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화산이 뭔가 달라진 것 같은데. (4)
백천의 눈이 가늘어진다.
'이 녀석은 누구지?'
기이하기 짝이 없다.
처음 이 객잔에 들어왔을 때부터 미묘한 위화감을 느꼈는데, 지금 자세히 보니 왜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 알 것 같다.
이제 겨우 열다섯 남짓이나 되었을 만한 아이가 비싼 요리를 시켜 놓고 술을 마신다?
물론 가능한 일이다.
고관대작의 자제들이나, 돈 명문세가의 후인들. 그리고 상가의 자제들 같은 경우는 어린 나이부터 풍류를 즐기는 법이니까.
문제는 이곳이 화음이라는 것이다.
그가 알기로 화음에는 고관대작이 없고, 명문의 후예가 없고, 돈 많은 상가의 자제가 없다. 있다고 한들 청명의 나이는 아니다.
그럼 저 아이는 대체 누구기에 저리 당연한 듯 화음에서 혼자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는 말인가?
"쿨럭."
아이가 낮게 기침을 하더니 손을 내저었다.
"저는 그냥 지나가던 사람이에요. 신경 쓰지 마시고 드시던 거 마저 드세요."
"지나가던 사람이라."
백천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진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군. 소형제. 그럼 이리 만난 것도 인연인데 통성명이라도 하는 게 어떻겠는가? 나는 대 화산의 이대제자인 백천이라고 하네."
청명이 얼굴을 가린 손 뒤에서 빠득 이를 갈았다.
'아니, 이 새끼가? 왜 이리 끈질기지?'
확 패 버릴 수도 없고.
청자 배면 후려 까든 털어 말려 연을 만들든 별 부담이 없지만, 백자 배는 아니다.
만약 청명이 백천을 쥐 잡듯이 팼다는 사실이 화산에 퍼지기라도 한다면, 장문인은 자리를 싸잡아 드러누울 것이고, 요즘 들어 잔소리가 심해진 운검은 청명을 베어 버리겠다고 길길이 날뛸 게 뻔하다.
그럼 청명이 이제껏 쌓아 왔던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이다.
'그건 안 되지.'
괜히 어린놈이랑 얽혀서 그런 손해를 볼 수는 없다. 청명이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저는 딱히 내세울 만한 이름이 없네요……."
"대화를 나눔에 있어, 얼굴을 가리는 건 군자의 도리가 아닌 것 같건만?"
도사 놈이 뭔 군자 타령이야? 그럼 관직 나가지 이 새끼야!
뭔가 울컥한 청명이었지만, 일단 지금은 몸을 피하는 게 먼저다.
청명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는 이만."
"거기 서게."
"다음에 만나 뵙고 이야기 나누시죠."
슬쩍 몸을 돌리려던 청명이 아차 하고 탁자 위의 술병을 주섬주섬 움켜쥔다. 그리고 입을 가린 채로 고개를 꾸벅 숙인다.
"안녕히 계세요."
"소형제. 나는 소형제와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소만?"
"남자랑 노가리 까는 취미는 없어서요. 그럼."
청명이 후다닥 입구로 내달리자, 백천이 얼굴을 굳히며 빠르게 손을 뻗었다.
'어딜!'
그의 손이 청명의 옷자락을 붙들려고 하는 순간.
스슷.
청명이 자연스레 옆으로 한 발 물러나고, 백천의 손이 허공을 가른다.
"엇?"
"수고하세요!"
청명이 부리나케 뛰어 객잔을 나가 버렸다.
백천이 멍한 눈으로 청명이 나간 곳을 바라본다.
'피했다고?'
그는 마지막 순간에 분명 금나수를 운용했다. 비록 절정의 수공은 아닐지라도, 어린아이 하나 붙잡는 데는 과한 수법이었다.
그런데 피했다?
"사형. 왜 잡지 않으셨습니까?"
"……으응?"
"마지막에 놓아주지 않으셨습니까?"
백천의 얼굴에 당황이 어렸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지?
"……굳이 어린 아이를 핍박하는 것도 도인이 할 일은 아니다 싶더구나."
"사형다우십니다. 하하."
백천이 어색한 미소를 머금었다.
'실수였겠지.'
오랜 여정으로 피로했거나, 그게 아니면 화산에 당도했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이 풀어진 게 분명하다.
그가 제대로 금나수를 펼쳤다면 저 작은 아이 하나 잡지 못할 리가 없으니까.
"화음에 사람이 많아졌다 싶더니, 못 보던 얼굴도 늘었군요."
"화음이 작은 곳도 아니니, 우리가 모두를 알 수는 없지. 인연이 있다면 또 만나게 될 것이다."
"예, 사형."
백천이 빙그레 웃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의 미소는 조금 전처럼 밝지 못했다.
* * *
"에라이! 썩을!"
청명이 돌부리를 걷어찼다.
"왜 하필 거길 기어 들어오고 난리야! 다른 객잔도 많고 주루도 넘치는데. 여하튼 재수가 없으려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아, 아까워.
채 다 먹지 못한 안주를 생각하니 속이 뒤집힌다. 그게 돈이 얼만데.
"술이라도 챙겨 왔으니 다행이지."
화산을 오르며 청명이 연신 병째로 술을 들이켰다.
"캬, 입에 쫙쫙 붙는구나."
안주만 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청명이 입맛을 쩝쩝 다시고는 비어 버린 술병을 구석으로 던졌다.
"끄응. 산 오르기 더럽게 힘드네."
이놈의 산은 올라도 올라도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그나저나 백자 배라.'
청명의 계획에 없던 놈들이 갑자기 불쑥 나타났다. 물론 그놈들이 나타난다고 해서 딱히 방해를 받는 건 아니지만…….
'좀 귀찮아질 수는 있겠네.'
그동안 청명이 화산 생활을 편하게 했던 이유는 어마어마하게 공을 세워 은연중에 우대를 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뿐만은 아니다.
청명이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운자 배와 청자 배의 나이 차이가 극심하다는 점이다.
모두 쉰을 넘어 버린 운자 배에 비해, 청자 배는 이제 겨우 스물도 안 된 애송이들뿐이다. 운자 배가 일일이 쫓아다니며 윽박지르기에는 체면이 상한다.
본디 이런 건 윗 기수가 하는 법이다.
갓 군에 들어온 신병에게 제일 무서운 사람은 장군도 아니고 황제도 아니다. 바로 손위 기수다. 멀리 있는 천하제일명장보다 눈앞의 성질 더러운 고참이 무서운 게 인지상정 아닌가?
그런데 없다고 생각했던 고참이 생겨 버렸다.
"끄응. 백자 배라."
일단 첫 인연은 좀 이상하게 만들어졌다.
"에이. 내가 거기서 웃으면 안 되는 건데."
하지만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백천이 늘어놓는 말이 너무 황당했으니까.
"종남을 잡아?"
그 주제에?
청명이 연신 혀를 찼다.
예전 종남의 삼대제자만도 못해 보이는 놈들이 입만 살아서는.
"아이고 사형. 이제는 저런 것들도 화산의 제자라고 설치는 시댑니다. 예? 요즘 것들은! 어휴!"
삼대제자를 봤을 때는 충격이 덜했다.
애들이 무학을 배워 봐야 얼마나 배웠겠는가? 어차피 제대로 된 무학을 배웠어도 그 수준에서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대제자는 말이 다르다.
삼대제자는 기초를 닦고, 이대제자는 수련을 통해 성장하고, 일대제자는 완숙에 접어들어야 한다. 그리고 장로 정도 되면 자신만의 무학의 길을 완성해 나가는 게 정석이다.
그래……. 그게 정석인데.
"아이고 두야."
청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대제자들의 꼴을 보고 있자니 속이 뒤집어진다. 저놈들도 화산의 일원이니 청명이 안고 품어야 하는데…….
"내가 이렇게 시간 낭비할 때가 아니지."
이대제자들의 꼴을 보고 있으니 안 그래도 급한 마음이 더욱 급해진다.
"끄응. 어느 세월에 저것들을 사람 구실하게 만드나."
아직은 너무도 멀고 먼 길이었다.
* * *
"조걸 사형! 삼대제자 전부 연무장으로 모이시랍니다."
"왜?"
"사숙들께서 돌아오셨답니다."
"음, 알았다. 대사형께는 알렸어?"
"예! 금방 나오신답니다."
"알았다."
조걸이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그러고 보니 곧 해가 떨어질 시간이다.
'이 녀석은 돌아왔으려나?'
조걸이 문을 열고 나가 청명의 방문을 열었다.
"쿠하……. 드르렁, 쿠!"
"……."
침상에 널브러진 청명을 보니 말이 나오지 않는 조걸이었다. 드러누운 자세가 마치 거하게 한잔 걸친…….
"아니, 진짜 처먹었나?"
어디서 술냄새가 나는 것도 같은데?
당황한 조걸이 청명에게 달려들어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청명아! 사제! 청명 사제! 이 미친놈아……."
"응?"
"……아, 아냐. 마지막은 잊어."
참 적절하게도 깨어난다.
"사숙들이 돌아왔다고 다 모이란다. 너 빨리 씻어라. 지금 몰골이 말이 아니다."
"흐아아암."
청명이 늘어지게 기지개를 폈다.
"잠깐 쉰다는 게 졸아 버린 모양이네."
그건 존 게 아니야.
청명아 그렇게 조는 생물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드러누워 잔다고 표현해야지.
"너 일단 씻……."
"흣차!"
청명이 살짝 기합을 넣자 술 냄새가 화아아악 풍겼다. 눈을 찌푸린 조걸이 막 한마디 하려던 찰나…….
'어?'
확 풍겼던 술 냄새가 일시에 사라졌다. 킁킁대며 냄새를 맡아 봤지만 역시 마찬가지다.
"어? 어디서 술 냄새가 났는데?"
"술이라니. 신성한 청정도량에 그게 무슨 망발이오, 사형. 그러다 천벌 받소."
"……아닌데? 분명히……."
"가자. 늦게 나갔다 볼기 맞을라."
매우 억울해진 조걸이었지만, 일단은 청명의 말이 맞기에 군말 없이 서둘러 뒤따라 나갔다.
"그런데 이대제자 복귀하는데 우리는 왜 나가는 건데?"
"그래도 환영은 해 드려야지. 힘든 폐관을 마치고 돌아오시는 분들인데."
힘든 폐관은 얼어 죽을.
폐관은 그런 게 아니다.
빛도 안 드는 참회동에 처박아 놓고 두 달이고 석 달이고 이끼 뜯어 먹으며 검만 휘두르게 만들어야
'아 내가 수련 좀 했구나.'
하는 거지.
'어딜 청춘남녀끼리 삼삼오오 짝지어서 칼이나 좀 휘두른 주제에 건방지게 수련을 입에 올려.'
나 때는 안 그랬는데! 나 때는!
백 년 전의 화산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다.
"이번에는 정말 칼을 가셨다. 그래서 장문인도 큰마음을 먹고 수련을 지원하셨지. 어떻게든 종남의 코를 한번 눌러 주겠다고 말이야."
"그래?"
"응. 백천 사숙께서 강력하게 요청하기도 했고."
청명이 코웃음을 쳤다.
"그래, 그래."
"너도 태도 조심해야 한다. 백천 사숙은 엄한 면이 있어서 평소처럼 굴다가는 분명 혼쭐이 날 테니까!"
"그래, 그래."
"진짜라니까."
"그래, 그래."
울화통이 치민다는 표정을 짓는 조걸을 버려두고 청명은 휘적휘적 걸어 산문 쪽으로 향했다. 청명이 도착할 때쯤에는 이미 사람들이 꽤나 모여 있었다.
장문인과 장로들, 그리고 운자 배들도 모두 전각 밖으로 나왔다. 모두가 산문에 쭉 서 이제 곧 돌아올 백자 배들을 기다렸다.
"저기 옵니다."
"산문을 열어라."
멋들어지게 새로 지어 올린 대문이 좌우로 열린다. 이내 검은 무복을 입은 화산의 이대제자들이 당당하게 걸어 들어왔다.
"오!"
"기세가 달라졌군."
"과연 훌륭하도다."
운자 배들이 감탄했고, 청자 배들은 연신 박수를 쳤다. 그리고 현자 배들은 흐뭇한 얼굴로 귀환하는 제자들을 환영했다.
심드렁한 사람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언제 끝나나.'
밥 먹으러 가야 하는데.
가장 앞에서 이대제자들을 이끌던 백천이 미소를 지으며 환영에 화답했다.
'와, 그림 나오네.'
역시 쟤, 다시 봐도 잘생겼다.
하기야 예전의 청명도 훤하다 소리를 많이 들었었지. 단장하고 마을에 내려가면 꽃다운 처녀들이…….
- 양심.
"에이, 진짜."
거 환청으로 사람을 구박하나.
청명이 고개를 내젓고 박수를 치려는 순간이었다.
"어?"
사제들의 인사를 받아 주던 백천의 눈이 청명에게 고정된다. 잠시 멈칫했던 백천은 슬쩍 고개를 갸웃거렸다.
묘한 눈으로 한참 동안 청명을 주시하던 그는 이내 청명의 바로 앞까지 와서는 씨익 하고 웃는다.
"혹시……."
빙글빙글 웃는 낯의 백천이 청명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한다.
"우리 구면 아니던가? 소형제?"
"……."
이거 진짜 확 패 버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