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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71화 (72/1,567)

71화. 화산이 뭔가 달라진 것 같은데. (1)

쇄애애액!

운검이 절도 있게 검을 회수했다.

그의 이마에 땀이 한 방울 흘러내린다.

'좋은 검이로군.'

확실히 이 칠매검은 지금까지 그들이 화산에서 익혀 온 검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천하의 절기라고는 할 수 없지만, 검에서 현기가 묻어난다.

이 검을 능숙하게 펼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지금까지 익힌 것만으로도 칠매검이 다른 화산의 검보다 한 차원 위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에는 충분했다.

'이 검을 제대로 전수할 수 있다면 화산은 더 강해질 것이다.'

당대도 강해지겠지만, 후대는 더욱 강해질 것이다.

그리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운검은 자꾸만 피어나는 미소를 억누르기 힘들었다.

"크흠."

운검이 얼른 손으로 입가를 주무른다.

"이거 영 곤란하군."

그래도 스승이란 제자들에게 엄하게 보여야 하는 법인데, 요즘은 자꾸 헤실헤실 웃음이 나온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삼대제자들이 화산에서 겪은 고난은 고난이라 할 수도 없다. 입산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일대제자들이 겪은 고난이야 오죽했겠는가?

그들은 한창 피어날 청춘을 모조리 화산에 바쳤다. 쓰러져 가는 문파를 어깨에 이고 고난을 뛰어넘고, 고통을 헤쳐 나갔다. 그 길고 긴 암흑의 시절 끝에 이제야 겨우 빛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은 광명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제 겨우 빛을 보기 시작한 정도다. 아직은 갈 길이 멀다는 걸 운검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미소를 지울 수 없는 것은, 최근 들어 기이할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한 삼대제자들 덕분이었다.

사숙들과 사형제들은 화산의 재정이 나아지고 과거의 무학을 되찾았다는 사실에서 더없는 기쁨을 느끼는 모양이지만, 운검은 다르다.

백매관의 관주인 그에게는 제자들의 성장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고, 또한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그 아이들은 우리와는 다르다.'

작금의 일대제자들 역시 노력했지만, 안타깝게도 화산의 사정이 무학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지 못했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해 그들 역시 무학에 대한 열정이 그리 뛰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삼대제자들은 지금까지의 그어떤 화산의 제자들보다 열정적으로 수련에 전념하고 있다.

"흠."

기분 좋은 콧소리를 낸 운검이 검을 허리에 차고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연무장을 나섰다. 이제 아이들을 수련시킬 시간이다.

그의 머릿속은 즐거운 상상으로 가득했다.

이제는 더 이상 궁핍하지 않은 화산의 환경과 새로운 무학, 거기에 삼대제자들의 열정이 합쳐진다면 화산이 화려하게 부활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었다.

그리고 그 주역은 삼대제자들이 되리라.

"그리되도록 내가 더 열심히 해야겠지!"

노력하는 제자들을 이끌어 주지 못한다면 어찌 스승이라 하겠는가?

모퉁이를 돌아 연무장으로 들어서는 운검이 얼굴을 환히 피며 소리쳤다.

"자, 오늘도 열심히 해……. 이게 뭐야, 미친!"

운검이 기겁을 하여 뒤로 물러났다.

그의 눈앞에, 그야말로 아비규환이 펼쳐져 있었다.

"끄으으으으……. 팔…… 내 팔이!"

"허, 허리가……. 허리가 부러진다……. 허리가!"

"사, 살려 줘. 살려……."

운검이 자신도 모르게 눈을 비볐다.

꿈과 희망이 가득 차 미래에 대한 열정으로 불타올라야 할 연무장에 이게 웬 지옥도라는 말인가?

삼대제자들은 하나같이 목검을 잡은 채 바닥에 널브러져 끙끙대고 있었다. 부르르 경련하는 어깨와 입에서 질질 흘러나오는 침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이게 대체……."

그 순간 운검의 귀에 아직 생기가 남아 있는 소리가 들려왔다.

"후우우우웁!"

운검의 고개가 획 돌아간다. 상의를 탈의한 채 목검으로 내려치기를 하고 있는 조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조, 조걸……."

"후우우욱! 후우우우우우욱! 후으으으으으으아아아아!"

전신에서 땀이 비처럼 쏟아진다. 한 번 검을 내리칠 때마다 땀이 사방으로 비산하고, 입에선 더운 숨이 훅훅 뿜어져 나왔다.

핏발이 선 눈과 파들파들 떨리는 어깨가 그가 지금 얼마나 힘겨운지를 말해 준다. 잠깐 그 모습을 본 운검마저 어깨가 뻐근하고 다리가 후들거리는 느낌이다.

"자아, 하나 더."

운검의 시선이 옆으로 살짝 돌아간다.

'저건 또 뭐야?'

조걸의 옆에서 청명이 느긋하게 검을 잡고 있다. 옆에서 땀을 비처럼 쏟아내는 조걸과는 달리 청명의 모습은 산뜻하기 짝이 없다.

의관은 깔끔하게 정제되어 있고 빗어 넘긴 머리는 단 한 올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는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사형제들과는 달리 느긋한 얼굴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냥 휘두른다고 끝이 아니라니까? 한 번을 휘두르더라도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모든 힘을 짜내서 검을 싣는다고 생각하라고! 한 번 더!"

운검의 머릿속에 수레바퀴가 끼익대며 구르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머리가 덜컥대는 느낌이다.

저게 뭔 상황이지?

청명은 삼대제자 중에서도 막내가 아니던가? 그런데 왜 청명이 조걸을 가르치고 있지?

그 와중에 하는 말은 다 맞는다는 게 더 문제였다.

"자, 하나만……."

"크아아아악!"

결국은 버티지 못한 조걸이 바닥에 철푸덕 엎어져 꿈틀댄다. 그 광경을 보며 청명이 혀를 찼다.

"쯧쯧쯧. 사람이 그렇게 대가 약해서야."

청명이 푹푹 한숨을 내쉰다.

"그냥 몸을 혹사시키는 거야 소도 한다. 머리를 쓰라고 머리를! 어떻게 휘둘러야 검에 모든 힘을 담을 수 있을지 생각하고 휘두르란 말이야!"

얼씨구?

운검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다른 사형제들은 모르지만, 운검은 청명이 삼대제자들을 휘어잡고 있다는 걸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세상에는 종종 나이를 뛰어넘는 수재가 나타나기 마련이 아닌가?

하지만 지금 청명이 말하고 있는 건 단순히 재능이 뛰어나고, 능력이 있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저 아이가 무학에 대한 이해까지 높다는 말인가?'

보면 볼수록 신기한 일이다.

퍼뜩 상념에서 깨어난 운검이 머리를 흔들었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이게 무슨 일들이냐!"

운검이 소리를 치자 청명이 고개를 획 돌렸다.

"아이고 관주님!"

그리고는 운검에게 쪼르르 달려온다.

"간밤에 강녕하셨습니까?"

그 광경을 보며 삼대제자들이 이를 뿌득뿌득 간다.

'저 가증스러운 새끼!'

'황궁에 들어갔으면 간신으로 역사에 길이길이 남았을 놈!'

'바늘로 찌르면 바늘이 휘어질 인간 말종 같으니!'

평소에는 예의와는 담을 쌓고 살던 놈이 운검에게만 저리 깍듯하니 속이 뒤집어지지 않을 도리가 있는가?

특히나 가장 큰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조걸과 윤종은 숫제 해탈한 얼굴로 청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어찌된 일이더냐?"

"수련을 하고 있었습니다."

"수련? 이게?"

아니, 수련은 수련이겠지. 조걸이 검을 휘두르는 것을 두 눈으로 봤으니까. 하지만 그 결과라는 게…….

"끄으으응."

"과, 관주님……."

"너…무 힘듭니다. 죽을 것 같…습니다……."

삼대제자들이 비 맞은 강아지 꼴로 스승을 바라본다. 그 시선에 울컥한 운검은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수련이라는 것은 몸을 단련하고 경지를 높이기 위한 과정의 일환이다. 너무 과하면 오히려 독이 됨을 모르느냐? 그리고 너는……."

"알고 있습니다, 관주님."

"응?"

자신의 말을 자르고 들어온 청명의 목소리에 운검이 살짝 눈을 가늘게 떴다. 적절한 대답으로 이어질 말을 잘라 버린 것 같지 않은가?

"하지만 이 수련은 제가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사형들께서 이번에는 절대 화종지회에서 망신을 당하지 않으시겠다고……."

"……화, 화종지회?"

그렇지. 화종지회가 멀지 않았지. 그건 그렇다만…….

"사형들께서 저번 화종지회의 치욕을 되새기며 워낙 분루를 삼키시는지라……."

분루?

운검이 슬쩍 고개를 돌려 삼대제자들을 바라보았다.

청명의 뒤에서 아이들이 필사적으로 손을 내젓는다. 그 꼴을 보고 있으니 뭔가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운검이었다.

"저 아이들은 그리 보이지 않는데?"

"에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사숙조님! 그 종남의 잡것들에게 얻어맞고도 아무렇지도 않다면 어찌 대 화산의 제자라 자부할 수 있겠습니까! 화산의 자존심이 있지!"

어?

그건 또 맞는 말인데?

"한 번은 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두 번 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대 화산파의 제자가 종남 따위에 진다니요."

"……그렇지."

운검의 머릿속에 혼란이 자리하기 시작했다.

그가 세상에서 가장 중시하는 것이 딱 두 개가 있다. 하나는 화산에 대한 자부심이고, 다른 하나는 제자들을 올바르게 키워 내는 것이다.

지금 그 두 가지 문제가 머릿속에서 서로 삿대질을 해 대며 싸우기 시작한다.

그런 운검의 눈빛을 읽은 청명이 슬쩍 그에게로 다가가 낮게 속삭였다.

"생각해 보십시오. 관주님. 화산의 명예를 드높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형들이 강해져서 그놈들의 콧대를 꺾어놓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야……."

"그러면 장로님들께서도 사숙조의 노고를 치하하시겠지요."

'이 간신배 같은 놈이.'

청명이 그를 살살 꼬시고 있다는 걸 모를 운검이 아니었다. 하지만 귀에 들려오는 말은 너무도 달콤하다. 노고를 치하하고 어쩌고는 관심 없다만 그 종남을 이긴다는 게…….

"가능하리라 보느냐?"

운검이 자신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그 말에는 아주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운검의 질문을 들은 청명이 씨익 하고 웃는다.

"저 청명입니다."

"……."

운검이 가만히 청명을 바라보다가 헛기침을 했다.

그러고 보면 이 아이들을 바꾼 건 다름 아닌 청명이다. 타성에 젖어 있던 아이들이 청명을 만난 뒤로 고작 몇 달 만에 바뀌지 않았던가?

어쩌면 지금은 검 하나를 더 배우는 것보다 이런 과정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제아무리 운검이라고 해도 지금부터 이들을 가르쳐서 종남의 제자들을 이기게 만드는 건 불가능하니까.

'이번 한 번만 더…….'

운검이 모두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제자들은 듣거라."

"예! 관주님!"

삼대제자들이 애처로운 눈빛으로 운검을 주목했다. 그야말로 마지막 희망이…….

"너희가 이리 열정을 보이니 내 뿌듯하기 이를 데가 없다. 본래대로라면 너희를 수련시키는 것은 내 몫이지만, 너희가 이리 자발적으로 수련을 하는 걸 방해하는 것도 옳은 일은 아니겠지."

……무너지네?

어? 희망이 무너져?

"화종지회가 열릴 때까지 수련은 자율에 맡기겠다. 그동안에는 굳이 연무장에 나오지 않아도 좋다. 다만 몸이 상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관주님?

……이게 아닌데? 예? 관주님?

"크흠. 그럼 계속하거라."

운검이 몸을 획 돌린다.

몇몇 삼대제자가 자신도 모르게 앞으로 손을 쭉 뻗었다가 청명의 눈빛을 보고는 천천히 접어 내렸다.

이윽고 운검이 수련장에서 완전히 멀어지자, 청명이 몸을 빙글 돌리더니 고개를 삐딱하게 꺾었다.

"아까 관주님한테 힘들다고 한 사람 나와."

"……."

"빨리."

"……."

허리춤에 찬 목검을 빼 드는 청명을 보며 삼대제자들의 눈빛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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