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구르는 사람에겐 이끼가 끼지 않아! (3)
"자, 장로님?"
어안이 벙벙한 백천을, 현영은 못마땅한 얼굴로 보았다.
'내가 뭔가 잘못 말했나?'
백천이 서둘러 사태를 수습하려 든다.
"삼대제자가 홀로 화음에 내려가 술을 먹는 건 중죄입니다. 아무리 장문인께서 저 아이에게 홀로 화음에 내려갈 수 있는 권한을 주셨다고 한들, 어디 그 권한이 술을 먹는 데 쓰일 권한이겠습니까? 마땅히 벌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현영의 고개가 살짝 삐딱해졌다.
'이번에는 제대로 이해하신 것 같군.'
그러면 당장 저놈을…….
"말귀를 못 알아먹는 놈이로구나."
"……예?"
현영이 노기를 숨기지 않고 말했다.
"화산의 규율을 네가 정하느냐?"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네가 말하는 화산의 규율 중에 산문을 벗어나 술을 먹으면 안 된다는 조항이 있더냐?"
"……."
백천은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아니, 그런 조항은 없지.
그도 그럴 게, 대체 어느 문파가 문규에 문도들은 산문 밖에서 술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글귀를 넣는다는 말인가?
그건 응당 암묵적으로 정해지는 부분이지!
"그리고."
현영이 백천을 똑바로 보았다.
"그럼 뭐 어때서."
"……장로님?"
"술 좀 먹으면 어때서?"
"……."
현영의 얼굴이 점점 달아오르는 것처럼 보이는 건 백천만의 착각인가?
그건 아니었다.
이윽고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현영이 백천에게 삿대질을 하며 일갈한다.
"제 처먹는 밥값도 못 벌어 오는 밥버러지 놈들이 이렇게 수두룩한데! 너희 먹여 살리는 놈이 제 돈으로 술 좀 사 먹기로서니! 어? 사숙이 되어 가지고 그걸 미주알고주알 꼰지르고, 어?"
예? 사, 사숙?
"사질이 벌어 온 돈으로 고기는 처먹는 놈들이! 그 사질이 한 푼 두 푼 모은 돈으로 술 좀 먹겠다는데! 그걸 못 참아서 쪼르르 달려와 고자질해? 이 처먹은 밥값도 못 하는 좀생이 같은 놈이!"
백천이 얼이 빠진 얼굴로 어버버거렸다.
삼대제자가 술 처먹는 걸 봤다고 일렀다가 욕을 먹는 상황도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더 이해하기 어려운 건 현영의 반응이었다.
평소 지나치리만큼 침착하고 차가워서, 북해빙궁에 입문해야 할 사람이 화산에 오는 바람에 제 재능을 십분 발휘하지 못한단 말까지 듣는 현영이 아니던가?
그런 현영이 눈을 까뒤집고 삿대질하는 모습을 보자 이게 현실인지 꿈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지경이다.
"네 사질은 그렇게라도 화음에 내려가서 돈을……. 아니! 공을 벌어 오는데 너는 사숙이 되어서 하는 게 뭐가 있느냐! 그냥 검이나 휘두르고 밥이나 축내는 것들이 뭐 잘났다고 지적질이야, 지적질이! 대가리를 깨 버릴까! 처먹지 마, 이것들아! 니들이 뭘 했다고 고기를 처먹……."
벌컥!
그 순간 누군가가 문을 과격하게 박차고 들어왔다.
"하하하하! 사제 여기에 있었군!"
매우 기묘하게 웃는 낯으로 뛰어 들어온 무각주 현상이 현영을 뒤에서 끌어안고 입을 틀어막는다.
"읍! 읍읍! 이거 놔 보십……. 읍!"
"하하하. 잠시 나가세. 잠시, 애들 없는 곳으로. 아, 가만히 좀 있게!"
타아아악!
문이 닫히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장내가 기이한 침묵으로 가득 찼다. 그 누구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찹찹찹찹.
그 기묘한 정적 속에 들리는 소리라고는 청명의 밥 처먹는 소리뿐이었다.
"대체……."
백천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모든 이대제자의 심정을 대변하는 한마디였다.
* * *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형?"
제게로 향한 질문에도, 백천은 그저 아무 말 없이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가 오래전부터 사용해 온 낡아 버린 찻잔. 폐관을 다녀오기 전까지는 나름 운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다시 보니 운치가 있다기보다는 궁상맞아 보인다.
하기야 원래 화산에서는 이게 기본이었지.
낡은 집기들과 낡은 건물. 그리고 낡은 사람.
그 낡아 빠진 문파의 유일한 희망이 이대제자들이었고, 그중에서도 가장 큰 희망이 바로 백천이었다.
하지만 일 년 만에 돌아온 사문은 상전벽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변해 버렸다.
"건물들이 쭉쭉 새로 지어지는 것도 이상하고, 십 년을 넘게 방치되던 곳들이 보수되는 것도 이상하고, 아니……. 뭐 그런 건 다 좋다 이 말입니다. 돈이 없다가 생기면 그동안 못 했던 것들을 하는 것이 당연하니까요. 하지만!"
백상(白商)이 울분을 참을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문파 어른들의 태도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오랜 폐관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장문인은 별달리 말씀도 없으시고……."
"장문인께서는 충분히 노고를 치하하시지 않으셨느냐?"
"그래도 무려 일 년 만에 왔는데……."
"공사다망하신 분이시다."
백상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장문인까지 나간 건 너무 과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납득이 된 것도 아니다.
"장문인은 그렇다 치고, 현영 장로님과 운검 사숙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 아닙니까?"
백천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어떤 말을 해도 이상해진다. 그렇다고 하면 상부에 불만이 있는 것으로 비춰질 것이고, 그렇지 않다고 하기엔 걸리는 게 너무 많다.
"못 느끼셨습니까? 윗분들이 그 아이를 싸고돌고 있단 말입니다."
"백상."
"예, 사형!"
"내가 그리 눈치가 없지는 않다."
"……."
면전에서 욕을 들어 처먹었는데 그걸 모르겠는가?
"사형. 그놈 좀 건방지지 않습니까?"
"음?"
"윗분들이 싸고돈다고 해도 사형이 그리 나오면 일단 고개부터 숙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놈은 그……."
백상이 뭔가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어 버렸다.
차라리 비웃기라도 했으면 노골적으로 욕을 퍼붓겠는데, 관심 없다는 듯 밥이나 처먹던 놈을 욕하려니 뭔가 찝찝한 느낌이다.
"후."
백천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리고 유 사매가 그 아이에게 저토록 관심을 보이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대체 유 사매가 왜……."
백상의 손에 들린 찻잔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그야 유 사매의 마음 아니겠는가?"
"저희와도 대화가 거의 없는 유 사매입니다. 저는 사매가 그렇게 적극적으로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건 난생처음 보았습니다. 저희가 유 사매와 하루 이틀 같이 지낸 사이도 아니잖습니까?"
"……."
"저야 그렇다 치고, 적어도 사형에게는……."
"백상."
"……예, 사형."
"너무 화를 돋우지 말거라."
백상이 고개를 다시 푹 숙였다. 그리고 슬쩍슬쩍 백천의 눈치를 살폈다.
표정을 관리하려 애써 보았지만 백천의 얼굴에는 불편한 심경이 어쩔 수 없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자꾸만 눈살이 찌푸려졌다.
'내가 그 어린놈에게.'
심지어 사제도 아니고 사질이 아닌가?
화산 같은 문파에서 한 배분의 차이는 말 그대로 하늘과 땅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어떤 일이 있어도 운자 배에게 항명할 수 없듯, 청명 역시 당연히 그래야 할 텐데.
'건방진 놈.'
백천이 살짝 입술을 깨문다.
그때, 움츠리고 있던 백상이 슬그머니 말을 잇는다.
"억울해서 그럽니다, 억울해서. 그 힘든 수련을 마치고 왔는데 존장들께선 알아주시지도 않고, 어디서 나타난 밤톨 같은 놈이 사문 어른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귀여움을 받을 시기는 지났지."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 알고 계시잖습니까?"
알지. 너무 잘 알지.
백천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
'미묘하게 주도권까지 넘어간 느낌이라는 말이지.'
자리를 오래 비워서인가?
예전이었다면 돌아오자마자 화종지회와 수련에 대한 일로 백천을 찾았을 사문 어른들이 그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대신 이 사람이고 저 사람이고 청명을 찾아 댄다.
백천은 그게 못마땅했다.
청명이 대체 무슨 일을 해서 저토록 사문 어른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은근한 비호까지 받는지는 모르겠지만, 화산은 그의 문파다.
화산 모든 이들의 기대를 받는 건 백천이어야 하고, 이후 문파에 찬란한 광명을 다시 찾아올 이 역시 그여야 한다.
"사형 그놈을 이대로 두실 겁니까?"
"두지 않으면?"
"……그래도 따끔하게 혼을 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대로 두면 화산이 거꾸로 돌아갈 겁니다. 지엄한 법도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라도 사형께서 나서 주셔야지요."
백천이 쓴웃음을 지었다.
어린놈이 나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으니 한번 늘씬하게 패 달라는 말이다.
"일단은 좀 침착하거라."
"사형!"
백상이 목소리를 높이자 백천이 미간을 좁혔다. 그 표정을 본 백상이 아차 하고 슬며시 눈을 내리깔았다.
그 반응을 보고서야 백천은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나 역시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다."
"한데 왜……."
"우선은 알아야지."
"예?"
백천이 고개를 내저으며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일에는 선후가 있는 법이다. 대체 어떤 이유로 사숙들께서 그 아이를 그리 감싸고도는지 알아야 할 것 아니겠느냐?"
"아, 그렇지요. 그래야지요."
"오는구나."
"예?"
백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너라."
끼이익.
문 소리와 함께 들어온 이가 포권을 해 보였다.
"제자 윤종이 사숙들을 뵙습니다."
"어서 오너라."
백천이 앞쪽을 가리킨다.
"앉아라."
"예, 사숙."
윤종은 조심스레 의자에 앉았다. 감히 제가 이곳에 앉아 되겠냐는 말을 온몸으로 전한다. 그야말로 예의 바른 태도였다.
백천은 윤종의 그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사질은 이래야 하는 법이지.'
그 건방진 망둥이 놈처럼 구는 게 아니라.
살짝 기분이 풀린 백천이 나름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윤종아."
"예, 사숙."
"내가 없는 동안 네가 대제자로서 사문 어른들을 모시느라 고생이 많았다."
"화산의 제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그래, 그렇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 한데……."
백천의 말이 잠깐 멎자 윤종이 슬쩍 고개를 들어 그의 안색을 살핀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은 역시 예상한 대로였다.
"지금 화산에는 당연하지 않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구나."
"……청명 말씀이십니까?"
백천은 가타부타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윤종이 그의 의중을 짐작하지 못할 리가 없다.
"사형으로서 사제를 제대로 이끌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노하셨다면 저를 벌해 주십시오, 사숙."
"아니다. 네가 감당할 일이 아니더구나. 그래서 하는 말인데."
"예, 사숙."
백천이 입가에 미묘한 미소를 머금는다.
"내가 없는 동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네 입으로 말해 보거라. 내 그걸 듣고 앞으로의 방향을 정하겠다."
윤종이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숙께 설명을 드리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만, 뭔가 청명을 배신하는 느낌이구나.'
이곳에 오기 전 윤종은 이미 청명에게 물었었다. 사숙께 가 지금까지의 일을 고해도 되겠느냐고. 그에 대한 청명의 대답은 아주 간단했다.
- 가.
"……."
거 이래라 저래라 말 좀 해 주면 차라리 편할 것을.
윤종이 슬쩍 백천을 한번 바라보고는 결심을 굳혔다.
"일단은 청명이 처음 화산에 들어왔을 때부터 이야기해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윤종이 천천히 그간의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하자 이대제자들이 숨을 죽인 채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리고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백천의 얼굴은 조금씩 더 일그러져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