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구르는 사람에겐 이끼가 끼지 않아! (2)
'이게 뭔 상황이야?'
조걸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유이설의 존재를 모르는 화산의 제자가 있겠냐마는 이리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를 마주한 건 처음 있는 일이다.
조걸이 삼대제자라서가 아니다. 이대제자들도 유이설과 친하게 대화하는 걸 본 적이 없다. 화산의 제자이긴 하지만 뭔가 조금 동떨어져 있는 존재가 바로 유이설이었다.
그런 그녀가 지금 조걸의 코앞에서 청명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이내 이대제자들의 칼날 같은 눈빛이 그에게 쏟아진다.
'와, 눈빛으로도 사람 죽이겠네.'
아니, 정확히는 청명에게 쏟아지고 조걸은 그 옆에 앉아 있는 것뿐이지만 모난 놈 옆에 있으면 정 맞는다고, 지금 그 정을 사정없이 얻어맞고 있는 중이었다.
'청명아, 제발!'
존댓말 좀 써라 이 망둥이 같은 놈아!
이대제자들 다 있는데 말투가 그게 뭐냐.
사숙들이 눈을 부라리고 있음에도 청명은 태연하기 짝이 없었다. 금방이라도 뭔가 날아올 것 같은 분위기에서 유이설만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작게 속삭인다.
"잠깐이면 돼."
"안 간다니까요."
"진짜 잠깐이면 된다니까."
"안 간다고! 말귀를 못 알아들으시나!"
말투. 말투 이 새끼야!
조걸이 자신도 모르게 청명의 허벅지를 꾹 눌렀다. 그러자 청명이 고개를 획 돌린다.
"왜?"
"……어……."
그걸 물으면 안 되지.
어……. 사숙들 앞에서 그렇게 나한테 물으면 안 되는데, 알아서 눈치를 채 줘야 하는데.
혀를 쯧 하고 찬 청명이 고개를 돌려 유이설을 바라본다.
"나는 사고랑 할 말이 없는데요."
"내가 할 말이 있어."
"딱히 듣고 싶지 않은데."
"잠깐이면 돼. 잠깐 나가자."
"귀찮은데, 그냥 밥이나 먹으면 안 될까요?"
"그럼 밥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릴게."
이대제자들은 환장하기 일보 직전까지 가 버렸다.
우선 첫째로 그들은 지금까지 유이설이 한 번에 저리 많은 말을 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아니, 정확하게는 장로님들이 아닌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과 저리 말을 하는 걸 본 기억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 유이설이 지금 새파란 사질을 붙들고 사정을 하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 두 번째로 그들을 더더욱 환장하게 하는 건 바로 청명의 태도였다.
'저 또라이 같은 놈이…….'
'사고가 말씀하시는데 당장 일어나지는 못할망정?'
'저 새끼는 눈이 없나?'
'진짜 도인이로다, 무량수불.'
활활 타오르는 분노와 미묘한 존경이 동시에 청명에게로 쏟아진다.
도를 닦는 이란 자고로 이성을 멀리하는 것이 가장 먼저다. 그런데 유이설은 그런 수행을 파괴하기 쉬운 존재였다. 제아무리 수양이 깊은 사람이라도 유이설이 저리 사정한다면 못 이긴 척 들어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저 얼굴과 표정을 눈앞에서 본다면 말이다.
하지만 청명은 그런 유이설에게 대놓고 귀찮다는 티를 팍팍 내고 있었다. 이건 이대제자들로는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안 간다니까요! 저 할 일 많아요. 다른 사람 찾아보세요."
"널 찾아온 거야."
"아니 왜 나를……."
그 순간이었다.
"흠."
낮지만 내력이 실린 탓에 넓게 퍼지는 목소리였다.
모두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 하얀 무복을 입은 백천이 자리에서 일어나 빙그레 웃으며 청명을 바라보았다.
"청명이라고 했었느냐?"
"네."
대답 한번 간결하다.
하지만 백천은 화를 내지 않았다. 이럴 때 화를 내는 건 자신의 밑바닥을 보이는 것밖에 안 된다.
"네가 장문인께 다녀오고 여러 임무를 맡아 피곤한 건 잘 알겠다. 아마 내가 알지 못하는 일들도 하고 있겠지. 하지만 사고가 저리 부탁을 하는데, 사질 된 도리로 한 번쯤은 생각을 해 줄 수 있지 않겠느냐?"
말을 끝낸 백천이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생각해도 괜찮은…….
"왜요?"
백천이 움찔한다.
내가 잘못 들었나?
아닌데? 그럼 지금 진짜로 '왜요'라고 한 건가?
당황한 백천이 청명의 표정을 살폈다. 뾰루퉁한 얼굴을 보니 잘못 들었던 게 아닌 모양이다.
순간 울컥한 백천은 간신히 억지로 화를 억눌렀다.
'침착하자.'
여기서 화를 내 버리면 그는 삼대제자 중에서도 막내와 드잡이를 한 사람이 되어 버린다.
"'왜요'라고 했느냐?"
"네."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 우선 사람은 예의라는 게 있어야 하는 법이다. 사제 간에도 지켜야 할 예의가 있는 법이지."
"아, 예의요?"
청명이 잘 알았다는 듯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고는 유이설을 부른다.
"사고."
"응?"
"빨리 사과 드려요. 지금 예의 없다고 뭐라고 하잖아요."
"……."
유이설이 손가락을 들어 자신을 가리켰다.
"네. 빨리 사과드려요."
"내가?"
"거참, 이해를 못 하시네."
청명이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었다.
"지금 이 자리는 이대제자의 복귀를 축하하는 자리잖아요. 그런 데서 사사로운 부탁을 하고 개인행동을 하면 예의에 어긋나는 거예요."
"아……."
유이설이 그건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백천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인다.
"죄송해요, 사형. 미처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 했어요."
"아, 아니, 사매. 그게 아니라……."
백천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왜 이야기가 이렇게 되어 버렸지?
그가 어떻게든 사태를 수습하려 입을 연 순간, 유이설의 뒤에서 청명이 다시 속삭인다.
"그쪽이 아니라 사숙조께 사과드려야죠. 사숙조가 계시는 자리에서 실수를 했으니까."
"그러네."
유이설이 운검을 향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제자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운검이 빙그레 웃는다.
"별말을 다 하는구나. 나는 괜찮으니 앉거라."
"예, 사숙."
유이설이 자리에 앉아 버리자 곤란해진 사람은 바로 백천이었다. 순간적으로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호기롭게 일어났는데……. 이런 식으로 해결이 되어 버리니 다시 자리에 앉기도 민망하다. 이대제자들도, 삼대제자들도 이제 백천이 뭐라 할지를 기대하며 그를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이런 눈빛을 받으며 그냥 앉아 버리면?
백천의 꼴만 우스워진다.
그가 낮게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청명에게 시선을 고정한다.
'안 되는데.'
'막아야 하는데.'
조걸과 윤종이 눈빛을 교환했다.
청명을 칼로 때려잡는 건 어렵지만 말로 때려잡는 건 더 어렵다. 이놈은 논리가 없는 놈이다. 말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 온갖 궤변을 들이밀고, 무논리를 논리처럼 사용한다.
여기서 대화가 더 길어지면 백천이 정말 돌아 버리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크흐흐흠! 사숙! 돌아오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오늘은 정말 좋은 날 아닙니까. 사숙들께서 이리 수련을 잘 마치고 돌아오셨으니 화종지회는 문제가 없다고 봐도 되겠지요."
조걸과 윤종이 필사적으로 화제를 전환했다.
청명을 비호하려는 게 아니다. 그저 첫날부터 청명과 백천이 드잡이를 해 화산이 개판이 되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아서였다.
백천이 슬쩍 조걸과 윤종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간절한 눈빛에, 백천은 살짝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열었다.
"청명이라고 했나?"
'아 저 한결같은 인간!'
'후진을 모르네. 후진을 몰라.'
백천을 막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이해한 두 사람이 손을 뻗어 청명의 옷자락을 움켜잡았다.
야, 제발 그냥 넘어가자. 딱 한 번만 예의 바르게…….
그 간절함을 읽은 걸까. 청명의 입이 열렸다.
"먼 길을 여행하느라 고초가 많으셨나 보네요."
오?
윤종과 조걸이 눈을 크게 떴다. 청명의 입에서 이런 예의 바른 말이 나오는 게 대체 얼마 만…….
"물었던 걸 또 물으시는 걸 보니. 쉬실래요?"
……일 리가 없지. 암, 그럴 리가 없지.
빌어먹게 초지일관한 새끼.
백천의 눈썹이 꿈틀댄다.
"하나 묻지. 정말로 오늘 낮에 나를 만난 적이 있지 않나?"
"처음 뵙는데요."
"솔직히 말하는 게 좋을 것이다."
"에이, 처음이라니까. 거 속고만 사셨나."
초롱초롱한 청명의 눈을 보면 누구도 그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삼대제자 빼고.
운검도 빼고.
어……. 이대제자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어……. 음.
"그래? 물어보면 알겠지."
백천이 몸을 돌려 운검을 향해 포권했다.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 자리에서 청명의 콧대를 꺾어 놓지 못하면 되레 그의 꼴만 우스워질 판이다.
"사숙. 제가 오늘 낮에 화음에서 저 아이를 보았습니다."
운검의 눈이 살짝 꿈틀댄다.
"그래?"
"예. 제가 알기로 삼대제자는 화산을 벗어나는 것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홀로, 도복도 아닌 사복 차림으로 화음에 내려왔다는 것은 분명 꺼림칙한 일입니다. 그러니 오늘 낮에 화산에서 저 아이를 본 사람이 있는지를 조사하여……."
"괜찮다."
"예, 조사는 제가……. 예?"
포권을 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백천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잘못 들었나?
아니, 오늘따라 귀가 이상한가 자꾸 이상한 소리가…….
"괜찮다고 했다."
백천이 황망한 얼굴로 운검을 바라보았다.
운검은 엄하디엄한 백매관의 관주다. 백매관의 관주이기 때문에 엄한 것이 아니다. 원래 규칙에 민감하고 엄한 사람이기 때문에 백매관의 관주가 된 것이다.
그런 이가 지금 명백히 화산의 규율을 어긴 삼대제자를 두고 괜찮다고 말하고 있다.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라는 말인가?
"사, 사숙?"
"저 아이는 윗 배의 허락 없이 산문을 나서는 게 허락된 아이다."
"허, 허락이라니요. 대체 누가 아이에게 그런 권한을 줄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장문인이 내리셨다.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
"자, 장문……. 진짜요?"
너무 놀라 되묻고 만 백천이 황급히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말투도 그렇지만 사숙이 한 말의 진위를 묻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오늘따라 자꾸 실수를 연발하는 백천이었다.
"그러니 상관없다."
백천의 망연한 시선이 청명에게로 향했다.
찹찹찹찹.
"……."
차라리 비웃는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면 화가 덜 났을 것이다. 하지만 청명은 이 일련의 사태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재빠르게 젓가락을 놀려 음식을 흡입하는 중이었다.
백천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끝까지 간다.'
이리된 이상 더는 사정을 봐줄 생각이 없다.
백천이 칼을 품고 다시 입을 열려는데, 문이 열리면서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얼굴에 차가운 얼음을 한 겹 씌운 듯한 사람. 재경각주 현영이었다. 그는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장로님을 뵙습니다."
"장로님을 뵙습니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자 그는 다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됐다. 잘 놀고 있는데 괜히 왔구나. 확인 한번 해 보러 왔다. 다들 오늘 마음껏 먹고 편히 쉬거라. 나는 간다. 운검은 아이들이 과하게 놀지는 않도록 잘 단속하거라."
"예, 사숙."
그때 서 있던 백천이 입을 열었다.
"장로님께 아뢸 말이 있습니다."
밖으로 나가려던 현영이 고개를 돌려 백천을 바라본다.
"무슨 일이냐?"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제가 오늘 낮에 이곳에 있는 삼대제자가 화음의 주루에서 술을 마시는 걸 보았습니다."
"술?"
"예!"
현영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삼대제자가 술이라니! 네 눈으로 똑바로 본 것이 맞더냐?"
"분명합니다. 본인은 아니라고 하지만, 제가 똑똑히 보았습니다."
백천이 포권으로 얼굴을 살짝 가리고는 입꼬리를 씨익 말아 올렸다.
조금 치사한 것 같지만, 먼저 도발한 건 저쪽이다. 그러니 이 정도는 해 주어야겠지.
"네가 본 삼대제자가 누구냐?"
백천이 슬쩍 시선을 옆으로 돌려 청명의 얼굴을 확인했다. 태연한 척하고는 있지만 아마 속이 타 죽을 지경일 것이다.
'나를 원망 마라.'
이건 화산의 법도를 세우는 일이다.
"삼대제자 청명입니다."
"……누구?"
"청명입니다. 저기에 있는 저 청명."
장로쯤 되면 삼대제자를 일일이 알 수 없는 법. 백천이 굳이 손까지 뻗어 청명을 가리켰다.
백천의 손끝 쪽에 놓인 청명을 바라본 현영은 미간을 확 찌푸린다. 그러더니 짜증과 노기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게 뭐?"
"예. 저 청명이 술……. 예?"
"그게 뭐?"
"……."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