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걱정하지 마! 내가 이기게 해 줄 테니까! (4)
청명의 시선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천천히 이동한다.
그리고 청명의 시선을 받은 이들은 하나같이 눈을 마주치지 않고 슬쩍슬쩍 시선을 외면했다.
'눈 마주치지 마.'
'저 새끼 오늘 날 잡았어.'
희번덕거리는 청명의 눈만 봐도, 괜히 걸렸다가는 몸 성히 돌아갈 수 없을 게 뻔해 보인다. 삼대제자들이 필사적으로 청명의 눈을 외면했다.
"나는……."
청명의 입에서 지옥에서 들리는 것 같은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종남 놈들에게 지는 꼴은 못 봐."
그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린다.
'오줌 싸겠네.'
'아니, 뭐 저런 놈이 들어와서는…….'
'오늘따라 애가 더 미쳤네. 보름이라서 그런가?'
"사람이 자존심이 있지. 어떻게 종남에 질 수가 있어?"
다른 모두가 넘어간다 해도 청명만은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아무 짓도 저지르지 않은 종남에 패해도 속이 쓰려 잠을 못 잘 텐데, 매화검법을 훔쳐간 그 악적 놈들에게 처발린다?
화병으로 급사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사형들은 이겨야 해. 내가 그렇게 만들어 준다."
"……."
다들 어떻게든 청명의 마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사람이 이만큼이나 모여 있으면 개중 눈치 없는 놈 하나정도는 반드시 있는 법.
"그런데……."
조걸이었다.
그는 티 없이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아까 그게 무슨 소리야? 죽어 보면 된다니?"
"오?"
청명이 반문해 오는 조걸을 보며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사형. 사형 나와 봐."
"……나?"
조걸이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응."
"……."
조걸이 살짝 주변을 돌아본다. 다른 사형제들이 그를 보며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밀려드는 배신감에 조걸의 입이 슬쩍 벌어졌다.
'나쁜 놈들.'
사형제의 의리는 어디에 모조리 가져다 팔아먹었단 말인가? 저 청명 놈이 화산에 오기 전에는 그래도 서로 돕고 사는 끈끈한 의리가 있었는데, 언제 이곳이 이리 각박해졌는가.
"빨리 나와 봐. 빨리."
"대, 대사형."
조걸이 마지막으로 윤종을 돌아보자 그는 헛기침을 하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얼른 나가 봐라."
"이 개……."
차마 뒷말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고개를 푹 숙인 조걸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앞으로 터덜터덜 걸어 나갔다. 윤종의 눈에는 조걸의 목에 감긴 목줄이 보이는 것 같았다.
청명이 앞으로 나온 조걸을 보며 말한다.
"세지고 싶다고 했지?"
"……그렇지."
"사실 이게 조금 이상한 말이지만……."
청명이 씨익 웃는다. 달밤에 칼 들고 있는 놈이 웃고 있으니 뭔가 스산하다.
"사형들은 이미 충분히 세졌어."
"……응?"
"그동안 한 수련들이 헛된 건 아니라는 거지."
조걸이 미간을 좁혔다.
"아직 종남 놈들에게는 어림도 없다며?"
"뭐 그렇겠지."
청명이 가만히 머리를 굴렸다.
'이송백이 종남 이대제자 중에서도 나름 강한 편이라고 했었나?'
다른 사형제들이 이송백을 대하는 걸 보면 확실히 그들 중에서도 강자인 것 같았다. 그를 기준으로 삼대제자들의 수준을 유추해 본다면…….
'전에 생각했던 거랑 비슷하겠네.'
조걸은 승부를 겨뤄 볼 수 있고, 윤종은 운이 필요하다. 하지만 다른 삼대제자들은 절대 못 이긴다.
물론 승부라는 건 그날그날의 몸 상태와 운에 따라 급격히 달라지기도 하는 법이지만, 천운이 따르지 않는 이상은 화산의 삼대제자들이 종남의 삼대제자를 이기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그런데 그건 사형들이 약해서가 아니야."
"……그럼?"
"몸뚱어리는 만들었는데, 예전이랑 똑같은 짓을 하고 있으니까 그런 거지."
"응?"
몸뚱어리?
조걸이 슬쩍 고개를 내려 자신의 몸을 바라보았다.
'달라지기는 했지.'
청명이 시키는 대로 수련을 하고 영약을 받아먹은 덕분에, 삼대제자들은 몸 하나는 소림에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탄탄해졌다.
쫙쫙 갈라진 근육을 보고 있으면 절로 흐뭇한 미소가 나올 정도다.
물론 보기에만 좋은 건 아니다.
수련에 적응한 이후 그들의 몸이 과거에 비해 몇 배는 강해졌다는 것을 모두 실감하고 있었다. 검은 더없이 빠르고 강해졌고, 하체는 바위처럼 굳건하다.
"그런데 똑같은 짓이라니. 지금 하는 게 뭐가 잘못됐나?"
"그걸 지금부터 알려 준다니까."
청명이 씨익 웃으며 조걸에게 다가왔다.
그그극.
청명이 든 검이 바닥을 긁으며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조걸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다가오는 청명을 바라본다.
"사형."
"응?"
"사형은 검을 왜 배운다고 생각해?"
"……그야……."
화산에서 말하는 정답은 이미 있다.
검을 통해 몸을 다스리고, 최후에는 도에 이른다. 도문에서의 검은 그저 도에 이르기 위한 수련의 방편일 뿐이다.
'하지만 이놈이 그런 대답을 원할 리는 없지.'
괜히 이 말을 했다가는 뻔한 소리 한다고 욕이나 들어 처먹을 게 뻔하다.
그러니…….
"상대를 이기기 위해서 아닐까?"
"크으!"
청명이 박수를 쳤다.
"사형의 머리에서 그런 대답이 나오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군. 도인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전형적인 흑도인의 대답 잘 들었습니다."
……그냥 뻔한 대답 할걸.
청명이 고개를 끄덕인다.
"반은 맞았어. 이기기 위해서지. 그럼 검으로 이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더 강해지면 되는 거 아냐?"
어차피 어떤 대답을 해도 욕은 먹는다는 걸 알아챈 조걸이 거침없이 대답을 했다.
"그거지."
하지만 이번에는 의외로 청명이 선선히 조걸의 대답을 인정한다.
"더 강하면 된다. 상대보다 강하면 이기는 거지. 그런데 이게 조금 의미가 다르다는 말이지."
"……이해가 좀 어려운데?"
"간단해."
청명이 빙그레 웃고는 검을 들었다.
"자 지금부터 사형이랑 내가 비무를 할거야. 사형은 할 수 있는 모든 수를 써 보도록 해. 나는 그냥 내려치기 하나만 할 테니까."
"……진짜?"
"응."
조걸이 미간을 좁혔다.
'날 너무 무시하는 것 아닌가?'
이미 청명에 대해 수많은 경험을 한 조걸이다. 그가 아무리 발악해도 지금 시점에 청명을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아무리 격차가 크다 한들, 내려치기만 쓰는 청명에게 패배한다는 건 자존심의 문제다.
'내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보여 주지.'
조걸이 이를 악물고는 목검을 들어 올렸다.
"그런데 너 진검으로 할 거냐?"
"응."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에이, 설마."
왜 확실하게 대답을 해 주지 않지?
안 벤다고?
조걸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생각이 있겠지.
"시작하면 되냐?"
"호오?"
조걸이 자신감 있게 목검을 들어 올리자 청명이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사형 자신감이 좀 붙은 것 같네."
"덕분에 죽도록 수련했으니까."
"흐음."
청명도 빙그레 웃으며 검을 들어올렸다.
'자신감이라, 좋지.'
검을 쓰는 이는 언제나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 자신을 믿지 못하는 이는 제 실력을 발휘하기 힘든 법이니까.
하지만…….
'아직은 좀 이르지.'
닭이라도 된다면 인정해 주겠지만, 삼대제자들은 아직 병아리에 불과하다. 화산이 욱일승천하는 기세로 발전하고 있으니 그에 덩달아 들뜨는 건 당연하지만, 지금은 자신감을 가질 때가 아니라 내실을 다질 때였다.
이제 그걸 알려 줘야지.
조걸이 날카로운 눈으로 청명을 노려본다. 눈빛만 본다면 일류 검수가 따로 없다.
"각오해라!"
"응?"
"사심은 없다! 흐아아아앗!"
조걸이 기합을 지르며 청명에게 달려들었다. 사심이 없다는 말이 무색하게 그의 눈은 사심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죽어도 한 대는 때리고 죽겠다는 의지가 너무 보여서 민망할 정도다.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남들이 들으면 거품을 물고 손가락질을 했을 말이지만, 다행히 이곳에 독심술을 익힌 이는 없었다.
청명이 혀를 차고 조걸의 검을 피해 낸다.
"타아앗!"
하지만 그 정도는 당연히 예상했다는 듯이 조걸의 검이 어지러운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한다.
낙화검(落花劍).
아직 전수가 시작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음에도 조걸은 낙화검을 능숙하게 펼쳐 내고 있었다. 칠성보(七星步)와 어우러진 낙화검은 검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봐도 절로 탄성이 나올 만큼 화려하고 정교했다.
'확실히 재능은 있다니까.'
청명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조걸을 바라본다.
검에 대한 선천적인 재능으로 따진다면 조걸은 화산의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것이다. 재능만으로는 종남의 이송백에게 결코 밀리지 않는다.
'하지만.'
청명이 씨익 웃었다.
원래 자라나는 새싹은 한 번씩 꾹꾹 밟아 줘야 더 잘 자라는 법이 아니던가?
이건 절대 사심이 아니다. 오로지 조걸의 성장을 바라는 마음이다.
청명이 검을 꽉 움켜잡았다.
"생각보다 잘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사형?"
"……잘해?"
"예. 조걸 사형이 일방적으로 몰아치는 것 같은데요?"
윤종이 쓴웃음을 지었다.
"보이기야 그리 보이겠지."
"예?"
"일방적으로 몰아치고는 있지만, 옷자락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있지 않느냐?"
"아……."
다른 이들이 조걸의 검에 주목할 때, 윤종은 청명의 움직임에 주목했다.
보법?
그런 것도 아니다.
그저 다가오면 물러나고, 내리치면 빗겨 낸다. 적당히 한 발 한 발을 떼는 것만으로 청명은 조걸의 검을 모조리 피해 내고 있었다.
가만히 보고 있자면 대련이 아니라 잘 짜인 검무를 보는 느낌까지 난다.
표홀(飄忽)히 한 발 한 발을 내디딜 때마다 조걸의 검이 마치 일부러 청명을 피하는 것처럼 허공을 가른다.
'나는 지금 저녀석의 움직임을 어디까지 파악하고 있는 걸까?'
윤종이 청명과 상대할 수 있었던 건, 그에게 얻어맞거나 함께 수련할 때뿐이었다.
청명이 화산에 온 지 몇 달이 지났지만 그가 무공을 펼치는 모습을 옆에서 자세히 지켜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청명과 그들의 격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말이다.
"이이익!"
조걸은 이를 악물고 검을 떨쳤다.
잡히지 않는다.
마치 유령과 싸우는 것 같다. 그의 검이 바람에 휘날리는 꽃잎처럼 화려하게 공간을 메우는데도 청명은 그의 검을 아무렇지도 않게 피해 낸다.
단 한 치.
찌르면 한 치 앞에서 검이 멈추고, 내리치면 어깨의 한 치 옆을 스쳐 지난다. 그리고 휘두르면 고개를 까딱이는 것만으로 그의 검이 만들어 내는 모든 변화를 무위로 돌려 버린다.
암담하다.
전에 청명과 맞붙었을 때는 어떻게 졌는지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지 않은가? 전력을 다하고 있음에도 옷깃조차 스칠 수 없다.
조걸이 이를 악물고 검에 내력을 불어넣었다.
"으아아아아아아!"
조걸의 검이 새파랗게 빛난다.
"검기?"
"사제가 검기를?"
등 뒤에서 쏟아지는 목소리는 조걸의 귀에 닿지 못했다.
조걸은 오로지 청명을 베어 내겠다는 일념으로 필사의 검을 전개했다. 하지만.
"끝이다."
그 순간 청명이 단 한 발 앞으로 불쑥 나오더니 머리 위로 검을 들어 올린다.
조걸은 보았다.
청명이 검을 들어 올리는 광경을.
마치 시간이 멈춘 듯이 느리게 흐르는 세상에 청명의 검만이 제 속도로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 바람이 불고 물이 흐르는 것처럼, 그저 자연스러운 동작.
'이건?'
정확하게 하늘을 가리킨 검이 멈춰 선다.
그리고.
파아아아아아아아!
고막을 찢어 버릴 것 같은 가공할 파공음과 함께 청명의 검이 조걸의 머리 위로 떨어진다.
'죽는…….'
조걸은 눈도 감지 못하고 자신의 머리로 내리쳐지는 검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의 눈앞에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이 주르륵 스쳐 지나간다.
이게 주마등이라는 것을 알아채기도 전에 청명의 검이 조걸의 머리에 와 닿았다.
파아아아앙!
그리고 가죽 북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검이 조걸의 이마에 닿은 채 멈춰 선다.
털썩.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은 조걸은 혼이 빠진 얼굴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청명이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죽어 본 기분이 어때?"
"……."
어떠냐면…… 조금 지린 것 같은데.
어…… 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