받았다.
"예전이라면 감히 청자 배 아이들이 백자 배를 어찌할 수 없었겠지. 하지만 지금의 청자 배는 예전과는 다르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구심점이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개개인의 삶에서는 딱히 의미가 없는 것이 집단과 집단 사이의 일에선 어마어마한 차이를 보이기 마련이다.
윤종과 조걸이라는 애매한 구심점을 바탕으로 할 때의 청자 배는 그저 화산의 삼대제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청명을 중심으로 뭉친 청자 배는 그저 그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스무 살 차이가 나는 이들은 서로를 경쟁 상대로 여기지 않지만, 열 살 차이가 나는 이들은 어떻게든 서로를 의식할 수밖에 없다.
"제가 부덕한 탓입니다."
운검이 고개를 숙이자 현종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이건 네 잘못이 아니다."
"장문인……."
"백매관을 만들자 주장한 건 나였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의 의견이지 않았느냐. 애초에 이 일은 백매관을 만들고, 이르게 삼대제자를 받을 때부터 예견이 되어 있던 일이다."
이는 단순히 운검을 위로하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었다.
백매관을 만들면서 화산은 많은 이득을 얻었다. 하지만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예전처럼 사제 관계로 전승이 이뤄지는 방식이었다면, 아무리 나이 차가 적다고 해도 감히 윗 배분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의 삼대제자들은 백자 배에게서 받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 배움은 운검에게서 얻고, 수련은 동기들과 한다. 자연히 윗 배분과는 거리가 벌어질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백매관이 가진 가장 큰 약점이었다.
운암이 슬쩍 눈치를 보고는 입을 열었다.
"장문인. 하면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현종이 가타부타 말없이 매화차를 음미했다. 은은한 매화 향을 맡고 있으니 마음이 조금 진정되는 느낌이다.
"어찌할 수 있겠느냐?"
"하나 이대로는……."
"사람이란 본디 그런 법이지. 우리가 짓누르고 억지로 이끈다고 해서 마음의 응어리가 사라지겠느냐? 때로는 그냥 부딪치게 놔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결국은 흘러가는 것 아니겠느냐?"
"장문인, 제자들의 일입니다."
"하려고 마음만 먹는다면야 강의 방향을 틀 수도 있겠지. 하지만 물줄기를 억지로 틀어 놓으면 처음에는 그럴싸해도 결국에는 문제가 생기는 법이다."
현종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운검아."
"예, 장문인."
"우리 아이들을 믿어 보자꾸나."
"……."
운검이 정말 복잡한 얼굴로 현종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의구심이 남은 게 역력히 드러난 표정이다.
그때, 현종이 운검의 생각과는 조금 다른 방향의 말을 꺼냈다.
"백천이 그리 과할 아이는 아니다."
"예?"
"그리 생각하지 않느냐?"
운검의 얼굴이 멍해졌다.
'아니, 장문인 그게 아니옵고!'
백천이 문제가 아닙니다. 장문인! 문제는 그 청명 놈이라고요!
운검은 그제야 장로들이 바라보는 청명과 자신이 바라보는 청명 사이에 커다란 간극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백매관주인 운검은 삼대제자를 휘어잡은 청명의 모습을 알고 있지만, 현종은 청명을 그저 화산에 복을 물어 오는 예쁜 강아지쯤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백천은 그래도 생각이 올바로 박혀 있는 아이가 아니더냐? 자존심이 상해 잠깐 화를 낸다고 해도 숙질간의 의까지 상하게 할 아이는 아니다. 적당히 봉합할 테니 너무 걱정 안 해도 된다."
네?
누가 누굴 봉합해요?
백천이 청명을 달래?
'난리 났구나.'
어쩐지 장문인께서 태평하더라니!
하지만 지금부터 설명을 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믿어 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운검도 청명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하다. 그가 청명을 보며 느끼는 위화감 등은 막연한 감각에 불과했다. 막상 설명하려고 들면 어떤 식으로 납득시켜야 할지 애매하지 않은가?
"……예. 알겠습니다, 장문인."
결국 운검은 그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운검아."
"예, 장문인."
"화종지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
화종지회라는 말이 나오기 무섭게 운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사실 있는 그대로 말하자면 지금 화산의 제자들은 과거처럼 종남에 악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 애초에 화산이 종남에게 가졌던 감정은 경쟁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본디 경쟁이란 비슷하거나 큰 차이가 없는 이들끼리 하는 것이 아니던가? 화산과 종남의 격이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나 버린 지금 굳이 종남에게 진심으로 경쟁의식을 불태우는 이들은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아무리 경쟁의식이 없다고 해도 자파의 제자들이 타파의 제자들에게 꼼짝없이 당하는 꼴을 누가 보고 싶어 하겠는가?
그나마 아이들이니 그 정도 차이가 나는 것뿐, 무학이 완숙에 접어든 일대제자나 장로급에서는 차이가 배는 더 벌어질 것이다.
"많은 문제를 해결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구나. 우리는 이제 겨우 시작점에 섰을 뿐이다. 찬란했던 화산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서는 네가 많은 것을 해 주어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장문인."
"그래. 둘 다 나가 보거라."
"예."
"예."
운검과 운암이 인사를 하고 물러나자 현종이 조용히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방 뒤쪽 창을 열자 이제는 눈이 거의 녹은 연화봉이 보인다.
부쩍 자란 매화나무에 작은 꽃봉오리들이 맺혀 있었다. 아마 화종지회가 시작될 쯤에는 온 산에 봄 매화가 만개할 것이다.
'매화……. 매화라.'
칠매검을 다시 되찾았다.
하지만 칠매검만으로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현종은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다.
'매화검법만 있었어도.'
현종이 눈을 질끈 감는다.
그러나 그는 없는 것을 바라본들 달라질 게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지금은 없는 것을 찾아 헤맬 때가 아니라, 있는 것을 탄탄히 다져야 할 시기다.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에서 아쉬움이 사라지지 않는다.
"선인들이시여. 화산을 굽어 살피소서."
그 선인이 이미 화산에 들어와 있다는 걸 알 리가 없는 현종이었다.
* * *
안타깝게도 현종은 두 가지 실수를 저질렀다.
물론 그중 하나는 청명을 너무 좋게 평가한 것이다.
하지만 이건 화산의 입장에서 본다면 딱히 문제가 될 게 없었다. 청명의 궁극적인 목표는 어찌되었든 화산을 키우는 것이다. 현종이 청명을 좋게 생각하면 할수록 청명의 활동 반경은 넓어지기 마련이니까.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현종이 청명을 좋게 봐 준 덕분에 화산은 더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다른 한 가지 잘못은 생각보다 치명적이었는데…….
그건 바로 현종의 생각처럼 백천이 그리 온화한 성격이 아니라는 점이다.
"뭐라도……."
"……."
"좀 먹어야 할 텐데."
"……."
화산의 삼대제자들이 넋이 나간 얼굴로 백매관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청명의 수련은 사람의 모든 것을 쥐어짜 낸다. 대체 어떻게 아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 귀신 같은 놈은 삼대제자들의 남아 있는 체력을 정확하게 확인하여 정말 마지막 남은 물 한 방울까지 짜내 버린다.
그렇기에 수련이 끝나면 다들 이렇게 햇볕에 바싹 마른 천 조각처럼 빳빳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의외로 삼대제자들은 연일 혹독하게 이어지는 수련에 별다른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물론 수련을 할 때마다 숨이 넘어가고 살짝 살짝 저승 문턱을 넘어갔다 오는 기분이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 아니던가?
그 끔찍했던 수련도 하루 이틀이 넘어 한 주쯤 반복되자 어떻게든 버텨 볼 만하게 됐다. 이제는 저승 문턱에 들어서도 저승사자와 정겹게 인사를 나누고 돌아올 정도로 발전한 것이다.
- 철은 두드릴수록 강해지고, 사람은 굴릴수록 강해진다! 구르는 사람에겐 이끼가 끼지 않아.
'사람은 원래 이끼가 안 껴. 이 미친놈아.'
더 끔찍한 건, 삼대제자들이 청명의 말을 온몸으로 훌륭히 증명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하루하루 본인들이 달라지는 게 체감이 된다.
육체에 걸맞은 방식이라는 말이 무엇인지도 이제는 이해하는 중이다.
다만.
청명의 수련만 이겨 내면 모든 것이 괜찮을 거라 믿었던 삼대제자들에게 새로운 날벼락이 떨어진 게 문제였다.
"뒈질 것 같다."
"저 씨……. 진짜 사숙만 아니면 확 그냥."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니냐?"
지금 그들을 괴롭히는 다름 아닌 백자 배. 그러니까 이대제자들이었다.
그날.
청명이 백천과 대립한 이후로 이대제자들은 교묘하게 삼대제자들을 다그치기 시작했다. 사사건건 온갖 트집을 잡는 게, 작정하고 괴롭히는 게 분명하다.
"대체 저 인간들 왜 저러는 거냐?"
"몰라서 묻냐?"
"끄으으응."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으로 돌아갔다. 그 시선 끝에 놓인 사람이야 뻔했다.
"응?"
사형제들의 시선을 받은 청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왜 날 봐?"
"……."
"……."
이 새끼는 양심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게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