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화산이 뭔가 달라진 것 같은데. (2)
"쯧. 손이 많이 가네."
청명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로 산을 올랐다.
"이렇게 더뎌서야."
청명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는 전생에서도 제자를 키워 본 적이 없다.
청명을 어떻게든 굴려 먹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던 청문 사형조차도 차마 그에게 제자를 키우라고 하지 못했다.
청명의 검술이 후대로 전해지지 못하면 어찌하느냐고 걱정하던 사제들에게 청문 사형은 이리 말했다.
- 나 역시 그게 걱정은 된다. 하나, 나도 사람인지라 도저히 저놈 밑에 제자를 들일 수가 없다. 인두겁을 쓴 사람이라면 차마 할 수 없는 짓이다. 저놈의 제자로 들어가는 아이들이 대체 무슨 죄를 지어서 그런 벌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더냐? 너희가 정녕 도를 닦는 도인이라면, 그런 험한 말은 입에 담는 게 아니다.
그 이후로 사제들은 단 한 번도 청명에게 제자를 받으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생각하니 기분 나쁘네. 이 새끼들?'
내가 뭐 어때서! 이렇게 잘만 키우고 있구만!
물론 더럽게 손이 많이 가기는 한다.
청명의 삼대제자를 키우는 것은 다 큰 성인이 아이를 붙들고 걸음마를 가르치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다른 것이 있다면 한 가지. 아이는 놔두면 알아서 걸음마를 하지만, 저놈들은 발을 잡고 한 발씩 떼 줘야 비로소 걸음마가 뭔지 겨우 이해한다는 점이다.
"끄으응. 앓느니 죽어야지."
그러다 보니 시간이 예상보다 더 소요가 되었고, 시간이 소요되다 보니 수련할 시간이 부족해졌다. 이제는 수련을 할 시간을 만들기 위해 숫제 잠을 거의 포기해야 할 지경이다.
청명이 한숨을 푹 내쉬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장문사형. 제가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그냥 저 혼자 북 치고 장구까지 치는 게 편한데."
- 그럼 그러든가.
"에이, 진짜!"
청명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 역시 화산의 영화를 되찾는 건, 혼자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화산의 이름을 날리는 것?
그 정도는 혼자서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청명이 영원히 살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자신이 죽으면 사라질 영화 같은 건 필요 없다.
지금 청명이 만들어야 할 것은, 그가 없어져도 이어질 화산의 정신이다.
영화는 꽃잎처럼 화려하지만 금세 지고, 정신은 뿌리처럼 드러나지 않지만 나무를 살아가게 해 준다.
"알고는 있는데……."
어디 그게 말처럼 쉬울 리가 있나?
청명이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생각을 정리하며 산을 오르다 보니 어느새 낙안봉에 도착했다. 청명의 시선이 주변을 빠르게 훑는다.
'그때 그 여자는 안 오겠지?'
지금 시간이 축시 초다. 모두 잠자리에 들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아무리 수련에 미쳤다고 해도 이 시간에 산문을 벗어나 수련을 하러 오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그날은 더 늦은 시간에 마주쳤지만, 그때는 그녀가 화산에 복귀한 날이었으니까.
"없지?"
주변을 샅샅이 살핀 청명이 허리에 찬 목검을 들어 올렸다.
가만히 검을 뻗어 상단세를 취한 그의 눈이 천천히 가라앉는다. 아이들을 가르칠 때의 장난기 어린 눈빛은 사라지고, 검으로 수없는 전장을 헤쳐 온 검수의 눈빛이 그 자릴 대신한다.
'예전의 나를 되찾는다?'
아니. 그것만으론 안 된다.
청명은 모든 토대를 부쉈다. 그가 전생에 쌓아 올렸던 내력을 부정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내력을 채워 넣었다.
더 나아가기 위해서.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내력은 바꿨지만, 검은 바꾸지 못했다. 검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의 검은 그저 더 강맹해질 뿐이다.
조금 더 강맹해지고, 조금 더 빨라지고. 그래서야 아무것도 바뀌는 게 없다.
'나는 천마를 이겼는가?'
아니다.
천마가 대산에 오른 이들의 합공 끝에 기력을 쇠진하지 않았더라면, 청명은 절대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화산제일검이니, 천하제일검이니 떠들어 댔지만, 천마 단 한 사람도 홀로 이기지 못한 패배자가 바로 청명이다.
'내가 홀로 천마를 이길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아무도 죽지 않았겠지.
장문사형도 사제들도 모두 멀쩡히 돌아와 화산을 지켰을 것이다. 장문사형이 청명을 쫓아다니고, 사제들이 몰래 사형에게 이르는 평화로운 일상이 이어졌겠지.
대산에서 모두가 죽은 것도, 화산이 몰락한 것도 모두 청명이 강했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후회?
그런 게 아니다.
이미 지나간 일을 붙들고 통곡하는 취미는 없다. 문제는 앞으로다.
'천마와 같은 이가 다시 나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는가?'
어쩌면 천마보다 더 끔찍한 자가 다시 강호를 노릴지도 모른다.
그 모든 위기에서 화산을 지켜 내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한다. 세상 그 누구보다, 과거의 청명보다, 그리고 그 천마보다 더!
그러기 위해서는…….
청명의 검은 과거 거의 완벽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천마를 당해 낼 수 없었다.
'왜?'
검을 더 갈고닦지 않았기 때문에?
아니다.
"호랑이가 아무리 발톱을 날카롭게 간다고 해도 하늘을 나는 새를 잡을 수는 없는 법."
한계를 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천마의 무학은 그가 옳다고 믿던 모든 것을 부숴 놓았다. 그저 선인이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가는 것만으로 끝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던 청명을 비웃듯이 말이다.
바닥에 발을 붙인 이가 하늘의 날짐승을 바라보듯, 결코 닿을 수 없는 그 경지를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천마를 뛰어넘고 싶다면, 일단 과거의 자신을 뛰어넘어 하늘을 날아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청명의 눈이 가라앉았다.
'버린다.'
하지만 버리지 않는다.
비워야 채울 수 있다. 하나 청명은 다시 태어나면서 이미 모든 것을 비웠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채워야 한다.
그럼 무엇을 채울 것인가?
화산의 것? 아니면 청명의 것? 그것도 아니면……?
"뭐든 상관없겠지."
청명의 검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화산의 것을 지킨다? 화산의 모든 것을 버린다? 그게 아니면 청명의 것을?
- 다 집착이다.
그렇죠. 사형.
채우는 것이 자연스럽다면, 버리는 것도 자연스러운 법. 굳이 무엇을 채우고 무엇을 버릴 것인지 애써 고민하고 정할 필요는 없다.
보라.
검은 제 알아 흐르지 않는가?
한계를 긋지 않는다.
무엇을 취하고 버릴 것인가를 정해 버리는 순간 검은 스스로가 만들어 낸 한계에 갇히기 마련이다. 그저 내버려 둔다. 검이 가고 싶은 대로. 그리고 청명이 원하는 대로.
청명의 검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그와 동시에 하늘에 매화가 한 송이 한 송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화산의 매화이기는 하나, 지금까지 청명이 그려내던 것과는 달랐다.
조금 더 생기 있고, 조금 더 온화하다.
뻗어 나가고 흩날린 뒤, 내려앉는다.
동(動)에서 정(靜)으로 그리고 다시 동(動)으로.
검 끝에서 시작한 매화가 흐드러지게 피어난다. 이내 낙안봉을 모두 덮을 정도로 피어난 순백의 꽃이 늦은 밤에 봄을 불러왔다.
부드럽고 쾌속하고 현란하고 아름답게.
하나 그 매화는 얼마 가지 못해 쓸쓸히 지고 만다.
모든 것이 환상이었던 듯 다시 고요해진 낙안봉에서, 검을 늘어뜨린 청명만이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뭔가 잡힐 듯도 한데.'
싹을 틔우지는 못했다. 하지만 실마리는 잡은 느낌이다.
화산의 검이되 이제까지의 화산의 검을 초월하는 청명만의 검.
그의 한계를 넘고, 화산의 한계까지 넘어 새로운 곳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검.
"후우우우."
청명이 낮게 탄식을 토한다.
'쉬울 리가 없지.'
새로운 검법을 창안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는 일이다. 아직은 청명에게조차 요원한 일이다. 청명의 내력이 그와 함께 성장하는 것처럼, 이 검 역시 함께 성장할 것이다.
지금은 그저 매화 봉우리(梅花芽)에 불과하다.
하지만 언젠가는…….
"저……."
"히익!"
갑자기 옆에서 들려온 소리에 청명이 식겁하여 옆으로 푸드득 물러났다.
"와, 씨바! 뭐야!"
어느새 낙안봉에 다른 누군가가 함께 서 있었다. 기겁을 한 청명이 눈을 끔벅이며 그 사람의 정체를 확인했다.
'……저번에 그 여자잖아?'
유……. 유……. 유 뭐였지?
아, 맞다! 유이설! 그런 이름이었지.
유이설이 미묘한 시선으로 청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살짝 풀린 듯한 눈으로 말이다.
'아니, 그런데 쟤는 어떻게 내 이목을 벗어나서 여기까지 다가올 수 있는 거지?'
아무리 무아(無我)의 경지로 검을 펼쳤다지만, 청명이 괜히 청명인가. 무아지경 속에서도 주변 십여 장 내의 기척은 손으로 잡듯 느낄 수 있는 게 청명이다.
그런데 저번에 그의 기척을 들킨 것도 그렇고 지금 그의 곁으로 아무 문제없이 다가온 것도 그렇고, 이 여자 뭔가 좀 이상한데?
'아니, 뭔 자객술이라도 익혔나! 어떻게 기척이 안 잡혀?'
그러고 보니 바로 앞에 있는데도 존재감이 묘하게 희미하다. 일부러 의식해서 느끼려고 하면 잘 느껴지지가 않는다.
눈으로 사람을 보고, 귀로 인기척을 듣는 이라면 별문제가 없겠지만, 오감(五感)보다 기감(氣感)에 더 익숙한 청명이다 보니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유이설을 보며 청명은 치열하게 고민했다.
'이거 어떻게 수습하지? 어디까지 봤을까?'
일단은 얼버무려 보…….
그때 유이설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매화……."
다 봤네.
썩을.
그녀의 고개가 살짝 옆으로 갸우뚱한다. 자신이 본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이다.
그래, 그래.
계속 이해하지 마라.
청명이 빙그레 웃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당황했겠지만, 청명이 누구인가? 화산 역사상 다시없을 사고뭉치다.
청문 사형이 평하기를, 화산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청명이 입문하기 전까지 벌어졌던 사고보다, 청명이 입문해서 친 사고가 더 많을 거라 하지 않았던가!
그런 청명에게 이런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일단은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유이설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사고. 강녕하셨습니까?"
청명이 한 발 다가서자 유이설이 움찔한다.
응? 왜 움찔?
유이설이 살짝 심각해진 눈으로 청명을 바라본다.
"살인멸구?"
"미쳤나, 이게?"
"……."
아…….
자연스럽게는 물 건너갔네.
자신도 모르게 쌍욕을 해 버린 청명이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다른 백자 배는 아직 화산으로 오고 있다는데, 이 여자는 왜 미리 와서 사람을 이렇게 귀찮게 한단 말인가?
이제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청명이 손을 흔들고는 재빠르게 낙안봉을 벗어났다.
"그럼 저는 이만!"
"아…… 잠시!"
그를 잡으려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청명은 깔끔하게 무시했다. 말로 변명할 수 없을 때는 무조건 회피하는 게 최고다.
유이설의 손이 청명의 등을 향해 뻗어졌다 천천히 내려앉는다.
"매화……."
그녀는 멍한 눈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살짝 주먹을 쥐었다.
"식겁했네!"
이건 명백히 청명의 실수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들켰다 해도 딱히 달라질 것 없다. 그녀가 본 것을 모두에게 말한다 한들 아무도 믿지 않을 테니까.
다만 이제부터는 조심해야 한다. 목격자가 한 명이면 목격자가 정신 나갔다는 소리를 듣지만, 목격자가 세 명만 되어도 호랑이를 소환할 수 있으니까.
'백자 배들이 돌아오면 수련하는 것도 조심해야겠어.'
아…….
수련만이 아니지?
청명이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백자 배가 오기 전에 할 일이 있군!"
그가 빠른 걸음으로 산문을 향해 내려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