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화산이 뭔가 달라진 것 같은데. (3)
"여기요!"
"아이고. 공자님 또 오셨군요. 이쪽으로 오십시오. 좋은 자리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별일 없죠?"
"아이고. 별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공자님께서 자주 찾아와 주신 덕분에 장사도 잘되고 살 만합니다. 하하하하."
청명이 점소이의 안내를 받아 창가 자리로 향했다.
"시원한 물수건입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늘 드시던 소홍주를 내오겠습니다. 오늘 안주는 뭐로 하시겠습니까?"
"적당한 걸로 두어 개 내다 줘요."
"예. 제가 주방장과 이야기해서 오늘 가장 좋은 음식으로 준비하겠습니다."
제일 좋은 것 말고 제일 맛있는 거, 인마!
누굴 호구 잡으려고!
하지만 점소이는 말릴 틈도 없이 부리나케 주방으로 달려가 차게 식혀진 소홍주를 두 병 내왔다.
"여기 있습니다."
"크, 감사."
청명은 일단 소홍주를 받아 들자마자 지체 없이 뚜껑을 열고 잔에 따랐다.
술이 쫄쫄쫄 흘러 들어가는 소리부터 더없이 흐뭇하다.
'사람이 이 맛에 사는 거지.'
아무리 청명이 도가의 법도를 걷어차 버린 인간이라고는 하지만 삼대제자의 신분으로 화산에서 술을 먹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술을 완전히 금하는 건 아니지만, 산문 내에서의 음주는 엄격히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명이 누구던가.
하지 말라면 해야 하고, 절대 안 되는 건 절대 해야 하는 개구리 띠의 인간이다.
'이상하게 먹지 말라고 하면 더 먹고 싶단 말이야.'
동굴에서 챙겨 나온 술 두 병은 동난 지 오래였고, 이제는 장문인이 준 특권으로 화음에 내려올 때마다 도복을 갈아입고 주루에 들르는 게 일상이 되어 버렸다.
얼마나 자주 왔는지 이제는 점소이가 먼저 알은체를 한다. 민망하게시리!
"크으."
술 한 잔을 지체 없이 목으로 털어 넣은 청명이 극락에라도 온 것 같은 얼굴로 의자에 늘어졌다.
"자연히 흘러가는 게 도라면서 하지 말라는 건 뭐 그렇게 많아? 사람이 말이 앞뒤가 맞아야지!"
하여튼 도사 놈들이란!
뭐?
나도 도사라고?
에이. 나는 좀 다르지.
청명이 술을 한 잔 더 따라 입가로 가져갔다. 그러더니 머금지는 않고 가만히 술잔을 바라본다. 찰랑이는 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청명이 살짝 미소를 머금는다.
"예전 같지는 않습니다, 사형."
술은 눈에 불을 켜고 청명을 찾아다니는 사형들의 눈을 피해서 숨어 마실 때가 제맛이었다.
"나는 여기에 이렇게 있는데."
사람이 없구나.
술잔을 보던 청명은 결국 피식 웃었다.
이상한 일이지.
평생 술잔 건너편에 앉을 사람을 그리워해 본 적이 없는데, 이제 와 그 너머를 바라보다니 말이다.
"쯧."
그렇다고 깊게 감상에 빠지지는 않는다.
지난 일은 그저 지난 일일 뿐이다. 그가 궁상떠는 모습을 사형제들이 본다면 배를 잡고 웃을 것이다.
그 양반들은 원래 그런 인간들이니까.
세간에는 높은 도를 깨달은 도인이니, 살아 있는 신선(活仙)이니 하는 말로 불렸지만, 실제로는 그냥 장난기 많은 노인들이었을 뿐이다.
청명 역시 마찬가지고.
"자, 여기 삼피사(三皮絲) 나왔습니다. 그리고 여기 대려대파주자(大?
帶把?
子)입니다."
삼피사는 오골계와 돼지, 그리고 해파리의 껍질을 무친 요리이고, 대려대파주자는 족발을 졸인 요리다. 둘 다 섬서의 전통 음식이었다.
"동파육은요?"
"이제 곧 나옵니다."
청명이 입맛을 다시며 젓가락을 들었다.
옛일 따위야 당장 식탁에 놓인 진미만 못한 것 아니겠는가? 소홍주 한 잔을 쭉 들이켜고 냉채를 집어 먹으니 극락이 따로 없다.
'여기가 선계지.'
우화등선은 얼어 죽을.
사형들 나는 안 갈랍니다. 거기서 행복하게들 사시오.
그때 문이 열리더니 일련의 무리들이 들어섰다.
"어서오십시오오오!"
점소이가 부리나케 문 쪽으로 달려간다.
안으로 들어온 이들은 모두 사남이녀의 청년들이었다.
'아니 청년이라기에는 좀 삭았나?'
남자들은 이립 정도는 된 것 같고, 여자들은 그보다는 확실히 어려 보이기는 했지만……. 여하튼 청명이 보기에는 핏덩어리들이다.
안으로 들어온 이들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청명의 옆 탁자를 차지하고 앉았다. 청명은 그들에게 신경 쓰지 않고 부지런히 젓가락을 놀렸다.
"간만에 음식다운 음식을 먹겠군."
"이제 벽곡단은 물려서 더 못 먹겠어요, 사형."
"그래서 여길 오지 않았는가? 하루빨리 산에 올라 사숙들께 인사를 드리는 게 우선이긴 하지만, 이 정도는 그분들도 이해해 주실 걸세."
사형? 사숙?
청명이 고개를 살짝 들고 등짐을 내려놓는 이들을 흘끔 보았다. 그러고 보니 모두 검은 무복을 입고 있다. 그리고 그 가슴팍에는 화산을 상징하는 매화가 수놓여 있었다.
'백자 배인가?'
매화가 수놓인 무복을 입었으니 화산의 문도고, 청명이 본 적이 없으니 백자 배가 맞을 것이다. 나이대도 딱 그 정도고.
청명이 고개를 푹 숙였다.
지은 죄는 없지만,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다. 괜히 엮이기도 싫고. 다행히 지금은 평상복을 입었으니, 얽혀 들지만 않으면 문제는 없을 것이다.
'밥도 제대로 못 먹게 하네. 에잉. 빨리 먹고 나가야지.'
후학을 만난 기쁨 같은 게 있을 리가 없다.
어차피 이놈도 골치 아프고, 저놈도 골치 아프다. 최대한 엮이지 않는 게 최선이다.
"그런데 유 사매는?"
"화산으로 먼저 올라간 것 같아요."
"화음에서 만나기로 하지 않았던가?"
"유 사매가 언제 말 듣는 경우가 있어요?"
"흐음. 그럼 사부님들께서도 우리가 온 줄 아셨겠군."
"괜찮아요. 유 사매가 유별난 건 다들 아시니까."
"그럼 다행이지."
가운데에 앉은 청년이 점소이를 불러 간단한 주문을 마쳤다. 그리고 술을 시켜 사형제들의 잔에 채웠다.
'저저.'
청명이 눈을 찌푸렸다.
'이제 겨우 이대제자 놈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화음의 한가운데서 술판이라니. 문파가 거꾸로 돌아가도 유분수지!'
여하튼 요즘 것들은!
응?
나?
에이. 나는 경우가 다르지. 내가 나이가 백에 가까운데…….
넘어가, 넘어가.
"다들 고생 많았다. 힘든 수련을 잘 이겨 냈어."
"사형만큼 고생한 사람이 또 있겠습니까? 저희는 그저 사형을 따른 것뿐입니다."
"맞아요. 사형이 제일 고생하셨죠."
가운데 앉은 훤칠한 청년이 빙그레 웃는다.
'잘생겼네?'
남자인 청명이 봐도 훈훈함이 느껴지는 외모다. 거기에 흑색의 무복까지 입혀 놓으니 그림이 잡힌다.
뭐랄까. 이야기 속에 나오는 전설의 협사 같은 분위기라고 해야 할까?
"함께 수련한 이들 중에서 너희가 가장 노력했다는 건,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 술은 내가 개인적으로 사는 것이니, 부담 가지지 말고 마음껏 마시도록 해."
"감사합니다. 사형."
"대신 너무 취하지는 말고. 저녁에는 화산에 올라야 하니까 말이야."
"물론이죠."
웃음소리가 짤랑짤랑 올라온다.
그러니까 수련을 마치고 복귀하는 와중에, 화음에 들른 김에 한잔하는 모양이다. 아마도 저 사형이라고 불리는 놈이 백자 배의 대제자이고, 남은 이들은 백자 배의 실세들이겠지.
그렇지 않고서는 다른 사형제들이 볼지도 모르는 곳에서 이리 당당하게 술을 마실 수는 없을 테니까.
'문파 꼴 잘 돌아간다.'
청명이 콧김을 살짝 뿜었다.
그가 이대제자일 때는 그들끼리 술을 마신다는 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참회동에 처박혀서 일주일은 벽만 보고 검을 휘둘러야 했을 것이다.
그러니 청명이 숨어서 술을 마셨지!
응?
어. 마시긴 마셨지. 에이, 그걸 어떻게 안 먹나?
근데 나는 근본 있게, 숨어서 술을 먹었단 말이지! 저렇게 대놓고가 아니라!
청명이 생각을 알 리 없는 이들이 잔을 부딪치며 술을 나누기 시작했다. 금세 안주가 나오고 식탁이 채워지자 분위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그냥 빨리 먹고 가자.'
왁자지껄해진 가운데 청명은 재빠르게 젓가락을 놀렸다. 그리고 소홍주 한 잔을 깔끔하게 털어 넣는 순간, 그의 귓가에 무시할 수 없는 말이 파고들었다.
"백천 사형."
"말하게. 사제."
"이만큼 고생을 했으니 화종지회에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겠죠?"
백천이라 불린 이가 팔짱을 끼더니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으음."
"그렇겠죠, 사형?"
"사제. 솔직히 나는 모르겠네. 하지만 내가 아는 것 한 가지는 있지."
"그게 뭡니까?"
"노력은 절대 사람을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
백천의 눈이 맑은 정광을 흘렸다.
"우리는 노력할 만큼 했네. 그 힘든 수련을 이겨 냈고, 스스로를 끊임없이 채찍질했지. 설사 우리가 승리하지 못한다고 해도 우리가 그 시간 동안 많이 나아간 것은 사실 아닌가?"
"그렇습니다. 사형."
"승패에 목을 매지 말게. 우리는 긴 승부를 하고 있는 걸세. 당장의 승부에 눈을 빼앗긴다면 먼 미래를 잃을 수도 있어."
"아…….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하지만 나도 이기고는 싶군."
백천이 부드럽게 웃는다. 잘생긴 얼굴에 미소가 지어지자 주변이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이대제자들이 다들 신뢰가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뒤에 썩은 얼굴을 한 이도 하나 있었다.
'입에 기름 발랐나.'
청명이 영 메슥거린다는 얼굴로 소홍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청명은 저런 입바른 소리가 체질적으로 맞지 않다.
'이게 뭔가 사형들이랑도 다른 것 같은데.'
고리타분한 소리를 늘어놓는 건 사형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이건 뭔가 좀 다르다. 그렇다고 뭘 잘못한 것도 아닌데…….
"그럼 우리 실력은 어느 정도나 됐을까요? 이제 그 종남의 제자들과 맞서 싸울 수 있겠습니까?"
"글쎄."
백천이 침중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종남은 강하다. 명실상부한 구파일방이 아니더냐?"
"예. 그렇지요."
"과거에는 우리 역시 구파의 일원이었다지만, 솔직히 지금 종남과 우리는 서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차이가 벌어졌다."
백천의 말에 모두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건 명성일 뿐이다."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 백천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진다.
"명성과 실력은 꼭 비례하는 게 아니지. 지난 화종지회에서 우리가 패하기는 했지만, 그 차이가 크지는 않았다. 그 시간 동안 우리는 밤잠을 줄여 가며 수련에 매진하지 않았더냐? 이제는 종남과도 충분히 자웅을 겨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종남과 말입니까?"
"종남은 어디 처음부터 종남이었더냐? 화산은 어디 처음부터 화산이었느냐?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쉼 없이 정진할 수 있다면 우리의 대에 종남을 넘어 천하를 바라보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힘이 담긴 목소리와 의지견정한 눈빛. 확실히 사람의 마음을 끌어들이는 모습이었다.
다들 감동한 눈으로 백천을 바라보려는 순간이었다.
"풉!"
뒤쪽에서 낮은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탁자에 앉아 있던 여섯 사람의 고개가 일제히 한쪽으로 돌아간다.
"어……."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는 걸 깨달은 청명이 어색한 얼굴로 입을 가렸다.
'헐, 나도 모르게.'
너무 황당한 소리를 들었더니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청명은 평소처럼 빠르게 돌파구를 떠올렸다.
'자연스럽게 넘겨 보자.'
그리고 격렬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푸ㅤㅎㅜㅂ! 풉! 아이고! 기침이! 사레가 들었나? 푸우우웃!"
"……."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보며 청명이 눈을 찌푸렸다.
'왜 안 속지? 연기는 완벽한데?'
좀 더 격렬하게 기침을…….
"소형제."
"네?"
백천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난다. 그러더니 청명을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소형제는 누구신가? 화음에서는 본 적이 없는 얼굴 같은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가문과 이름을 물어도 되겠는가?"
"……."
이거 망한 것 같은데?
그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