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구르는 사람에겐 이끼가 끼지 않아! (1)
"사, 사형."
"……."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아무리 저희의 노고를 치하하는 일이라지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도 백천은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놀란 건 그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들의 눈앞에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다.
속세의 개념으로 보자면 진수성찬이라고 말하기에 조금 부족함이 있을지 모르나, 화산의 개념으로 보자면 거의 황제가 먹는 음식과 다를 게 없었다.
일단 저거.
저거! 저거!
"……고기 아닙니까?"
"허어."
백천이 두 눈을 비볐다.
지금 그의 앞에 있는 것은 분명 살아 있는 짐승을 죽여 그 살을 취한 죄악의 증거로 만들어진 음식이 분명했다.
청정도량에서 어찌 이토록 잔학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돈이 어디서 나서?"
내 말이!
어디서 훔친 것도 아닐진대, 화산에 돈이 어디 있어서 고기가 나왔단 말인가?
"자, 잠시만요. 사형. 그러고 보면 식당 내부도 좀 바뀌었습니다. 워낙 오랜만에 와서 어색한가 했더니, 뭐가 반질반질 깨끗한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고 보니."
백천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각 전체가 새로 지어진 건 아니지만 분명 개보수가 된 것 같은 모양새다. 곳곳에 뚫려 있던 구멍과 낡아 떨어질 것 같던 곳들이 모두 고쳐졌다.
"새 전각들이 생기지를 않나, 식당이 고쳐지질 않나. 그리고 지금 식탁에 고기가 올라오질 않나!"
"……."
"대체 우리가 없는 동안 화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모르겠습니다. 어디서 재신(財神)이라도 강림하지 않고서야."
백천이 헛웃음을 지었다.
재신이라니. 화산은 재물의 신이 버린 땅이다.
세상에 천하제일 거지 문파를 두고 개방과 다툴 수 있는 단 하나의 문파가 있다면 그건 화산이다.
아니, 개방도 화산보다 가난하지는 않을 것이다. 개방은 거지가 모인 단체일 뿐 개방 자체가 가난한 건 아니니까.
그런 화산에 재물이라니.
이렇게 어울리지 않는 말이 또 있겠는가?
백천이 고개를 슬쩍 들어 운검을 바라보았다.
"사숙. 이 음식들은?"
"재경각주께서 너희를 치하하기 위해 준비한 음식들이다. 많이 먹거라."
아니, 왜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말하십니까?
삼십 년 동안 풀만 뜯어 먹다 보니 검이 아니라 토끼와 하나가 되는 것 같다던 사숙은 어디 가시고?
이 와중에 더 이상한 것은 삼대제자들의 반응이었다.
이대제자들을 축하하기 위해 이 자리에 동석한 삼대제자들은 자신들의 앞에 고기가 놓여 있음에도 딱히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그저 심드렁하게 식탁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백천이 살짝 귀를 기울여 삼대제자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고기도 이제 지겨운데, 뭐 색다른 거 없나? 생선이라든가."
"미친놈이 산에서 생선 찾고 자빠졌네. 생선 대가리로 처맞고 싶냐?"
대체 지금 뭐라는 거야, 미친놈들이.
뭐? 고기가 지겨워?
도무지 상황을 이해할 수 없자 답답해진 백천이 입을 열었다.
"아니……."
"크흐흐흐흠!"
"으흐흠! 으흠! 으흐흐흐흠!"
"……."
아니, 입을 열려 했었다.
슬쩍 옆으로 고개를 돌린 백천은 사형제들의 칼날 같은 시선에 입을 다물었다.
'좀 먹고 하자.'
'너야 돈 많으니 고기 먹고 다니겠지. 우리는 지금 벽곡단만 일 년을 먹었다.'
사형제들의 눈빛과 기세에 눌린 백천은 헛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다.
"장문인이나 장로님들께서 오시지 않으신다면, 먼저 식사를 해도 괜찮겠습니까?"
"음? 아, 내가 눈치가 없었구나. 어서 들거라."
"예, 그럼."
운검이 눈치 좋게 젓가락을 들고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었다. 그걸 신호로 사형제들이 미친 듯이 젓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
파파파파팟!
음식이 허공으로 튀어 오른다.
하지만 걱정할 건 없었다. 허공으로 튀어 오른 고기가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젓가락이 날아들어 고기를 낚아채니까.
백천은 그 아비규환을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과해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당연한 일이다. 화산은 천하에서 가장 가난한 문파였고, 화산의 제자들은 천하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이다.
그동안 이곳에서 그들이 먹은 음식이라고 해 봐야 곡식 가루 조금에 솔잎, 그리고 몇 가지 견과류가 전부다. 좋게 말하면 선식이고, 나쁘게 말하면 세상에서 가장 저렴한 식단이었다.
게다가 이번 수련 덕분에 일 년 동안은 벽곡단만 먹고 살지 않았던가?
백천처럼 가문에 나름 여유가 있는 이들은 집에서 보낸 돈으로 음식을 사 먹을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은 벌써 몇 년째 고기는 냄새도 맡아 보지 못했다.
당연히 눈이 돌아가지.
그 와중 백천의 눈에 느긋하게 음식을 먹고 있는 삼대제자들이 들어온다.
태연한 그들을 보고 있으니, 이 음식들이 이제는 화산에서 특별할 것 없는 음식이라는 게 실감이 난다.
"사숙."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던 운검이 고개를 돌려 백천을 바라본다.
"왜?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느냐?"
"그런 게 아니오라……. 제자는 도통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저희가 없는 동안 대체 화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렇구나. 너희 입장을 생각하지 못했군."
운검이 피식 웃었다.
"지금 하기에는 너무 긴 이야기다. 차차 알게 될 것이다. 그저 화산에 복덩이 하나가 굴러 들어왔다는 것만 알면 된다."
"복덩이요?"
그 순간이었다.
쾅!
문이 대차게 열린다. 음식을 먹던 이대제자들이 움찔하여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이렇게 문을 과감하게 열고 들어올 수 있는 이라면 분명 장로급…….
'어?'
'장로님 중에 저리 어린 분이 계셨나?'
'그럴 리가 있나!'
놀랍게도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새파란 어린아이였다. 장문인을 따라갔던 청명이 부들부들 떨며 안으로 들어온다.
"여기 자리 있어."
조걸이 살짝 손을 들자 청명이 운검을 향해 슬쩍 고개를 숙이고는 쿵쿵거리며 자리로 향한다. 그리고 근처에 앉아 있던 이들이 슬쩍슬쩍 자리를 당겨 청명이 지나가기 쉽게 해 주었다.
백천은 그 광경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아이들이 저 아이를 배려한다고?'
물론 그럴 수 있지. 모두가 예의 바르고 착한 아이들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백천이 아는 삼대제자들은 성실하고 눈치는 빠를지언정, 착함이라는 말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녀석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저런 행동을 자연스레 한다는 것은 단 한 가지를 의미한다.
'저 꼬마 녀석이 삼대제자들을 휘어잡았다는 건가?'
믿기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믿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증거가 너무 많았다. 아이들이 비워 둔 자리가 하필 중앙 자리라는 것, 그리고 그 자리의 좌우로 윤종과 조걸이 앉아 있다는 것.
윤종은 삼대제자 중 대사형이고, 조걸은 삼대제자 중 가장 강하다.
'명분과 실세를 좌우로 끼고 있다는 건가?'
하지만 저 작은 아이가 대체 무슨 수로 저들을 휘어잡았다는 말인가? 게다가…….
'왜 운검 사숙은 아무런 말씀이 없으시지?'
조금 전 문을 차고 들어온 저놈의 행위는 꽤나 무례했다. 안에 이대제자나 운검이 없다고 생각하고 실례를 할 수 있지만, 실례를 저질렀다면 제대로 사과를 하는 것이 예의다.
평소 예의를 중시하는 운검 사숙이라면 분명 한마디 했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은 전혀 상관없다는 듯 태연하게 젓가락질을 하는 중이었다.
'보면 볼수록 알 수가 없군.'
백천이 고개를 내젓는다. 그의 눈에 주변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는 청명의 모습이 들어왔다.
"왜 또 그렇게 화가 났느냐?"
"은하상단에 다녀오래."
"……거길 또."
"그러니까. 내가 무슨 전서구도 아니고!"
청명의 불평에 윤종이 피식 웃었다.
"처음에는 좋아하더니."
"그것도 한두 번이지. 끄응."
청명이 머리를 벅벅 긁는다.
"그래도 화음에 있는 지부에만 전달하면 되니 다행이지, 서안까지 갔다 오라고 했으면 진짜 드러누울 뻔했어."
청명을 위로하는 윤종과, 낄낄대며 쿡쿡 찔러 대는 조걸의 모습을 보며 백천은 확신하고 말았다.
'저놈이 삼대제자들을 모조리 먹어 버렸군.'
어떤 방법을 쓴 건진 모르겠지만, 청명이 삼대제자를 지배하는 실세가 된 것만은 확실했다.
'여러모로.'
백천이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삼대제자의 대제자인 윤종은 윗사람을 깍듯이 모시는 성향이었다. 굳이 백천이 눌러 주지 않아도 제 스스로 고개를 숙일 줄 알았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저 청명이라는 놈은 그런 성향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한번 날을 잡을 필요가 있겠군.'
여러 궁금증도 풀 겸 말이다.
"대사형."
"음?"
"안 드십니까?"
"아아, 먹어야지."
백천이 젓가락을 들었다. 하지만 이내 도로 젓가락을 내려놓은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유 사매는 어디 있느냐?"
"……글쎄요? 조금 전까지는 있었는데."
유 사매라는 말에 이대제자들이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식당에 올 때까지는 있었습니다."
"그새 또 어디로 빠진 모양인데요."
이런 일이 꽤 자주 있었는지 다들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하지만 백천은 그게 영 못마땅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찾아봐야 하지 않겠느냐? 사형제들이 간만에 회포를 푸는 자리다. 빠지는 사람이 있으면 즐거움이 주는 법이지."
"유 사매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이 없잖습니까? 올 생각이 없으면 아무도 못 찾습니다."
"괜히 헛수고만 할 겁니다. 사형."
백천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
"으음."
그의 불편한 기색에 눈치를 살피던 이들은 결국 나지막이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이설은 기이한 면이 있어서,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이상 찾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백천이 저리 표정을 굳힌 이상 찾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사형은 유 사매를 너무 편애한다니까.'
다른 일에는 공평한 사람이 유이설이 엮인 일에서는 자주 평정을 잃는 듯했다.
'하기야.'
이해 못 할 일도 아니다. 덕분에 조금 귀찮을 뿐이지.
이대제자들 중 몇몇이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이었다. 닫혀 있던 문이 느리게 열린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열린 문으로 쏟아지는 햇살을 뚫고, 한 여자가 안으로 걸어 들어온다.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작은 걸음걸이.
"사매."
백천이 목소리를 높였다.
안으로 들어온 유이설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마치 누군가를 찾으려는 듯이.
백천이 빙그레 웃으며 손을 들었다.
"사매 이쪽……."
유이설이 걸음을 다시 떼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방향은 백천이 있는 쪽이 아니었다.
자박. 자박.
종종걸음으로 한쪽으로 걸어간 유이설이 이내 목적한 곳에 도달하여 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앞에 앉아 있는 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백천의 눈가가 살짝 꿈틀댄다.
유이설이 빤히 바라보던 사내를 향해 물었다.
"앉아도 돼?"
이대제자들이 퍼덕댄다. 특히나 남자들은 얼마나 놀랐는지 눈이 금방이라도 빠질 듯이 튀어나와 있었다.
'유 사매가 남자에게 말을 걸었어?'
'아니. 유 사매가 마지막으로 말을 한 걸 들은 게 언제지?'
하지만 경악은 끝나지 않았다.
유이설이 말을 건 사내, 그러니까 청명이 온갖 짜증을 얼굴에 다 담고는 날파리를 쫓듯이 손을 휘적거렸다.
"안돼요."
"……그럼 잠시 이야기 좀."
청명이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 이야기해 줄 생각 없어. 돌아가."
저게 미쳤나?
이대제자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