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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67화 (68/1,567)

67화. 걱정하지 마! 내가 이기게 해 줄 테니까! (2)

여인이 차가운 눈으로 청명을 노려본다.

그 와중에 청명은 눈앞의 사람에 대한 몇 가지 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다.

일단 이 여자는 화산의 소속이다.

무복의 가슴에 새겨진 매화 무늬가 그 사실을 증명한다. 이 무복을 입을 수 있는 사람은 화산의 제자밖에 없다.

둘째.

'쯧쯧. 남자깨나 홀리겠네.'

예쁘다.

이전 생의 청명은 수도 없이 강호를 누볐다. 세파에 휘둘리지 않고 도를 닦는 것이 도사의 바른길이라지만, 화산제일고수로 이름 높은 청명이 화산 내에 처박혀 있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후기지수일 때부터 그랬다. 다른 문파의 후기지수들, 그러니까 천재니, 백 년 만에 나오는 인재니, 혹은 뭐 삼룡이니 하는 애들의 볼기짝을 후려치는 것부터가 시작이었다.

그 후에는 사고를 치는 마두 놈들이나, 사기를 치는 사파 놈들을 때려잡는 협행(俠行)을 통해 화산의 명성을 올려야 했다.

그뿐이랴. 노년에 들어서도 어느 문파의 제일고수니 하는 것들을 모조리 쓰러뜨려 화산의 검이 천하제일임을 증명해야 했다.

물론 자의는 아니었지만.

'영감님들이 워낙 쪼아 대야지.'

시키면 하기 싫은 게 인지상정. 죽어도 가지 않으려는 청명을 어떻게든 청문과 엮어서 내보내는 게 당시 화산 장로들의 역할이었다. 덕분에 청명은 질릴 만큼 강호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 많고 많았던 강호행 중에서도 이만한 미인을 목격한 경험은 거의 없었다. 아직은 덜 피어난 꽃 같은 느낌이 있기는 하지만, 언젠가 만개한다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질 정도다.

흑단 같은 머리와 눈썹, 새하얀 피부. 그리고 더없이 맑고 큰 두 눈이 인상적이었다.

청명이 진짜 약관이 되지 않은 어린아이였다면 지금쯤 저 미모에 압도되어 허둥댔을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지금의 청명이, 거죽에 불과한 미모에 휘둘리기에 너무 많은 걸 겪고, 너무 많은 걸 본 노인이라는 점이다.

"너는 누구지?"

"사람이요."

"……."

검이 살짝 더 찌르고 들어온다.

아, 따가라! 얘가 농담을 모르네! 농담을!

"화산의 무복."

그녀의 시선이 청명의 가슴팍에 머물렀다가 다시 얼굴로 향한다.

"본 적 없는 얼굴. 누구?"

"저도 그쪽 처음 보는데요?"

여인의 눈이 가늘어진다.

"혹시 삼대제자니?"

"네."

"화산의 삼대제자는 해가 진 뒤에는 문외(門外)를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

"저는 되는데요."

"……뭐?"

"장문인이 허락하셨어요."

뻔뻔하게 되받아치는 청명의 말투에 여인의 얼굴에 한기가 한 겹 덧씌워졌다.

"장문인께서?"

"네."

"삼대제자에게?"

"네."

"거짓말."

청명이 대답 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확인해 보시든가요. 설마 화산의 제자가 장문인의 이름으로 거짓말을 하겠어요?"

여인의 눈이 살짝 흔들린다. 일리가 있다고 여긴 모양이다.

"그러니까 일단 이 검 좀 치워 주세요. 따끔하거든요."

"……."

여인이 일단 검을 내렸다. 말의 진위를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혹여 장문인이 허락한 일이라면 청명이 여기 있는 것은 죄가 아니다.

다만.

"타인의 수련을 보는 건 원래 금지되어 있는 일이야."

"여긴 원래 제가 수련하던 곳이에요. 어제까지만 해도 제가 쓰던 곳에 갑자기 다른 사람이 나타났는데, 저보고 왜 훔쳐보냐고 하면 제가 뭐라고 답해야 하죠?"

"발견한 순간 떠나면 돼."

"처음 보는 사람이 화산의 주변을 알짱거리는데 확인은 해 봐야죠."

여인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새하얀 얼굴이 살짝 붉어지는 것을 보니 슬슬 열이 받는 모양이었다.

'얘 말싸움을 못하네.'

검은 제법 날카로운 것 같지만, 혀는 날카롭지 않은 모양이다. 하기야 이만한 얼굴이면 말싸움을 할 일도 잘 없었겠지.

'더러운 세상 같으니.'

여하튼 얼굴 잘난 것들은 인생 편하게 산다니까.

"이름이 뭐지?"

"청명이요."

"도호를 벌써 받은 건가?"

"아니요. 이름이 청명인데요?"

"……삼대제자는 청자돌림인데? 도호가 아니라 이름이?"

"네. 도호를 받으면 도호도 청명으로 받겠죠."

"아……."

맹하다. 확실히 얘 맹하다.

"나는 유이설(劉怡雪)이다."

"네."

유이설이 아무 말 없이 청명을 빤히 바라본다.

"왜 그러세요?"

"나는 이대제자니, 네가 화산의 청자 배가 맞다면, 나는 네 사고(師姑)가 되는구나."

응?

청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백자 배가 있었어?'

아니, 물론 화산의 배분은 청명현운백(淸明玄雲白)을 따르니, 운자 배 아래에 백자 배가 있는 게 당연하다. 그 뒤에는 처음으로 돌아가 청자 배가 생기는 법이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 아이들을 가르치는 운자 배 밑에 백자 배가 있는 게 정상이기는 하다.

'한 놈도 안 보이기에, 그냥 잊고 살았건만.'

사문에 전쟁이 벌어지거나 봉문을 하는 경우, 배분을 바로 이으면 나이의 차이 때문에 여러 문제가 생긴다. 그렇기에 사정에 따라 한 배분 정도는 건너뛰기도 하는 법이다.

화산의 사정이 워낙 어려웠으니 그리 처리된 줄 알았건만, 백자 배가 있다는 말인가?

"화산에 사숙이나 사고가 있다는 말은 오늘 처음 듣는데요?"

"너 화산의 막내지?"

"예, 그렇죠."

"네 사형들이 말해 주지 않았어?"

"어……. 그게……."

청명과 눈만 마주쳐도 어떻게 도망쳐야 할까를 고민하는 삼대제자들이 그런 정보를 청명에게 이야기해 줄 수 있을 리가 없다.

'내 죄구나.'

간단하게 납득한 청명이 깔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착오가 있었던 모양이네요. 아무려면 어떻겠어요?"

생각지도 못했던 백자 배가 새로 나타났다. 하지만 그게 뭐 문제겠는가? 청명에 입장에서 보면 핏덩이들이 몇 추가된 것에 불과하다.

"그게 끝?"

"네?"

"인사는?"

청명이 얼굴을 확 일그러뜨렸다.

'아니. 쥐톨만 한 게 늙은이한테 인사를 받아 먹으려고 하네.'

어린 게 죄지. 어린 게 죄야. 서러워서 진짜.

"네. 반가워요. 사고."

청명이 감정이 하나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대충 인사를 했다.

'그러니까 이제 좀 가라.'

나도 수련을 해야지. 남의 수련장 떡하고 차지하고 앉아서 시간 끌지 말라고! 해 뜨려고 하잖아!

"……이상한 아이네."

누가?

내가?

두 눈에 이채를 띠고 청명을 바라보던 유이설이 조금 싸늘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 말이 진실인지 장문인께 확인할 거야. 네가 만약 거짓말을 했다면 각오하는 게 좋아."

청명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러시든가요."

"……."

한참 동안 말없이 청명을 빤히 바라보던 유이설이 고개를 살짝 모로 꺾는다.

"진짜 이상하네."

"……."

그 말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다.

검을 검집에 집어넣은 유이설이 청명을 일별하고는 낙화봉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사라질 즈음, 청명은 저 멀리 뜨는 해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고 내 팔자야."

증손자뻘도 안 되는 어린애한테 이런 취급이나 받고.

"수련 시간도 애매해졌네."

하려면 할 수야 있겠지만, 누군가가 이곳을 같이 쓴다는 생각이 들자 수련할 마음이 사라진다.

'진짜 이러다가 수련할 때마다 화산을 내려갔다 다시 올라올 판이네.'

청명이 입맛을 쩝 하고 다셨다.

아무래도 다른 수련장을 찾아봐야 할 모양이다.

* * *

"분위기가 왜 이래?"

청명은 초상집이 되어 있는 식당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런 거무죽죽하고 음산한 분위기는 몇 달 만에 처음이다. 예전의 백매관이 약간 이런 분위기였던 것 같은데, 청명이 뒤집어 놓은 이후로는 이런 적이 없었는데?

"왔느냐?"

윤종이 살짝 손을 든다.

밥을 받아 들고 윤종과 조걸이 앉아 있는 식탁으로 간 청명은 자리에 앉자마자 물었다.

"분위기가 왜 이래요?"

"……네 사숙들이 돌아온단다."

"백자 배요?"

"오? 네가 그걸 알아?"

"……."

이 새끼 한번 잡을까?

내가 화산에서만 평생을 산 사람이다, 인마!

"여튼 그래서요? 백자 배가 돌아온 게 뭐가 문제라도 됩니까?"

"음. 우선 사숙들을 백자 배로 칭하지 말거라. 사숙들이 듣기라도 하시면 사달이 날 거다. 크게 혼날 수 있어."

"제가요? 아니면 그쪽이요?"

"……그건 고민을 좀 해 봐야겠는데."

윤종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사숙들은 그동안 폐관을 위해서 화산을 떠나 있었다. 예전엔 수련동들이 제대로 정비가 되지 않아서 화산 내에 대규모로 폐관 수련을 할 장소가 없었거든."

"유학 갔다 온 거네요."

"……다른 문파에 다녀온 게 아니니, 유학이라 하기는 좀 그렇고."

"아무튼 그래서요? 그게 뭐라고 애들이 저러고 있어요. 사숙들이 하나같이 성격이 좋지 않아서 애들을 후려 패기라도 하나?"

"사숙들은 누구처럼 사람을 핍박하지 않는다."

"그 '누구'가 누구인지 궁금한데."

"……넘어가자꾸나."

윤종이 어설프게 공격을 했다가 쩔쩔매며 물러났다. 그러자 조걸이 재빨리 말을 받는다.

"화종지회(華終) 때문이야."

"응? 꽃이 끝나는 회?"

"그게 아니라 화산과 종남의 회."

"그게 뭔데요?"

조걸이 한숨을 내쉬었다.

"화산과 종남은 한 번씩 교류를 하거든. 지금은 이 년마다 한 번씩 모여서 서로의 성취를 비교해 보는 비무 대회를 가지고 있어."

"아, 뭐 그런 게 있다고 들었던 것 같긴 한데……. 언제 생겼대?"

"나는 모르지. 여하튼 꽤 오래됐다고 들었어."

윤종이 거들었다.

"처음 화종지회는 오 년마다 한 번씩 친목을 다지는 자리였다고 들었다. 그게 조금씩 변해서 이대제자와 삼대제자들의 교류의 장이란 명목으로 비무를 하는 상황까지 가 버렸지."

"비무?"

"비무라고 해 봐야……."

대답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일방적으로 얻어맞기만 했지."

"그때 맞은 허리가 아직 쑤시는데."

"이번에는 또 어떻게 버티나. 개박살 나고 나면 사숙조님들이 다들 또 얼굴에 철갑 씌우시고 다니셔야 텐데. 분위기도 개판 나고."

돌아가는 상황을 보며 청명이 피식 웃었다.

"아, 그러니까. 윗분들이 직접 싸우면 일이 커지니까, 이대제자랑 삼대제자들이 싸운다고? 그리고 그동안은 일방적으로 얻어맞기만 했고?"

"그렇지. 그래서 이번에는 그 치욕을 당하지 않겠다고, 사숙들이 단체로 폐관에 들었다가 이제 돌아온 거야. 다시 말하면 화종지회가 열릴 때가 왔다는 거지."

"아, 그래요?"

청명의 입가가 싸아아악 말려 올라갔다.

"종남이랑 비무를 한다는 말이지?"

종남.

그 종남.

안 그래도 종남에 대한 악감정이 인생 통틀어 최고점을 찍던 와중이다.

예전에는 안쓰러운 감정이 조금이나마 있었는데, 최근 설화십이식에 대한 것을 알게 되면서 종남이라면 자다가도 이가 갈리는 사람이 바로 청명이 아니던가?

"비무라……."

과거 청명이 있을 당시에는 화종지회 같은 게 없었다.

당시의 화산은 천하제일 검문이었고, 종남이야 기세가 영 좋지 않을 때니, 비무대회 같은 게 의미가 없었다. 그런데 화산이 약해진 틈을 타 친교의 비무를 한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

'이것들이 화산이 만만하다 이거지?'

청명의 눈이 돌아갔다.

아무리 화산의 꼴이 개판이라지만, 청명의 새끼가 아닌가. 내 새끼는 내가 까야지 남이 까는 꼴은 못 본다!

"그래서 그 이대제자 놈들이!"

"청명아, 제발 부탁이다. 사숙 분들이라고 해주라. 제발."

"어. 그럼 그 사숙 놈들이!"

"……."

"폐관했으면 이길 수 있는 거야?"

"……그건 좀."

윤종이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비무를 대비해 폐관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불리하다는 뜻인데, 성취가 아무리 높아도 이긴다고 장담까지 하긴 힘들다.

"그렇단 말이지."

청명이 이를 뿌드득 갈았다.

"그럼 우리라도 이겨야지!"

"응?"

"사형들! 이기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겠지? 독을 삼킨다든가! 아니면 팔다리가 부러진다든가! 어떻게든 종남의 애새끼들을 후려 패고 화산의 이름을 떨칠 수 있다면 죽어도 좋다는 그런 각오는 당연히 있겠지!"

아니, 거기까진 좀…….

너 너무 나가는 것 같은데?

"걱정하지 마! 내가 이기게 해 줄 테니까! 아주 피떡으로 만들어 버리겠어!"

아무래도 얘는 도사가 아닌 모양이다.

'녹림으로 가서 산적이나 하지. 왜 여기로 와서.'

하기야 여기도 산이구나.

허허.

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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