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걱정하지 마! 내가 이기게 해 줄 테니까! (5)
땀이 폭포처럼 쏟아진다.
"후……."
죽지 않았다는 것을 실감한 순간 전신이 삶의 증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얼마나 땀이 흐르는지, 눈을 뜨기가 어려울 정도다.
이내 몸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한 치만 더 깊었으면?'
아니, 한 치까지도 필요 없다. 정말 검이 조금만 더 아래에서 멈췄다면 지금 조걸은 머리가 반으로 쪼개진 시체가 되었을 것이다.
"이……. 어……. 어어."
욕을 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는다. 덜덜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청명이 그런 조걸을 보며 피식 웃었다.
"어때?"
"……뭘?"
"어떠냐고?"
"……."
뭘 어떻긴 어때?
평소라면 대답할 말을 찾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조걸에게는 그럴 만한 정신이 남아 있지 않았다.
"죽어 본 느낌이?"
"이……."
조걸이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낸다.
"망아지 같은 새끼……."
"낄낄낄낄."
욕을 들어 먹고도 청명은 전혀 기분 나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야 당연한 일이다. 지금 조걸은 지옥의 문턱에 발을 들였다가 돌아온 심정일 테니까. 검을 들 힘이 남아 있었다면 청명을 죽이겠다고 달려들었을 것이다.
"자, 사형은 좀 쉬고 있고."
청명이 경쾌하게 빙글 몸을 돌렸다. 그리고 질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다른 사형제들에게로 시선을 옮긴다.
움찔.
눈이 마주친 사형제들이 다들 슬그머니 시선을 내리깐다.
"사형들, 사형들. 잘 생각해 봐."
"……."
"그런다고 안 맞을 수 있을까?"
'저 악마 같은 새끼.'
'어쩌다가 화산에 저런 인간 말종이 들어와서는.'
'저게 도인이라는 놈이 할 말인가?'
청명이 하는 꼴은 본다면 태상노군도 쌍욕을 도경 외듯 쏟아낼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자. 쓸데없이 시간 끌지 말고 나다 싶으면 나옵시다. 네? 대사형?"
"……."
윤종이 떨떠름한 시선으로 청명을 보다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종학이가 나가 보는 건 어떻까?"
"예? 사형. 사형을 부른 것 같은데."
"그래서 안 나가겠다고?"
윤종이 눈을 부라리자 종학이 고개를 푹 숙였다.
'인간들이 하나같이 이상해져 가지고는.'
그래도 예전의 윤종에게는 대사형다운 위엄이라는 게 있었는데, 청명이 온 이후로는 확실히 뭔가 이상해졌다. 하기야 이상해진 사람이 어디 윤종뿐이겠냐마는.
"안 나가?"
"……."
사형제들이 실랑이를 하는 모습을 본 청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안타까운 일이로다. 서로 돕고 살아야 할 사형제들이 이토록 이전투구를 벌이다니."
'그게 누구 때문인데, 인마!'
'양심은 시전에 팔아먹었나!'
'너만 없으면 화목해! 너만 없으면!'
처절한 외침들은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런 그들을 보며 청명이 걱정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본디 사형제들이 단합하는 방법은 하나지. 다들 같은 고생을 하면서 구르다 보면 형제애가 절로 피어나는 법. 걱정하지 마. 내가 공평하게 처리해 줄 테니까."
뭘?
청명이 검을 들어 올렸다.
"안 오면 내가 가면 되지. 간다!"
하지 마! 이 미친놈아!
모두가 경악하건 말건, 청명이 광소를 흘리며 삼대제자들에게 달려들었다. 기겁을 한 삼대제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지만, 청명은 양떼를 쫓는 늑대처럼 사형제들을 쫓았다.
"이리 안 와?"
"너 같으면 가겠냐! 이 미친놈아아아아!"
비명을 지르던 윤종이 자신의 머리로 떨어지는 칼을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으……."
"흐아……."
연무장에 널브러진 삼대제자들이 하나같이 넋이 나간 눈으로 몸을 덜덜 떨었다.
"아이고. 어머니……."
"아버지, 착하게 살게요……."
"침상 밑에…… 육포 숨겨 놨는데."
"지금 그런 게 생각이 나냐? 지금?"
청명이 널브러진 사형제들을 보며 혀를 찼다.
"뭐 대단한 거 했다고."
평소라면 발끈이라도 했겠지만, 지금의 삼대제자들에게는 대거리할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자신의 머리를 향해 떨어지는 진검을 보는 경험은, 죽으면 죽었지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다.
윤종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눈가로 흘러내리는 땀을 훔쳤다.
'저 망나니 같은 놈이…….'
지금까지 청명에게 수도 없이 당한 윤종이지만, 이건 경우가 좀 다르다. 정말 저승 문턱에 발을 밀어 넣었다가 간신히 빠져나온 느낌이다.
청명이 모두를 보며 입을 열었다.
"어때?"
"……뭐가?"
그나마 가장 처음 당해서 정신을 좀 차린 조걸이 힘겹게 대답을 했다.
"왜 못 막았지?"
"……어?"
"뻔한 내려치기잖아. 왜 못 막았어?"
그 말을 하려고 이 짓거리를 했다는 말인가?
조걸이 울컥하여 소리쳤다.
"그야 빠르니까! 생각하고 막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강하니까 못 막는 거지. 그거야 세 살짜리 어린애도 알 일 아니냐고!"
"그래?"
청명이 만족스럽다는 듯 씩 웃는다.
"잘 아네."
"이……."
조걸이 이를 갈았다.
"그런데 왜 사형들은 그렇게 안 해?"
"어?"
조걸이 멍한 눈으로 청명을 바라본다. 그가 막 반박할 말을 꺼내려는 순간 청명이 검을 들어 아래로 내리친다.
파아아아아앙!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흙먼지가 솟구친다.
"간단하지?"
"……."
조걸뿐만이 아니다.
이제는 다른 사형제들도 몸을 일으켜 청명의 검을 보고 있었다.
"……내가 본 검이 이거라고?"
"응."
"몇 배는 빨랐던 것 같은데? 살살 한 거 아냐?"
"똑같아. 내 머리로 떨어지는 검과 옆에서 지켜보는 검이 같을 수는 없는 법이지."
"……."
조걸은 나름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청명이 하는 말이 뭘 의미하는지 금세 이해할 수 있었다.
"나도 할 수 있다는 말이냐?"
"충분하지."
청명이 검을 들어 올렸다.
"봐."
그리고 다시 내려친다.
파아아아앙!
조걸은 그 모습을 단단히 눈에 새겼다. 확실히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라거나 굉장한 기술 같은 건 아니다. 그저 빠르고 담백하게 일직선으로, 군더더기 없이 검을 내리칠 뿐이다.
검을 들고 내리친다.
그 간단한 동작이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순간 검을 든 이는 한 폭의 그림이 되었다.
조걸이 자신도 모르게 입을 헤 벌린다.
"이게 내려치기야."
"……."
조걸이 벌린 입을 퍼뜩 다시 다물었다.
"몸뚱이를 만들었으면 그게 걸맞은 검을 써야지. 우선은 하체."
청명이 바닥을 쿵 밟는다.
"단단하게 고정한 하체를 바탕으로 허리로 힘을 끌어 올리고, 손끝에 힘을 전해 내력과 일체화시킨 뒤 단숨에 내리친다."
파아아앙!
청명이 씨익 웃는다.
"쉽지?"
"……."
청명의 설명을 들은 윤종이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연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알겠다. 어설프게 화려한 검식을 추구하는 것보다 단련된 육체를 바탕으로 간결하게 검을 휘두르는 것이 지금의 우리에게는 더 낫다는 거겠지?"
"거기에 일격필살(一擊必殺)."
청명이 윤종의 설명을 보완했다.
"두 번 검을 휘두르지 않는다는 각오가 필요해. 한 번에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는 각오 정도는 있어야겠지."
윤종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일일이 보여 준 거로군.'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했다. 일격필살의 검을 직접 상대해 보는 것과 말로만 듣는 것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으니까. 지금 이곳에 있는 사람들도 청명의 검이 자신의 머리로 떨어지는 경험을 해 보지 못했다면 납득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 청명아."
윤종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네 말이 무얼 의미하는지 내 모르지는 않으나, 우리는 화산의 제자다. 이런 방식으로 이긴다는 게 의미가 있겠느냐?"
"화산의 제자라는 게 뭐?"
"화산의 제자라면 응당 화산의 검술로 상대를 쓰러뜨려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자 청명이 어이없다는 눈으로 윤종을 바라보았다.
"내가 지금 한 게 뭔데?"
"내려치기."
"육합검의 첫 초식이 뭔데?"
"……내려치기."
"그래. 육합은 화산의 검도 아니야?"
청명이 뚱한 눈으로 바라보자 윤종이 크게 헛기침을 했다.
"내 생각이 짧았다."
"쯧쯧쯧."
청명이 혀를 차고는 모두를 돌아보았다.
"육합은 화산의 기본이자, 화산의 기초다. 화산의 모든 것은 육합에서 출발해 육합으로 끝난다. 그런데!"
청명이 눈을 부라리자 찔리는 이들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육합도 제대로 펼치지 못하는 것들이 벌써 겉멋만 들어서는 낙화가 어쩌고, 칠매가 어쩌고!"
"크흐흠."
"아, 밤공기가 시원하네."
"달도 밝고."
얼굴이 뻘게진 삼대제자들이 딴청을 부렸다.
"똑바로 알아 둬."
청명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장난기를 싹 뺀 말투에, 사형제들이 일제히 진지한 눈으로 그를 응시한다.
"육합을 제대로 익히지 못한다면 다른 검술을 익혀 봤자 소용이 없어. 화산의 모든 검은 육합을 기반으로 하니까. 토대를 쌓지 못한 건물은 작은 바람에도 무너지는 법이야. 사형들은 우선 가진 것을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 필요가 있어."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믿지 못할 말이다. 하지만 이미 그들은 몸으로 겪지 않았는가?
'그토록 강해 보였던 낙화검이 단 일 검도 막지 못했다.'
'단순한 내려치기가 천하제일의 검술 같아 보였어.'
'중요한 건 검술이 아니라 검을 쓰는 사람인 거지.'
조걸이 자리에서 일어나 청명을 바라보았다.
"청명아."
"응."
"하나만 묻겠다."
"응."
조걸이 살짝 생각을 정리하고는 바로 입을 열었다.
"육합이 중요하다는 네 말이 무슨 의미인 줄은 안다. 하지만 우리는 네가 아니야. 바보 같은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먼 미래의 강함보다 지금 당장 종남 놈들의 콧대를 꺾어 줄 힘이 필요하다."
"흠."
"이 중에서 육합으로 이런 힘을 낼 수 있는 건 솔직히 너뿐이다. 그래서 묻는 건데."
조걸이 눈을 빛냈다.
"네가 시키는 대로 하면 우리가 종남 놈들을 이길 수 있는 거냐?"
청명은 대답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조걸이 그의 반응을 보며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한심한 말인 건 나도 알고 있어.'
무학을 익히는 자는 사사로운 승부에 연연하지 않고, 먼 곳을 보아야 한다는 것을 모를 조걸이 아니다. 하지만 종남에게 지는 것은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그 모멸감을…….
"사형은 내 말을 뭐로 들었어?"
"응?"
청명이 눈을 희번덕거린다.
"종남한테 진다고? 그런 인간은 살아 있을 자격이 없지. 어디 화산의 제자가 종남 같은 잡놈들에게 져! 대가리를 뽀사 버릴라!"
살기로 번들거리는 청명의 눈을 보며 조걸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니, 우리는 그렇다 치고 너는 왜 종남에 그 난린데?'
화산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놈이.
"말했지? 내가 이기게 해 준다고."
청명이 검을 들어 사형제들을 가리켰다.
"좋은 패배 같은 건 없어."
"……."
"싸움은 이기는 게 전부다. 바짓가랑이를 물고 늘어지든, 눈에 흙을 뿌리든! 이기면 끝이야! 비겁? 웃기는 소리! 전장에서 목 잘린 놈이 비겁을 논할 수 있을 것 같아?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이긴다!"
사문의 어른들이 들었으면 거품을 물 만한 선언을 태연하게도 하는 청명이었다.
조걸이 그런 청명을 보며 피식 웃었다.
'하기야. 이놈은 원래 이런 놈이었지.'
뭔가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럼 우리가 이제 뭘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너처럼 검을 쓸 수 있는 거냐?"
"그야 간단하지."
청명이 입꼬리를 씨익 말아 올렸다.
"일단 내려치기 만 번부터 시작하자."
"……농담이지?"
"설마?"
"농담이어야지."
"에이."
"농담……."
청명이 빙그레 웃는다.
"져서 뒈질래? 지금 뒈질래?"
"……."
어쩌면 종남보다 더 큰 적이 화산 안에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