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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75화 (76/1,567)

75화. 화산이 뭔가 달라진 것 같은데. (5)

환하게 웃는 백천의 얼굴은 그림에서 나온 것만 같았다.

완벽하게 잘생긴 얼굴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고 해야 할까?

'이거 옛날에 몇몇 놈들에게서 받은 느낌인데.'

그 남궁가의 얌생이라던가……. 소림의 그 빡빡이가 이런 기운을 풍겼었지.

다시 말하자면.

'기재는 기재라는 거군.'

물론 그놈들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고만고만한 놈들이 모여 있는 이 화산에서는 단연코 군계일학이라는 느낌이다. 대체 왜 이런 놈이 다 망해 자빠진 화산에 기어들어 왔는지 궁금할 정도로 말이다.

문제는 그 기재 놈이 지금 청명의 발목을 물고 늘어진다는 점이겠지.

"무슨 말씀이신지?"

일단은 발뺌하자.

"아는 것 같은데?"

"전혀 모르겠는데요?"

"아, 그런가?"

백천이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정말 몰라서 하는 행동이라기보다는 청명을 도발하는 과장된 행동이다.

"이상하군. 구면 같은데 말이야. 혹시 입문을 언제 했지?"

대답은 청명이 아니라 청명의 옆에 있는 윤종이 했다.

"사숙께서 화산을 떠나 있는 동안 입문한 아이입니다. 보신 적이 없으실 겁니다."

"흐음, 그렇군. 그래."

백천이 빙그레 웃었다.

"그런 것치고는 너희와 친해 보이는구나. 대사형으로서 막내를 챙기는 건 좋은 일이지. 그렇지 않느냐?"

"예, 사숙."

윤종이 어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대답에서 뭔가를 읽은 듯 백천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래도 내가 너와 인연이 있는 모양이다. 초면인데 이리 낯이 익은 걸 보니 말이야. 앞으로 자주 보게 될 것 같은데. 이름이 어떻게 되지?"

"청명이요."

"나는 백천이라고 한다. 내 이름을 꼭 기억해 두거라."

그때 단호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장문인께서 기다리고 계신데 어찌 사사로운 잡담을 나눈다는 말이더냐!"

"아, 죄송합니다. 잠시."

백천이 운검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청명에게 눈인사를 했다. 그리고 몸을 빙글 돌려 연무장 쪽으로 향하는 대열에 끼어든다.

조걸이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청명에게 속삭인다.

"너 백천 사숙 본 적 있냐?"

"없어."

있어도 없다.

"조심해. 백천 사숙이 이대제자 중 대제자시거든. 엄청 대단하신 분이야."

"대단?"

"그렇다니까."

윤종이 조걸의 말에 보탰다.

"화산제일기재라고 불리는 분이다. 무너져 가는 화산을 다시 일으킬 사람이란 평을 받고 있지."

"화산제일기재?"

그거 옛날에 자주 들어 본 말 같은데? 그러니까 내가 어……. 코흘리개 찌질이였을 때 주변에서 자주 그런 말을 했지.

곧 화산 제일 망둥이로 바뀌었지만.

"화산제일기재는 조 사형 아니었어?"

"뭔 소리야. 남이 들어!"

조걸이 답지 않게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백천 사숙은 감히 내가 따라갈 수도 없는 사람이라고."

"아, 그래그래. 패배 의식은 좋은 거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어 주고."

"응?"

"아니야, 사형."

청명이 앞서 걸어가는 백천을 보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군계일학이라.'

좋은 말이지. 아주 좋은 말이야.

하지만 실제로는 그리 좋은 말이 아니란 말씀.

백로는 백로 속에 있을 때, 자연스러운 법이다. 백로가 까마귀 무리 사이에 있다는 건 무척 부자연스러운 상황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하자가 있다는 말이지.'

조금 흥미가 당긴 청명이 백천을 관찰하는 중에도, 윤종은 설명을 계속했다.

"실제로 백천 사숙의 태을미리검은 거의 완숙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이야. 윗분들의 기대가 매우 크다고 들었어. 심지어 아직 젊은 나이임에도 복호청양검의 전수를 고려하고 있다는 말도 있으니까."

"흐음."

아마도 이대제자 중에서는 화산이 가장 중점적으로 밀어주는 제자인 모양이다.

'그거 엄청 귀찮은 건데.'

과거의 청명도 그랬다.

뭐 그렇게 익히라는 게 많은지. 남들은 적당히 수련하고 가서 쉬는데 청명은 장로가 찾아와서 닦달해, 사숙들이 찾아와 닦달해. 심지어 사형……. 아니. 장문사형은 뭐 빠지는 데가 없나.

하긴 그럴 만한 일이다.

문파의 위명이야 역사와 함께 쌓아 가는 것이라지만, 당대의 흥망성쇠는 단 한 명의 고수에게 달려 있는 경우가 많으니까.

중소 문파라도 이름난 고수 하나를 배출해 낼 수 있으면 입문을 원하는 이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기 마련이다. 반면에, 아무리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거파라도 이름에 걸맞은 고수를 배출해 내지 못하면 파리만 끓는 법이다.

망해 가는 화산이 일발 역전할 방법은 누구라도 인정하는 고수를 배출하는 법밖에 없다. 단 한 명. 단 한 명만 나와 주면 상황을 뒤집을 수 있다.

'물론 내가 오기 전까지는 그랬겠지.'

이제는 뭐 딱히?

돈도 많은데 뭐.

"사숙들은 정말 그림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평생 따라갈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멋지기도 하고, 강하기도 하고."

청명이 허망한 눈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이것들 눈은 옹이구멍인가?'

'멋지다'까지는 그렇다 치자. 그건 개인의 영역이니까. 사람의 취향은 다양한 법이고, 청명은 자신의 취향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 바른 사람이었다.

하지만 '강하다'는 별개지.

'쟤들이 강하면 전 중원에서 약한 애들은 하나도 없겠네.'

"웬만한 사숙 정도는 사형들이 이기고도 남겠는데?"

청명의 말에 조걸이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는다.

"뭔 헛소리야."

"……어, 그래."

사형.

장문사형.

제가 이런 말을 듣고 삽니다. 양심이 있으면 좀 내려와서 한마디 해 주십쇼! 내가 이거 억울해서 살겠습니까?

다른 신선들은 현세에 와서 이런저런 조언들도 해 준다는데. 사형은 대체 뭔 덕이 그렇게 모자라서 신선도 못 되고, 와서 내 이야기도 못 해 주는 겁니까?

예?

신선이 돼도 제 편은 안 들어준다고요?

에라이!

청명이 사형제들과 옥신각신하며 대화를 나누는 사이, 백자 배는 어느새 도열을 마쳤다.

"어?"

그리고 산문 쪽이 아니라 전각 쪽에서 한 사람이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도열에 합류한다.

청명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저거도 백자 배였지.'

유……. 유 뭐였더라? 하여튼 유 머시기.

이상한 인연으로 얽히다 보니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설마 하루 사이에 저 요망한 주둥아리를 나불대지는 않았겠지?

청명이 눈가를 찌푸리고 유이설을 바라보자 조걸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너는 유 사고를 처음 보는 구나."

"쟤?"

"그래. 유이설 사고. 처음 보면 눈을 뗄 수가 없지. 너무 아름다우시니까."

"대사형."

"응?"

"혹시 산초 가루나 계피 가루 가진 것 없어?"

"그건 왜?"

"귀에 좀 뿌려야겠어. 조걸 사형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는 걸 들으니까 귀에서 기름 나오는 기분이야."

느끼해도 이렇게 느끼할 수가 없다.

윤종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간만에 의견이 맞는구나. 구하면 네게도 주마."

"감사."

조걸이 인상을 확 일그러뜨렸다.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유 사고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그렇지. 강호행 두어 번만 하고 나면 섬서제일미는 따 놓은 당상일 걸?"

조걸이 촐랑대듯 말하자 청명이 한숨을 푹 내쉰다.

"이놈의 문파는 화산제일기재에, 섬서제일미에.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섬서 지방 정도는 찜 쪄 먹는 줄 알겠네."

"하지만 사실이잖아."

조걸이 턱짓으로 유이설을 가리켰다.

"솔직히 예쁘지?"

"하……."

청명이 채 대답하기도 전에 조걸이 선수를 친다.

"하지만 꿈 깨라. 유 사고는 백천 사숙에게 마음이 있으니까."

"……사형."

"응?"

청명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남의 연애사에 관심을 가질 시간에 검 한 번 더 휘둘렀으면 지금쯤 사형이 검으로 이름을 날리지 않았을까?"

"사람 그렇게 아프게 찌르는 것 아니다."

"말을 말자."

청명은 한심하다는 듯 조걸을 보고 시선을 돌려 버렸다.

그러고 보면, 자신이 사고라 주장하더니, 사고는 맞는 모양이다. 청명은 도열에 합류하여 서 있는 유이설을 물끄러미 보았다.

백자 배가 모두 도열을 마치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장문인이 훈훈한 미소를 짓는다.

"다들 고생했구나. 수련은 힘들지 않았느냐?"

백천이 백자 배를 대표하여 입을 열었다.

"장문인. 전혀 힘들지 않았습니다. 저희의 수련이 본문의 뼈를 깎는 지원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진대, 어찌 힘들다는 말을 입에 올리겠습니까."

"성과는 있었느냐?"

백천이 미소를 지었다.

"검의 길은 파고 또 파도 끝이 없다는 것만 깨달았습니다. 다만 수련을 시작하기 전의 저희를 우습다 할 성취는 얻고 돌아왔습니다."

"좋은 일이구나."

현종이 고개를 돌려 현영을 바라본다.

"재경각주."

"예, 장문인."

"화산의 아이들이 힘든 수련을 마치고 돌아왔으니, 당연히 잔치를 열어 노고를 치하해야 하지 않겠는가?"

"뭘 했다고 잔……. 아니, 아닙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

현종이 미묘한 시선으로 현영을 바라본다.

'사제가 요즘 좀 이상해진 것 같은데.'

정확하게는 얼마 전 은하상단의 일 이후로 이상한 말을 하는 빈도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이게 성격이 변한 건지 아니면 없는 살림에 참고 살다가 고삐가 풀린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그렇지 않아도 식당에 준비를 해 뒀습니다. 회포를 풀 정도는 될 것입니다."

"그렇구나."

현종이 백자 배를 보며 말한다.

"하고픈 말은 많다만, 먼 길을 온 이들을 잡아 두는 것 역시 좋지 않은 일이겠지. 특별히 할 말이 없으면 여기까지 하자꾸나."

"……장문인. 외람되지만 하나 여쭤도 되겠습니까?"

현종은 행사를 빨리 끝내고 싶어 하는 눈치가 역력했지만, 백천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묻거라."

"오랜만에 화산에 돌아오니 경관이 많이 달라진 듯한데, 이게 어찌된 일인지 궁금합니다."

"좋은 일들이 있었다. 덕분에 외관을 다시 단장할 수 있었구나."

부드럽지만 단정적인 대답이었다. 이 대답을 듣고 나니 그 '좋은' 일이 무엇이었는지 묻기가 어렵다.

"궁금한 게 많겠지만,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이야기를 들으면 될 것이다."

"예, 장문인."

"운암."

"예."

현종의 곁을 지키던 운암이 공손히 시립했다.

"고생한 아이들이 회포를 풀 수 있도록 네가 도와주거라."

"예, 장문인."

현종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청명아!"

"……."

청명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아니, 근데 저 양반은 날이 갈수록 왜 나만 찾아 대지?'

오늘은 별일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예! 장문인!"

청명이 도열한 삼대제자들 사이에서 비척비척 걸어 나왔다.

"잠시 내 처소로 오거라. 내가 이야기할 것이 있느니라."

"또요?"

옆에서 상황을 보고 있던 백천의 눈이 툭 튀어나왔다.

'또……. 또요?'

장문인에게 또요?

백천은 자신이 뭔가 잘못 들은 건 아닌지 의심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잘못 들은 건 아닌 모양이다. 도열해 있던 이대제자들이 모두 그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으니까.

하지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이대제자를 제외한 모두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장문인에게 저런 망발을 한 놈의 입을 찢어 놓겠다고 길길이 날뛰어도 모자랄 텐데!

하물며 장문인마저도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다.

"당과(糖菓)라도 준비하면 오겠느냐?"

"끄응. 네, 알겠습니다. 지금 갑니다."

현종이 흐뭇한 얼굴로 청명을 이끌고 처소로 향했다.

말없이 그 광경을 바라보던 백천이 황당한 얼굴로 운검을 돌아보았다.

"사숙. 저 아이는 대체……."

"음."

운검이 사람 좋게 웃었다.

"그냥 신경 끄는 게 정신 건강에 좋을 것 같구나."

"예?"

"특히나 너는 말이다."

운검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몸을 돌렸다.

"짐을 풀고 식당으로 오거라. 늦지 않게."

"……예."

백천은 조금 전부터 느꼈던 묘한 위화감이 점점 더 커지는 것을 느꼈다.

'화산이 뭔가 달라진 것 같은데.'

오랜만에 와 어색해서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단 하나.

백천의 시선이 멀어지는 장문인과 청명에게로 향한다.

"흐음."

그리고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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