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걱정하지 마! 내가 이기게 해 줄 테니까! (3)
"이대제자들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으음."
현종이 무겁게 침음을 흘렸다.
폐관을 떠났던 아이들이 돌아온다는 건 좋은 일이지만, 그 뒤에 이어질 일을 생각하면 좋게만 생각할 수는 없다.
"어디쯤 왔다더냐?"
"몇몇은 이미 화음에 도착한 듯싶고, 대부분은 이제 거의 화음에 도달한 것 같습니다."
"그렇구나."
현종이 고개를 들어 운암을 바라보았다.
"장문인."
"말하거라."
"본디 반년 뒤에 치러져야 할 화종지회가 왜 이리 당겨진 것입니까?"
"종남에서 연통을 보내왔다. 이번에는 화종지회를 조금 당겨 치르고 싶다는구나."
"회를 미루거나 연기할 수는 없겠습니까?"
"어렵다."
운암이 한숨을 내쉰다.
"화산은 지금 한창 기세가 오르고 있습니다. 모든 일들이 잘 풀리고, 적어도 밥걱정은 없이 살 수 있게 되어 가고 있습니다. 다들 얼굴에 웃음이 떠나질 않습니다. 이건 불과 몇 달 전을 생각한다면 괄목할 만한 변화입니다."
"그렇지."
현종도 운암의 말에 동의한다.
가장 달라진 점은 일단 화산에 활기가 넘친다는 것이다.
당장 내일이 어찌될지 모르고 살아가던 이들이 희망을 봤다. 만면에 띤 웃음이 지켜보는 이의 마음까지 푸근하게 한다.
"하지만 저희는 본질적으로 무파입니다."
"그렇지."
"새로운 무학들을 발굴해 익히고 있지만, 아직 제대로 된 성과가 나올 시기가 아닙니다. 그리고 설사 성과가 나온다고 해도 종남에 대적할 정도는 아닙니다."
현종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운암의 말이 모두 맞다.
과거의 화산은 종남을 압도할 수 있는 무학을 지니고 있었지만, 지금의 화산에 남은 무학은 껍데기뿐이다. 겨우 칠매검이 발견되어 희망을 얻은 정도였다.
'그것도 옅은 희망이지.'
갈 길이 너무도 멀다.
이제 겨우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했다. 하지만 화산이 옛 명성과 영화를 되찾기 위해서는 결국은 과거의 무위를 되찾아야 한다.
하나 어디 무학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해결되는 일이던가?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이번 화종지회의 결과가 전과 마찬가지라면, 이제 겨우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던 제자들이 역시나 안 된다는 생각에 패배주의자가 되진 않을까 두렵습니다."
"운암아."
"……예. 장문인."
"나라고 왜 그걸 모르겠느냐?"
현종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피한다고 달라질 게 있더냐? 우리가 화종지회를 피한다고 해서 제자들이 희망을 가지겠느냐? 장문인조차 자신들을 믿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않겠느냐?"
"그건……."
운암이 고개를 숙였다.
"승부에서 지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다. 최선을 다했음에도 패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더 노력하면 된다. 하지만 지지 않기 위해서 승부를 회피하는 건, 결코 해선 안 될 일이다. 당장의 안락을 위해서 더 큰 화를 불러들이는 격이란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장문인."
"걱정하는 네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화종지회를 미루는 건 여러모로 어렵겠구나."
운암이 한숨을 내쉬었다.
'괜한 말을 해서 장문인의 심기를 어지럽혀 드렸구나.'
이리되면 조금 희망찬 말을 해 볼 필요가 있겠다.
"사실 이대제자들이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다면 다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운암도 현종도 그게 쉽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한때는 발아래에 두던 종남이지만, 지금 종남과 화산의 격차는 메울 수 없을 만큼 벌어졌다. 종남의 이대제자가 가지는 무게감과 화산의 이대제자가 가지는 무게감은 만근거암과 깃털만큼 차이가 난다.
폐관을 통해 노력을 했다지만, 이기는 건 어려울 것이다.
'적어도 쉽게는 지지 않는다면 좋으련만.'
현종의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운암아."
"예."
"고생하고 돌아오는 아이들이다. 좋은 음식을 준비하고 술을 풀거라."
"하나……."
"힘들게 수련을 한 아이들에게 하루쯤 휴식이야 괜찮겠지. 그리고 그 아이들도 화산의 사정이 달라졌음을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과연 그렇습니다. 차질 없이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이만."
운암이 자리에서 일어나 조심스레 예를 갖췄다.
운암이 방을 나가자 현종이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을 연다. 창밖으로 보이는 연화봉을 보며 그는 참았던 한숨을 나지막이 내쉬었다.
'종남이라.'
심장에 박혀 있는 가시 같다. 숨을 쉴 때마다 아프고, 언젠가는 더 깊이 박혀 숨통마저 끊어 놓을 것 같은 가시.
"어렵구나. 어려워."
겨울은 길고 화산의 봄은 아직 너무도 멀다.
* * *
"이길 수 있어?"
윤종과 조걸이 청명의 방에 모였다.
다른 이가 이런 말을 했다면 무시하고 넘겼겠지만, 청명의 말은 그 무게가 다르다.
윤종도 조걸도 안다. 청명이 헛된 말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을. 아무리 황당한 말이어도 청명은 자신이 한 말은 반드시 지켰다.
"우리가?"
청명이 둘을 보며 혀를 찼다.
"지금은 안 되지."
"응? 이만큼 강해져도?"
"사형들이 세지긴 했지."
"그렇지?"
청명이 엄지와 검지를 티끌만큼 띄웠다.
"한 이만큼?"
"……."
"……."
"에이. 농담이야 이 정도는 아니지."
"역시!"
"그럼 그렇지."
청명이 엄지와 검지를 딱 두 배만큼 더 띄웠다.
"이 정도는 되겠지."
"……."
"……."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던 조걸이 결국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삿대질을 해 댔다.
"야! 그래도 우리가 그동안 죽어라고 구른 게 있는데, 겨우 그 정도 세졌다는 게 말이나 되냐! 내가 몸으로 느끼는데."
"겨우 몇 달 굴렀다고 세지기는 얼어 죽을!"
"아니, 예전보다는 확실히 세졌는데……."
"도토리가 세 배 자란다고 나무에 견주겠어?"
"끄응."
청명은 솔직한 평가를 내리는 중이다.
지금 삼대제자의 성장세가 무섭긴 하다. 이만한 속도로 성장하는 이들은 청명도 본 적이 없다. 하기야 그만큼 갈구고 그만큼 퍼먹였는데, 실력이 안 늘면 그놈이 더 대단한 거지.
하지만…….
'아직 멀었어.'
과거 화산의 삼대제자와 비교해 보면 갈 길이 구만 리다. 그리고 그건 종남에 비해서도 마찬가지다.
당대의 종남이 화산에게 견주기는 어려웠던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구파일방이다. 그때의 실력을 아직까지 유지하고 있다면, 지금의 청자 배 중에 종남의 삼대제자를 이길 사람은 없다.
'그나마 이 녀석 하나?'
조걸 정도는 상대를 잘 만나면 이겨 볼 가능성이 있는 정도다. 윤종은 좀 더 잘 만나야 하고.
삼대제자 중에서 딱 둘. 전체로 비교한다면 굳이 머리를 굴려 볼 필요도 없다.
"그럼 어떻게 이겨?"
"세지면 되지."
윤종이 눈을 찌푸렸다.
"화산지회까지는 이제 길어야 보름일 것이다. 몇 달 동안 수련을 했어도 못 이기는 상대를 보름 만에 어찌 따라잡는단 말이냐?"
"그러니까 물어봤잖아."
"……응?"
청명이 씨익 웃었다.
"죽을 각오 되어 있냐고."
"……."
아니, 그게…….
"대체 무슨 방법인지나 좀 들어 보면 안 되나?"
"그게 뭐가 중요해. 중요한 건 각오가 되어 있냐는 거지."
"아니……."
조걸이 뭔가 말을 하려는 순간 윤종이 그의 말을 끊으며 입을 열었다.
"각오는 되어 있다."
"사형!"
조걸이 언성을 높였지만, 윤종은 조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다른 사형제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각오가 되어 있다. 그리고 아마 다른 아이들도 대부분은 각오가 되어 있을 거다."
"사형, 하지만 이놈이 하는 일은……."
"안다."
윤종은 더없이 단호했다.
"하지만 그런 건 상관없다. 나는 당장 죽으면 죽었지 다시 그 꼴은 못 본다. 그 종남 놈들이 내 가슴을 밟고 웃던 모습이 아직도 꿈에 나온다."
"……그건 그렇죠."
두 사람은 이미 이 년 전 화종지회에 대표로 나선 경험이 있다. 그리고 처참하다는 말도 모자랄 정도의 패배를 경험했다.
그 모멸감을 어찌 말로 하겠는가?
"그 굴욕을 돌려줄 수만 있다면 나는 죽음도 감수하겠다. 그걸 참고 사는 건 무인이 아니다. 차라리 환속하고 산을 내려가면 내려갔지, 다시는 그 꼴 못 본다."
조걸도 고개를 끄덕였다.
윤종의 말을 들으니 그때의 굴욕이 되살아난다. 다시는, 정말 두 번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흠, 그래. 그럼 내가 이기게 해 줄게, 사형."
"믿는다."
"좋아."
청명이 씨익 웃었다.
하지만 못내 불안했던 조걸은 묻지 말아야 할 걸 묻고 말았다.
"그런데 청명아."
"응."
"이제 그 방법이란 걸 말해 주면 안 되냐?"
"아, 별거 없어. 그냥 수련 방식을 좀 바꿀 거야."
"어떻게?"
청명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실전형."
"응?"
"쌓았으면 이제 써먹어야지. 그 단련한 몸뚱이를 사용하는 방법을 알려 주지."
"……."
조걸의 눈이 살짝 흔들린다.
"어……. 사용법이라면?"
청명이 어깨를 으쓱한다.
"알면서 그러네. 원래 모든 무공은 몸으로 구르면서 익히는 거지. 준비해. 오늘 저녁부터 당장 시작할 테니까."
"……."
뭔가 잘못되어 간다는 걸 직감한 두 사람이었다.
* * *
야심한 밤.
삼대제자들이 연무장에 모여 있었다.
"아니, 굳이 꼭 이렇게 밤에 모여야 하나?"
조걸이 입을 삐죽 내밀고 투덜거렸다.
이제는 삼대제자들이 새벽에 알아서 수련을 한다는 걸 모르는 어른들이 없다.
처음에는 수련에 대해 우려를 표하는 이들도 있었고, 수련 방식에 대해 딴지를 거는 사숙조들도 있었지만, 수련이 몇 달째 이어지다 보니 이제는 다들 그러려니 하는 편이다.
백매관의 관주인 운검이 효과를 공인하고 참견을 막아 주기도 했고 말이다.
그러니 이제는 밝은 낮에 수련을 해도 될 텐데, 굳이 이런 새벽에만 수련을 고수하는 청명이었다.
"그런데 대체 뭘 하려는 걸까요, 사형?"
"낸들?"
윤종이 어깨를 으쓱했다.
다들 이런 새벽에 수련을 한다는 것에 불만을 토하면서도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나와 정렬하고 있다.
이제는 다들 알고 있는 것이다. 청명의 수련이 과격하기는 하지만 효과가 있다는 것을.
그런 청명이 강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호언장담을 했으니 분명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다들 나왔어?"
그때 청명이 어슬렁어슬렁 연무장으로 다가온다.
삼대제자들이 흥분과 두려움이 섞인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분명 이번에도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하겠지만, 버텨 낼 수만 있다면 분명히 결과를 만들어 줄 것이다.
이제는 다들 미묘한 느낌으로 청명을 신뢰하게 된 삼대제자들이었다.
"청명아. 그런데 이번에 할 수련이……."
그때였다.
스르르르릉.
청명이 허리춤에 찬 검을 뽑아낸다.
"……."
진검?
……어?
저거 진검 같은데?
청명이 뽑은 검이 달빛을 받아 새파랗게 빛난다.
평범한 놈이 진검을 잡고 있어도 미묘하게 겁이 나는 법인데, 미친놈이 달밤에 저러고 있으니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이다.
"아, 수련?"
청명이 태연하게 반문했다. 그리고 진검을 든 채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온다.
"별건 없어. 그냥……."
입꼬리가 씩 올라간다.
"한 번씩 죽어 보면 돼. 별거 없지?"
……뭐래. 저 미친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