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구르는 사람에겐 이끼가 끼지 않아! (4)
이야기가 끝나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다들 심각한 얼굴로 윤종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고민에 빠지기를 반복한다.
그 오랜 침묵을 깬 것은 역시나 백천이었다.
"그러니까 그 아이가……."
"예, 사숙."
"사문의 재보와 무학들을 발견하고."
"예."
"장부를 발견하여 화산의 빛을 청산한 데다, 사업장까지 압류했다는 말이더냐?"
"그렇습니다."
"게다가 심지어 은하상단 황 대인의 병을 치료했다?"
"예."
"그 대가로 은하상단이 화산의 재정을 봐주기로 했다……. 화산의 재정을."
윤종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고 보면 돌아오는 길에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었다. 화음에 활기가 넘치고, 못 보던 상인들이 자주 보였던 것이다.
오랫동안 화산을 떠나 있었기에 그새 화음의 경기가 좋아졌나 막연히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그게 아닌 모양이다.
"……그렇군."
백천은 뭔가 말을 하려 입을 열었다가 가만히 다시 닫았다.
"알겠다."
"예. 사숙, 그럼 저는 이만."
"그래."
윤종이 방에서 빠져나가자 백천이 심각한 표정으로 허공을 보았다. 다른 사제들 역시 얼이 빠진 얼굴이었다.
"아니, 이게 무슨……."
백상이 허탈하다는 듯이 입을 연다.
"그럼 그 어린 녀석이 혼자 화산의 골칫거리들을 다 해결해 버렸다는 말이 아닙니까?"
"……."
목소리에 경악이 묻어난다.
백천도 딱히 반박하지는 못했다.
화산의 가장 큰 문제는 무학도 아니고, 문도의 수가 적은 것도 아니었다. 화산이 그토록 급격히 몰락했던 것은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돈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
빚도 어마어마했다.
화산을 떠나 폐관에 들어가면서 백천이 가장 우려했던 일이, 다시 돌아왔을 때 화산이 망해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였으니 말 다한 것 아닌가.
그런데 그걸 청명이 말끔히 해결해 버렸다니.
"사문 어른들께서 녀석을 싸고도는 것도 이해가 가는군."
백천의 혼잣말에 백상이 허탈하게 웃었다.
"저는 현영 장로님께서 그 아이가 벌어 온 돈으로 고기를 처먹는다기에, 대단한 상가의 자제라서 화산에 많은 돈을 후원하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듣고 보니 그게 아니라……."
정말 말 그대로 그놈이 화산을 먹여 살린 것이다.
백천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건 답이 없다.'
입장을 바꿔 백천이 현영이었어도 청명을 업고 다니려 했을 것이다. 몇십 년 동안 도무지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던 화산의 재정 문제를 단 몇 달 만에 해결하다 못해 돈을 물처럼 벌어들이게 만들어 준 아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현영이 자식이 없어서 다행이지, 만약 자식과 청명이 싸움을 벌였다면 폭풍같이 자식 놈을 걷어차 날려 버렸을 것이다.
애야 또 낳으면 되지만 청명 같은 놈을 어디서 구한다는 말인가?
"……사형 이건……."
"으으음."
백천이 무겁게 침음을 흘렸다.
"그저 문제 하나만 해결했다면 '공을 세웠다'에서 끝날 문제다. 하지만 녀석은 은하상단과 얽혀 있다. 은하상단이 화산의 재정을 관리하고 화산이 그 덕에 돈을 벌어들이는 이상 매달 돈이 들어올 때마다 청명의 입지는 높아지겠지."
한동안은 말이다.
"……어느 순간은 당연한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야 그렇지. 하지만 그 순간이 빨리 오겠느냐? 너희도 알다시피 이건 지금……."
거지 굴에 황금이 떨어진 격인데.
보기만 해도 좋고, 만져만 봐도 좋을 것이다. 굳이 황금을 떼어 내 쓰지 않더라도, 황금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르지 않겠는가?
청명은 화산이라는 거지 굴에 황금을 던져 준 사람이다. 아무리 백천이라고 해도 그만한 업적을 세울 수는 없었다.
'장문인께서도 그 아이를 따로 보시더라니.'
백천이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폐관을 마치고 돌아오면 사문 어른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을 거라 생각했건만, 어디서 툭 튀어나온 녀석이 백천에게 와야 할 기대를 모두 가져가 버렸다.
이건 좌시할 수 없는 문제다.
"그게 뭐 그리 대단한 공이라고 그러십니까?"
지금까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백문(白問)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투로 말한다.
"화산의 재보를 발견한 건 그저 우연이고, 은하상단의 황 대인을 치료한 것 역시 그저 운이 좋았던 것 아닙니까?"
"사제."
"사형. 화산은 무파입니다. 무파가 돈을 벌어 온 아이를 우대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화산이 거꾸로 돌아가지 않고서야 어찌 그런 일을 벌인단 말입니까?"
백천이 넌지시 백문을 타일렀다.
"사제는 말을 조심하는 게 좋겠군. 그건 사숙들과 사숙조들을 힐난하는 말이네."
"……그런 의도는 아닙니다만."
"하지만 꼭 틀린 말은 아니지."
"예?"
백천이 담담히 고개를 끄덕인다.
"사제의 말이 맞아. 화산은 무파지. 아무리 돈을 벌어들인다고 해도 이곳이 상단이 아니라 무파인 이상 결국은 무학이 중요할 수밖에 없지."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사제들의 대답에 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근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걸세. 지금이야 사문 어른들이 녀석들에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지만, 곧 화종지회가 다가온다는 것을 실감하고 나시면 삼대제자들에게 신경을 쓰실 수 있을 리가 없지."
"예, 사형. 응당 그리될 것입니다."
"그러니 일단은 무학에만 전념하도록 하세. 청자 배 녀석들의 버릇을 고쳐 주는 건 그 다음에도 할 수 있으니까."
백상이 슬쩍 백천의 눈치를 본다.
"하나, 사형."
"왜 그러느냐?"
"화종지회에 나가는 것은 우리만이 아니잖습니까? 삼대제자들 역시 화종지회에 출전하게 됩니다."
"그걸 모르는 이가 있더냐?"
"저희만 열심히 해서 될 일은 아니라는 거지요. 삼대제자들이 망신을 당하는 것 역시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백천은 흥미롭다는 듯한 눈으로 백상을 바라본다.
"사제의 생각은 어떠한가?"
"저희만 생각한다면 수련에만 집중하는 것이 옳겠지만, 삼대제자들 역시 화산의 제자입니다. 어찌 저희 배분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조금은 부담이 되더라도 짧은 시간이나마 삼대제자들의 무학을 봐줄 수 있다면 화종지회에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백천이 빙그레 웃었다.
"역시 사제는 그 누구보다 화산을 생각하고 아끼는군."
"쑥스럽습니다, 사형."
"좋은 생각이야. 일 년 간 문파를 비우느라 아이들과 소원해지기도 했을 테니, 간만에 같이 땀을 흘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예, 사형. 좋은 방법입니다."
백천과 백상이 마주 웃었다.
결국 위엄이라는 것은 힘에서 나온다. 온화한 사람은 존경을 받지만, 존경은 존경일 뿐이다.
가족이라 한들 권위는 필요한 법. 이대로 둔다면 삼대제자들이 기어오를 날도 멀지 않았다.
그 전에 알려 줄 필요가 있다.
그들이 왜 어른인지. 그리고 왜 고개를 숙여야 하는지 말이다.
"그 청명이라는 아이가 무학에도 재능이 있으면 좋겠군. 그럼 우리 화산도 후대를 이끌어 갈 기재를 얻는 것 아니겠는가?"
"후대를 이끌어 갈 기재는 사형이시지요."
"나라고 언제까지 사제들의 손을 빌릴 수는 없지. 적당히 말 잘 듣는 똘똘한 아이라면 시킬 수 있는 일이 많아지겠지."
백천이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거 피죽도 못 먹은 것처럼 생겼던데, 그 아이가 무학에 재능이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백문의 차가운 목소리에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 더 가르치고 이끌어야 하지 않겠나? 녀석에게는 조금 벅찬 일이겠지만 말이야."
"과연, 이해했습니다."
세 사람이 서로 마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윗사람의 위엄을 제대로 보여 줄 필요가 있겠군.'
백천의 눈이 천천히 가라앉는다.
* * *
"자냐?"
"네."
"끄으으응. 나는 저 때문에 사숙들에게 끌려갔다 왔는데, 속편하게 드러누워 잔다는 말이지?"
윤종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내 위엄이…….'
이제 와 청명에게 막내로서 예의를 갖추라고 할 생각은 없다. 대사형으로서의 대접 같은 건 애저녁에 갖다 버렸다.
그럼에도 오늘따라 울컥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백천을 대하는 다른 백자 배들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옳게 된 문파란 그런 거지.'
대사형에게 깍듯한 존중을 보이는 그 모습을 보고 나니 제 처지가 왠지 너무 서글프고 눈물겹다.
'한때는 나도 그런 대접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저놈이 오고 나서는 다른 사제들도 건들건들하다. 한 놈만 그러면 이해를 하겠는데, 나쁜 건 빨리 배운다고 다들 하나같이…….
"뭔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사형?"
"……아니다."
이놈도 문제다, 이놈도!
예전에는 반항을 하는 와중에도 나름 존중이 있었는데, 이제는 숫제 동네 형 대하듯 굴지 않는가!
한숨을 푹 내쉰 윤종이 조걸을 바라보았다.
"걸아."
"예?"
"청명이 화산에 온 게 정말 좋은 일일까?"
"이상한 소리 하지 마시고, 이야기나 해 보십시오. 어찌 되었습니까?"
이상한 소리라니 이놈아. 그게 대사형에게 할 소리냐?
아이고, 내 팔자야…….
결국 다 놓아 버린 윤종이 침상에 드러누워 있는 청명을 슬쩍 돌아보고는 입을 열었다.
"저놈이 지금까지 뭘 했는지 말하라고 하시더라."
"그래서 있는 대로 불고 왔습니까?"
"……그걸 굳이 감춰서 뭐하게."
"하기야."
어차피 알게 될 일이다.
"반응은요?"
"몰라서 묻는 건 아니겠지?"
"……끄응."
윤종과 조걸이 한숨을 푹 쉬었다. 침상에 드러누워 배를 두드리고 있는 청명을 보자니 한숨을 도저히 안 쉴 도리가 없다.
'미친놈.'
'망둥이 같은 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백천은 사형도 아니고 사숙이다. 사숙과 첫 대면을 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깽판을 쳐 버리는 경우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백천은 삼대제자들에게 그리 엄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리 관계가 틀어져 버린 이상은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다.
"좋게는 안 나오시겠지."
"……저 같아도 그럴 겁니다."
청명을 처음 보고 호감을 품을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조걸도 윤종도 처음에는 청명을 어떻게든 한 대라도 패 보려고 하지 않았던가?
다행히 그들은 적당히 처맞는 수준에서 끝날 수 있었지만, 백천이 마음먹고 청명을 짓밟으려 든다면 상황이 생각보다 커질 수 있다.
"괜히 우리한테 눈먼 화살 떨어지겠네."
"그러게 말이다."
다시 한번 땅이 꺼져라 한숨을 토한 윤종이 단호한 눈으로 조걸을 보며 말한다.
"어쨌거나 사숙들이 돌아온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짐작했던 일이 아니냐?"
"그렇지요."
"애들 불러서 내일부터 행동거지 조심하라고 해라. 특별한 일이 없어도 꼬투리가 잡힐 판국에, 이런 일까지 벌어졌으니 절대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예, 알겠습니다."
대답한 뒤 몸을 돌려 나가려던 조걸이 문득 멈춰 섰다. 그러더니 슬쩍 윤종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사형."
"응?"
"궁금해서 그러는데……."
"뭘?"
"백천 사형이 청명하고 붙으면 진짜로 누가 이깁니까?"
"……뻘소리 하지 말고 시킨 일이나 해라."
"쳇."
윤종의 면박에 조걸이 삐죽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청명의 방에 남은 윤종은 여전히 꿈속을 헤매는 방 주인을 슬쩍 보았다.
'누가 이기냐고?'
그걸 몰라서 묻냐?
"……잘도 잔다. 사고뭉치 놈."
이제 화산의 평화는 끝났다. 앞으로는 한바탕 소란이 일 것이다.
세상모르고 잠든 청명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윤종이 피식 웃고는 방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